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본질과 대안적 비평: 밤비의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에 대한 제언

본고는 밤비의 논고에 대한 비평이다. 나는 먼저 앞선 나의 글들에서도 제안된 바 있는, 비평에 관한 나의 이해를 제공한 뒤, 나의 비평 개념으로부터 밤비의 비평에 관한 관점을 고찰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른바 ‘에세이영화’라는 것이 그 자체로 대안적 비평의 중핵이 된다기보다는, 여전히 ‘자전적 서사’가 그 중심에 있으며, 밤비의 비평론의 방향이 이 중심을 향해야 함을 밝힐 것이다.

열정, 세계, 삶

‘열정에 대한 열정’을 미심쩍게 보려는 우리의 경향성은 잘못된 이분법의 산물에 불과하다. 열정에 대한 열정이 구축한 ‘열정의 의의’는, 열정에로의 길을 닦는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실재에의 열정과 조우한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그림을 수용한 채 우리가 하고 있는, 또한 할 수 있는 작업들을 그대로 해 나갈 수 있다.

“어떤 표현에는 비평이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신의 언어’를 통해 의미하려는 바로 그것을 두고 신적 예술의 도구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일까. 가장 궁극적인 도구! 세계의 인과율이나 조화로움, 혼돈으로부터의 해방을 초래한 바로 그 무엇. 정말로 “신”이라는 실체가 있냐는 물음과는 별개로, 이 “신의 언어”라는 것은 그러한 궁극적 도구이다. 이 도구를 사용해서 어떤 도덕적 교훈이나 미적 감상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신적 예술의 제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어떻게 우리가 할 수 있냐고? 모르겠다. 애초에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일지도.

생존을 넘어서 살아있기, 애도하기/기억하기

그러므로 생존 개념이 제기하는,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타자들의 죽음 이후에, 여전히 남아있고 작동하는 폭력들의 와중에 ‘나’는 어찌어찌하여 살아남았다는 것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인가? 혹은, 이렇게 연명한다는 것, 숨이 붙어 있기만을 지속한다는 것, 살아있음의 상태를 연장하는 것, 조금 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인가?

허구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실천하고자 하는 이는 비평을 넘어 자기표현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또, 노골적으로 실천을 조장하지 않는 비평의 가치를 폄훼하지 않을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어떤 사실에 관한 태도에만 머무를 때엔 새로운 사실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에게 새로운 사실을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부조리하다. 비평과 파레시아는 이렇게 분기를 이룬다.

새벽 단상; 마광수와 타로

얼마 전 타계한 마광수 교수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그의 <연극이란 무엇인가> 수업을 수강한 것은, 청강 없는, 수강을 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당신께서 건강을 문제로 수업을 열지 않으셨으니 그의 수업을 들은 마지막 세대가 나의 동기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랑할 일인지 부끄러운 일인지 나는 A+학점을 받았었지요. 그 수업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과제는 공식적으로는 ‘로맨스 소설 쓰기’로 일컬어졌던 사실상 “야설 쓰기” 과제였습니다. (전자가 데 유레라면 후자가 데 팍토겠지요.) A+를 받게 한 나의 과제는, 당신께서

하나마나 한 이야기

  1.    나는 지난 글 ‘함정인 것 같긴 하지만‘에서 이렇게 글을 열었다.       비평의 문제들 ─ “문학비평을 왜 하는가?” 혹은 “문학비평의 책무/목적은 (있다면) 무엇인가?” “문학비평에 ‘좋음’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이렇게 글을 닫았다.       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답변은 비평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확정적인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질문을 확정할 수 있다. 생각건대 다음 물음, 더 본질적인 물음은 문학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좋은 문학비평은 무엇인가’를 제대로 묻기 위하여 ‘문학은

비평적 진보, 또는 비평적 진리

비평에는 진보와 진리가 모두 실재하며, 우리는 진보나 진리를 현대적 방식으로 재이해함에 따라 어떤 비평을 다른 비평보다 진보되었다고 평가할 기반을 얻는다. 한편 우리는 실천적 이유에서 어떤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신화적 상상력인데, 그것의 어떤 특성은 기묘한 인식론적 문제를 일으킨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부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참 어렵지 않냐는 이야기도 같이 하게 됐다. 제대로 부수는 일부터가 어렵고 뭘 만들어내는 일은 더 어렵다. 멀기만 하다. *    비판은 어떤 것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비판이 그 대상으로 삼는 어떤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 비판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탈피하는 것 ─ 그것을

크레도: 신학함을 위한 나의 신조들

앞선 글에서 나는 윤리적 행동을 위해 요구되는 존재론적 태도가 있다는 것, 그를 비롯해 모든 우리의 삶 중에서 특정한 형이상학적 물음이 발견된다는 것,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리라는 것, 그리고 그 역할을 비평 또한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것을 차례대로 말해 왔다. 이제는 신학에 대해 마찬가지 신념을 소개할 차례이다. 이하는 신학이 무엇이냐는 나의 이해와, 그리고 그 신학에 있어 예상되는 문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