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후회, 그리고 희망

왜 이른바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가? 그의 탄생 자체가 우리의 현재적 행복을 확언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의 가르침이 위대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이루었다는 위대함이 지금 우리의 곁에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탄생이 열어준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과 그리움 속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탄생이 정말로 일어났었음을 믿으며, 그가 열어준 기회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리고 다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 속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woman on a boat holding gas lantern

진리란 단지 우리 안에 있는가?

이 배는 단지 허상인가? 또는 이 배는 단지 역사적인 어떤 것만을 제공하는가? 즉, 우리가 진리를 판별하는 이 체계는 허상에 불과하며,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틀에 불과한가? 이는 그런데 ‘인식적 규범성’이라는 생각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괴상하다. 어차피 우리가 그 자체로 참인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이 배를 뭐하러 타고 있으며 그 배를 수리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뭔가 하나의 배가 다른 배보다 더 탐구를 위해 쓸모있기에 이 배를 타고, 또 이 배보다 더 쓸모있는 배를 알게 되면 그 배를 타는 것 아닌가?

맥도웰과 브랜덤의 개인주의 논쟁

맥도웰과 브랜덤은 경험주의 논제에서 경험적 지식의 획득을 성공적으로 설명하려는,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두 철학자가 각자의 인식론을 전개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 차이는 관찰 보고observational report를 정당화하는 우선적인 권리가 언어 공동체에 있느냐, 혹은 주체 개인에게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단순히 개념의 명료화와 같은 기본적인 작업으로는 판가름날 수 없는 근본적인 철학적 견해의 차이다.

계시

토대주의자들의 딜레마란 늘상 이런 식이다.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거나 자기정당화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정당화하는 토대는 우리에게 큰 지식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텐데, 정당화될 수 없는 토대를 신뢰한다는 것은 오로지 규약 또는 결단의 문제인 것 같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

본고는 칸트가 〈비판〉에서 다루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정의와 그 가능성을 간략하게 조명하고, 칸트가 선험적 종합 판단의 기치 하에 내세우는 수학과 철학의 이미지가 어떤 한계를 지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필자가 보기에 칸트로부터 전체론적 (혹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콰인적인) 경험론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철학적 유행이 아니라, 칸트적 경험론이 지니는 명확한 한계들로부터 따라 나온 필연적인 이행에 다름 아니다.

선험적 종합이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 (하)

이제 문제를 철학의 경우로 축소해 보자. 논리실증주의는 쇠락하는 듯 보였지만, 세 축으로 매인 이분법은 여전히 건재했다. 상술한 내용까지만을 고려한다면 왜 이 이분법이 유지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콰인은 의미론적 전체론에 근거해 분석성과 종합성이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다고 했고, 굿맨은 “이상한 속성”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미래에 과거 경험을 투사하기 때문에만 정당화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이분법을 유지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조금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선험적 종합이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 (상)

어떤 학제에서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학제에서의 모든 주장이 자명하게 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 학제에서 적어도 어떤 주장들은 자명하지 않게 참이 된다는 것은, 또한, 그러한 주장들은 우리의 지식의 폭을 넓혀준다는 것을 뜻한다. 즉, 단지 우리의 말장난이나 사전 편찬 작업 등으로는 할 수 없는 류의 작업이라는 소리이다. 이러한 작업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을 함과 동시에, 우리는 “선험적 종합”의 가능성의 문제에로 돌입한다.

“세계에 대한about world” 기술 은 어떻게 가능한가?

감각은 세계와 우리의 유일한 접점이다. 이는 칸트가 비판 철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준 바 그대로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와 만나기 위해서는, 감각 경험이 우리와 세계를 이어주는 개념적 심급이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는 그가 철학적 정언으로 채택한 초월적 방법론의 한계 때문에 감각 소여를 확실히 개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따라서 맥도웰은 감각을 개념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선험성을 재정립하는 것이 Mind and World의 작업이며, 이를통해 『순수이성비판』에서 의도된 비판 철학의 이상 또한 달성될 것이라고 자부한다.

참과 앎 사이에 있는 것

참과 앎의 분리로부터 출발해 퍼트남, 데이빗슨의 행적을 따라오며 우리는 소통 없는 개인들, 그리고 의식과 세계의 분리를 전제한 채 진리나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철학적 교훈을 발견한다. 그런 무용한 전제들을 버린 뒤 나오는 상식적 세계관에서 철학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두 명의 철학자가 보여주었던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