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기억을 넘어서, 쓰기

숨이 붙어있듯이 기억이 우리에게 붙어있지만,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살아가지만/기억하지만, 그 달라붙은 기억이 각질처럼 쉽게 바스라져 없어지지 않기 하기 위해, 다시 기억하는 노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기에서 단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간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기를, 그런 의미에서, 생생하게 살아있기를 꾀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을 전달한다는 것

행위의 공유가 기억의 검증 기준이 된다면, 기억의 전달은 그러한 행위 경향성의 전달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모종의 방식으로 나의 기억을 표현했을 때, 내가 행동하는 바로 그 양식이 나의 표현으로 인해 상대에게서 구현된다면, 나의 기억은 그 표현에 따라 전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주관적 표상이 불가피하다. 어떤 사태에의 의미 있는 표상은 필히 기술구로 분해 가능한 내포를 지닌 존재자들에 관한 명제에의 태도인데, 그렇다면 이는 주관적 표상이 된다. 그 기술구를 구성하는 보편자들이 추상적 개별자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내재적으로 모호함 또는 모순을 지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대상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오는 주관적 표상이 불가능하다.

기억하기로서의 글쓰기. 단상들

여전히 ‘문학의 소용’이랄 게 있다면, […]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하려는 의무에 충실하려는 지난한 노력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여기에서, 문학은, 글쓰기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사유하고 있는가? 여전히 남아있는 폭력들에 끈질지게 반항하는 동시에, 하루 어치의 싸움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우리보다 앞서 폭력들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애도를 해야하는 게 아닐까?

“그런 실재가 있기나 합니까?”

자, 이제 우리는 충분히 말했다. 그것의 이름을 무엇으로 두든, 실재 대 언어, 말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저항하는 몸과 구성되는 몸, 세계 대 분석, 실천 대 준칙, 사건 대 사실, 알레프 대 푸네스 … 이와 같은 구도와 관련된 우리의 희망을 줄곧 논해 왔다. 이제는 눈을 돌릴 때이다. 이하의 에세이는 우리, 그리고 우리 각자의 태도를 묻는다. 하나. 우리는 이른바 자연종Natural Kinds에 대한 직관을 갖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굳이 자연종이 아니더라도 어떤 종류의 속성들에 대해서는 그저

'알레프'는 없다

  층계의  아래쪽 오른편에서 나는 거의 견디기 어려운 광채를 지닌 무지갯빛의 작은 구체 하나를 보았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빙빙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그런 움직임이 그 구체 속에 담긴 현기증 날 정도의 광경들 때문에 생겨난 환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예를 들자면 거울의 유리 표면)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 사물을 분명하게

기억하기-사건에까지 도달하기-자기가 되기

1.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라는 물음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겹쳐서 나타난다. 자신과 타인의 기억을 불러내고 그것들을 서로 맞춰보고 증거를 찾아낸다. 내가 스스로 ‘나’라는 말로 불렀던 것이 텅 비어있었다는 것, 이미 오래전부터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그것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은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에 도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소포클레스의 이 위대한 비극 작품에서는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서술 — ‘한 남자가 자신의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하여 자식을 보았다’ — 이 제시되어있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