작동되는 자아를 넘어서 타자와의 관계의 정치로

자아를, 나의 행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윤리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오늘-여기를 특징짓는 문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윤리적인 것은 이미 정치적인 것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며, 윤리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옳음을 실천하는 일은 이미 정치함을 향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윤리가 정치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윤리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부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참 어렵지 않냐는 이야기도 같이 하게 됐다. 제대로 부수는 일부터가 어렵고 뭘 만들어내는 일은 더 어렵다. 멀기만 하다. *    비판은 어떤 것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비판이 그 대상으로 삼는 어떤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 비판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탈피하는 것 ─ 그것을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파레시아, 불온-되기

우리들 – 1.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어떤 (가정된) 물음 혹은 이의제기에 답을 정해두었던 것 같다. “아니요, 나는 ‘우리 세대’ — 내가 속한 세대 — 를 대변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이 세대를 어떤 담론들 속에서, 어떤 담론들과 연결지어 말해야 할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세대, 권위적인 것에 대한 민감한 거부감을 가진 세대, 합당한 절차와 공정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대,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쓰기가 아주 조심스럽다······ 아마도 적절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 가장 세속적인 (혹은 속물적인) 세대, 그

함정인 것 같긴 하지만

# 가끔 함정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굳이 이유를 찾는 일’ 혹은 ‘이름짓는 일’이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고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이러해야만 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일, 확실히 정의내리려는 일은 도움을 준다. 함부로 무언가를 확정짓거나 하나의 답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판단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려고 이유를 찾는 것 아니냐고? 글쎄. 애초에 함정이었다니까. 물음은 도움을 주지만 세상은 물음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평>을 시작하고 나서 이미 두어 번은 인용한 것 같지만, 그래도

저항의 조건: “족쇄”는 언제나 저항의 대상인가?

이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철학’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오히려 이하의 논증은 포스트모던을 위한 변호에 가깝다. 비판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던 철학이 아닌 포스트모던을 오해하는 독법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비판되는 것은 포스트모던 철학을 오독한 단순한 선동 행위이다. 저항 논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저 제도는 단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관습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저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들을 묶어 편의상 ‘저항 논제’라고 부르자. 그런데 저항 논제의 전건은 “모든 제도는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

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윤리

1. 말장난 비슷한 것으로 시작해 보자. 칸트는 보편적인 당위명제를 당위적으로 말했는가? 즉 그가 선험적인a priori 윤리 명제가 있음을 말할 때, 그가 주장한 것은 <그러한 명제에 따라 우리가 살아야 한다>였는가 또는 <우리는 그러한 명제를 직관적으로 안다>였는가? 전자라면 칸트는 철학적 주장을 한 것이 아니다. 철학적인 주장이라는 것은 선험적 사실에 관련된 명료화와 관련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이른바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것을 철학적 분석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면, 이는 그 명제가 칸트에 의해 주장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