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취약함, 생존의 강조: 유동화된 상상의 가능성

이 글은 이번 사태에, 우리에게 새로운 일상을 가져다 줄 도약의 여지가 있다는 걸 얘기하려 한다. 숫자로 호명해서는 안 되는 지점을, 재난을 맞이한 상황에서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지평을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역사의 분기점은 현 상황이 영구히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데에 대한 강력한 자각이 집단적 경험으로 이루어질 때 만들어진다. 현재 상황 중에서 우선시하는 것들이, 논의되는 것들이 이 다음 살아남은 자들이 살 세상을 구성할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선진국 되기

담론 하의 개인은 새롭게 빚어진다. ‘경제적 성장을 이룩해 선진국 되기’는 마치 노래방의 우선 예약 시스템처럼 개인의 우선순위 앞자리를 차지한다. 경제적 성장은 국가적 목표를 넘어 개인의 목표가 되었으며, 우선순위를 내면화한 개인은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하는 개인으로 작동한다. ‘빈곤하고, 나약하고, 게으른’ 한국. 단현의 말을 빌리자면 비상사태가 선포한 ‘조국 근대화’의 사명은 ‘예외상태의 일상화’이자, 체제를 옹호하는 경제발전과 연관없는 모든 가치의 항구적 유예 사태다.

한국 사회에서 ‘예외상태의 일상화 / 일상의 예외상태화’의 계보학

일상이 비상이 된 삶은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 말하고, 그 말은 비상이 된 일상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계속해서 삶이란 것이 살아진다/사라진다. 우리가 비상화, 예외상태화해버린 일상의 어떤 영역들을 재건하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재난의 시기에서 예외상태가 일상화된 나머지 결국 예외성이 잘게 흩어져 잔존한 채 공동의 무의식에 흡수되어 망각되어버리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 2020년의 봄에, 내가 기도하는 것은 다만 이런 것들이다.

삶에 관해서 묻기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심코 (우리를 살게 하는) ‘구조’에 연루된다는, 그래서 그 누구도 마냥 ‘결백’하지는 않다는 감각. 그 감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삶에 관해서 되묻는 일이 어떻게 윤리 혹은 정치에 관해 말하는 일일 수 있는지, 혹은 (결국 같은 말이지만) 윤리 혹은 정치에 관해 말하는 일이 어떻게 삶에 관해서 되묻는 일일 수 있는지에 관해 쓰려 합니다.

식민과 난민 사이 — 포섭과 배제의 운동을 통한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억압과 통치

산업화된 이주결혼은 자본의 움직임을 통해 여성을 움직이고, 이들을 성적 대상이자 노동력으로 개발한다. 그리고 민족국가의 작동은 결혼이주여성을 권리 행사의 주체의 자격에서, 독자적으로 체류하고 거주할 수 있는 지위에서 배제한다. 이와 같이 국가 내부에 국가 없음을 만드는 (준)난민화는 이들의 위치를 더욱 취약하게 하고, 이들이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

현실적 생존을 숙고하기, 연대하기

결국 잘 살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기왕이면 행동의 이유는 윤리적이면 좋겠지만, 행동의 근거가 윤리적이기만 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적다. 자본이 윤리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시대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면, 적어도 스스로를 구원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필요하지 않겠나. 삶의 ‘자기만의 방’이 위치할 수 있는 위치가 바로 이곳이다.

생존을 넘어서 살아있기, 애도하기/기억하기

그러므로 생존 개념이 제기하는,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타자들의 죽음 이후에, 여전히 남아있고 작동하는 폭력들의 와중에 ‘나’는 어찌어찌하여 살아남았다는 것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인가? 혹은, 이렇게 연명한다는 것, 숨이 붙어 있기만을 지속한다는 것, 살아있음의 상태를 연장하는 것, 조금 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과연 살아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