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이 골치덩어리

문장 P=’동문 몇이 격월로 신촌 토즈에서 만나는 이 모임은 회원이 돌아가며 책을 선정한다.’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나의 이해를 특정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특정하는 상위 이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각 해례를 인정하는 서로 다른 상위이론의 갈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다시금 그 상위이론에 대한 상위이론적 검토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어떤 표현에는 비평이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신의 언어’를 통해 의미하려는 바로 그것을 두고 신적 예술의 도구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까. 가장 궁극적인 도구! 세계의 인과율이나 조화로움, 혼돈으로부터의 해방을 초래한 바로 그 무엇. 정말로 “신”이라는 실체가 있냐는 물음과는 별개로, 이 “신의 언어”라는 것은 그러한 궁극적 도구이다. 이 도구를 사용해서 어떤 도덕적 교훈이나 미적 감상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신적 예술의 제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어떻게 우리가 할 수 있냐고? 모르겠다. 애초에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일지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부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참 어렵지 않냐는 이야기도 같이 하게 됐다. 제대로 부수는 일부터가 어렵고 뭘 만들어내는 일은 더 어렵다. 멀기만 하다. *    비판은 어떤 것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비판이 그 대상으로 삼는 어떤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 비판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탈피하는 것 ─ 그것을

크레도: 신학함을 위한 나의 신조들

앞선 글에서 나는 윤리적 행동을 위해 요구되는 존재론적 태도가 있다는 것, 그를 비롯해 모든 우리의 삶 중에서 특정한 형이상학적 물음이 발견된다는 것,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리라는 것, 그리고 그 역할을 비평 또한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것을 차례대로 말해 왔다. 이제는 신학에 대해 마찬가지 신념을 소개할 차례이다. 이하는 신학이 무엇이냐는 나의 이해와, 그리고 그 신학에 있어 예상되는 문제들이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

(예고 : 이 글은 소설에 가깝다) § “파상에게 ‘여정적 지식’은 많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운을 떼자. ‘지평’에 연재되어 온 일련의 글들을 관심 있게 읽어 온 독자라면, 아마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다. 지금껏 여정은 그의 관심사―언어, 지시, 자연종, 이름, 인식, 함수, 양화, … 넓게 ‘분석철학’으로 통용되는 영역―를 가감없이 드러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저 문장을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는, 지금껏 여정이 보여준 어휘들이 어떤 영역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것인지에 관한 사전적 지식이 필요 없다. 그러니까 ‘분석철학’이 무엇인지, 저 수많은

'알레프'는 없다

  층계의  아래쪽 오른편에서 나는 거의 견디기 어려운 광채를 지닌 무지갯빛의 작은 구체 하나를 보았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빙빙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그런 움직임이 그 구체 속에 담긴 현기증 날 정도의 광경들 때문에 생겨난 환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예를 들자면 거울의 유리 표면)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 사물을 분명하게

인외人外의 장수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드는 생각인데, 이 글은 정말 많은 반박 이후에야 완성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 요새 ‘전쟁물’이 재밌다. 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사 같은 이야기. 수십만의 병사가 평야와 산지에서 부딪히고 그들을 지휘하는 장수와 책사가 있다. 살아 움직이는 수십만의 병사들을 다룬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승리를 위하여 혹은 피해의 최소화를 위하여 밤낮 머리를 싸매야 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그런 중압과 책임감 속에서 탄생한 ‘완전무결한 전략’을 감상하는 것이 내게는 즐겁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일이

거듭 실패하는 일

파상은 실패를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동의한다. 우리의 말은 언제나 실패를 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듯, 그 실패를 거듭하는 애씀이 실패하는 우리들의 참 실체일지도 모르겠다. 라이문도 파니카는 그의 책 <종교간의 대화>에서 각자의 종교를 빛에 비유한다. 초록빛, 보랏빛, 빨간빛은 그 스스로는 백색광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빛 아래에 있는 우리는 우리가 처한 바로 그 빛을 중심으로만 세상을 본다. 신성과 관계하는 모습 일반이 그렇다. 개별화된 것으로만 대면할 수 있지만 결코 그것의 보편 자체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실패를 위하여

● 과연 포르노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모든 준비 과정과 반복되는 움직임은 간접으로 경험하기에는 너무 지루하다. 포르노 소비의 중요한 목적 하나가 있다면 자극적으로 구성된 절정에 도달하는 일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편안하게, 오르가즘 혹은 사출의 순간으로. 적나라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포르노에 관한 긴 글을 쓸 만큼 다양한 경험이 필자에게는 없다) 의미화와 명명, 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것은 이런 뜻이다.’ ‘이것은 이러저러한 다른 것을 보여준다.’ 혹은 ‘여기에 이러한 이름을 붙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