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동함/됨에 맞서 불온을 가동하기

1. 작동함 삶은 작동된다. 살아보려는 발버둥,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 모든 몸부림을, 삶을 삶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으로 만드는, 그 모든 초월성, 그 모든 욕망과 불안, 두려움을 공급받아 작동한다. 이 작동함이 수많은 작동함들을 끝없이 일깨운다. 작동함은 버벅거리고 고장나고 망가지고 그리하여 멈추기 전까지는 요소화되지 않는다. 무엇이 작동하는가? 말하자면, 작동함에는 주어/주체가 없다. 작동함은 원만함, 원활함이고, 순환에 이은 순환, 결과가 원인을 보증해주는 연속, 더는 ‘원인-결과’의 이원화된 쌍으로 분화되지 않는 흐름의 선들, 그 선들이 겹쳐져 그려내는 모양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파레시아, 불온-되기

우리들 – 1.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어떤 (가정된) 물음 혹은 이의제기에 답을 정해두었던 것 같다. “아니요, 나는 ‘우리 세대’ — 내가 속한 세대 — 를 대변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이 세대를 어떤 담론들 속에서, 어떤 담론들과 연결지어 말해야 할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세대, 권위적인 것에 대한 민감한 거부감을 가진 세대, 합당한 절차와 공정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대,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쓰기가 아주 조심스럽다······ 아마도 적절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 가장 세속적인 (혹은 속물적인) 세대, 그

어떤 방식의 비평, 또는 비평이라는 처방전

비평은 일종의 처방전이다. 비평은 과거의 텍스트를 오늘날의 언어로 진단함과 동시에 오늘날의 세태를 과거의 텍스트에 비추어 진단한다. 좋은 비평은 우리가 지금 어떤 문제 속에 있는지를 밝힌다. 더 좋은 비평은 이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는지 논구한다. 비평은 텍스트로부터 출발해 그 텍스트에 주석 작업을 적용하고, 우리 문제의 해소를 향해 나아간다.

함정인 것 같긴 하지만

# 가끔 함정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굳이 이유를 찾는 일’ 혹은 ‘이름짓는 일’이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고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이러해야만 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일, 확실히 정의내리려는 일은 도움을 준다. 함부로 무언가를 확정짓거나 하나의 답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판단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려고 이유를 찾는 것 아니냐고? 글쎄. 애초에 함정이었다니까. 물음은 도움을 주지만 세상은 물음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평>을 시작하고 나서 이미 두어 번은 인용한 것 같지만, 그래도

저항의 조건: “족쇄”는 언제나 저항의 대상인가?

이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철학’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오히려 이하의 논증은 포스트모던을 위한 변호에 가깝다. 비판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던 철학이 아닌 포스트모던을 오해하는 독법이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비판되는 것은 포스트모던 철학을 오독한 단순한 선동 행위이다. 저항 논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저 제도는 단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관습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저 제도에 저항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들을 묶어 편의상 ‘저항 논제’라고 부르자. 그런데 저항 논제의 전건은 “모든 제도는 발생사적으로 사회문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