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로서의 글쓰기. 단상들

여전히 ‘문학의 소용’이랄 게 있다면, […]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하려는 의무에 충실하려는 지난한 노력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여기에서, 문학은, 글쓰기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사유하고 있는가? 여전히 남아있는 폭력들에 끈질지게 반항하는 동시에, 하루 어치의 싸움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우리보다 앞서 폭력들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애도를 해야하는 게 아닐까?

함정인 것 같긴 하지만

# 가끔 함정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굳이 이유를 찾는 일’ 혹은 ‘이름짓는 일’이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고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이러해야만 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일, 확실히 정의내리려는 일은 도움을 준다. 함부로 무언가를 확정짓거나 하나의 답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판단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려고 이유를 찾는 것 아니냐고? 글쎄. 애초에 함정이었다니까. 물음은 도움을 주지만 세상은 물음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평>을 시작하고 나서 이미 두어 번은 인용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인외人外의 장수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드는 생각인데, 이 글은 정말 많은 반박 이후에야 완성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 요새 ‘전쟁물’이 재밌다. 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사 같은 이야기. 수십만의 병사가 평야와 산지에서 부딪히고 그들을 지휘하는 장수와 책사가 있다. 살아 움직이는 수십만의 병사들을 다룬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승리를 위하여 혹은 피해의 최소화를 위하여 밤낮 머리를 싸매야 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그런 중압과 책임감 속에서 탄생한 ‘완전무결한 전략’을 감상하는 것이 내게는 즐겁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일이

실패를 위하여

● 과연 포르노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모든 준비 과정과 반복되는 움직임은 간접으로 경험하기에는 너무 지루하다. 포르노 소비의 중요한 목적 하나가 있다면 자극적으로 구성된 절정에 도달하는 일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편안하게, 오르가즘 혹은 사출의 순간으로. 적나라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포르노에 관한 긴 글을 쓸 만큼 다양한 경험이 필자에게는 없다) 의미화와 명명, 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것은 이런 뜻이다.’ ‘이것은 이러저러한 다른 것을 보여준다.’ 혹은 ‘여기에 이러한 이름을 붙이자.’

말더듬이의 땅

우스갯소리로 시작해야겠다. “셋이라는 건, 결국 모두가 혼자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 같아. … 셋이 되어 나머지 둘이 이미 잠들어 있는 걸 보면서 정말로, 정말로 혼자라는 걸 깨달아야 사람은 완전해져.” —윤이형, “셋을 위한 왈츠” 둘에게 선수를 뺏겨 외롭다는 이야기다. ‘여정’의 글 하나로 충분한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단현’이 균형을 깨버렸다. 길고 멋진 말이 다 나와버려 걱정이다. 지적 허영을 먹고 사는 사람 중 하나라 이런 모양새는 좀 아프다.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인 탓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능선에 관한 이야기다. 어릴 적의 나는 단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숨을 쉬고 많은 다짐을 해야 했다. 말을 한다는 건 내게 당연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사람이

텍스트, 짜깁기, 혹은 다른 방식의 글쓰기

무엇이 글을 쓰게 하는 것일까?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내쳐도 글쓰기만은 버릴 수 없다면, 결국 다시 쓴다는 것으로 돌아온다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충동/강제하는 것일까? 글쓰기는 무엇을 향해 있을까? 아니, 애초에 쓴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나의 완결된 문학작품, “순수한 문학”, “완성도 높은, 잘 짜여진 소설”이라는 찬사가 우리의 시대에서 과연 소용있는 것일까? 완전히 다른 방식의 글쓰기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아주 오랜만에 다시 시작할 마음을 먹었다. 지금, 여기에서, 다시 글쓰기를 가동하기. 그 다짐을 하면서 글쓰기가 처음으로

우리는 글을 쓰자고 했다

어떤 것을 진지하게 고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아직 이룬 것도 하나 없는 이들에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확신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찰들로 다시 돌아온다. 왜 나는 이것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저 내가 그것들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 ‘왜’의 질문이 크게 의미가 없다. 그저 나는 어떤 것을 생각한다. 글을 쓴다는 어려운 행위에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나는 배움의 초입에 있다. 어떤 것을 쓰기 위해서는 그것에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