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예술은 다른 예술 장르들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영화는 한 눈에 보아도 다양한 예술들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움직이는 사진이거나 그림이며, 연극의 영상화인 듯하다. 또한 서사를 손에 쥐어 문학과 관계하고, 음악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는 무용 혹은 조각과도 연관성이 보인다. 건축과 미장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더 깊게 이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관계는 단순히 영화가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다’에 한정되지 않는다.

비평의 본질과 대안적 비평: 밤비의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에 대한 제언

본고는 밤비의 논고에 대한 비평이다. 나는 먼저 앞선 나의 글들에서도 제안된 바 있는, 비평에 관한 나의 이해를 제공한 뒤, 나의 비평 개념으로부터 밤비의 비평에 관한 관점을 고찰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른바 ‘에세이영화’라는 것이 그 자체로 대안적 비평의 중핵이 된다기보다는, 여전히 ‘자전적 서사’가 그 중심에 있으며, 밤비의 비평론의 방향이 이 중심을 향해야 함을 밝힐 것이다.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

비평은 원래부터 ‘작품’과 비평가 ‘한 개인’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쨌거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이뤄지는 ‘사적인 만남’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특수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영화는 언제나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개별적인 인물과 관계한다). 비평이 만약 작품에만 종속적이기를 멈추고 비평가에게도 권리를 내어준다면, 작품과 비평가는 비평에서 만나 새로운 창작으로 나아갈 것이다. 비평가가 작품으로부터 파생된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게 흘려보낸다. 이것은 현대 영화가 나아가고 있는 진행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사막을 걷는 자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만자』와 서사의 치료

장례식 후 당신의 서랍에서 가져온 체크무늬 손수건을 오랜만에 꺼냈다. 이제 이 손수건에 당신의 살냄새는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냄새를 기억한다. 아카시아 껌과 도마도 건너 당신의 미소도 기억한다. 당신이 외롭지 않도록 당신과 더 많은 대화를 할걸.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은 누군가와 계속해서 나눌 것이라고 미리 말할걸. 하지만 할아버지, 당신이 그걸 지금은 알 수 없을 테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나의 숲에 있단 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기억할 것이다. 당신과 내가 접힌 기억들을 치료할 것이다.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연극 : 배우 중심의 다큐멘터리 연극 제언

직접성과 현장성을 소유한 것, 그리고 직접성과 현장성이 소유한 것은 배우의 몸이다. 재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배우 자신의 이야기를 배우의 몸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이야기하기 서사는 배우로 하여금 오브제와 설치물 등으로 물체성이 강조된 그들의 몸을 통해, 그리고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희곡에 나타나는 해체된 언어의 발화행위보다 더욱 독립되고 확장된 창작주체로서 기능하게 한다.

Pathos in Faces

— John Cassavetes. (1968). 〈Faces〉.
감독 존 카사베츠John Cassavetes는 어떻게 클로즈업이 영화를 예술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배우의) 얼굴들과 결합하여 어떤 힘을 내는지를, 그리고 사건 중심의 영화, 논리정연한 영화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밝혀낸다. 영화는 더욱 현실적이어야 하고, 더욱 인간적이어야 한다.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는 마음

정말 잘 모르겠다. 시간을 사이에 두고 나란한 이야기들을 어떤 관계로 받아들여야 할지. 엉망진창으로나마 당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갔던 것 혹은 과거의 기억을 진심으로 마주하는 것이 뭐라도 나아지게 할 거라는 희망이 될 수 있을지. 그런 위안이란 무력한 게 아닐지. 어쩌다 고발자가 된, 과거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아도 불타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닌 듯한 한 사람이,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227쪽)다며 돌길을 걷는 마음에 대해서나 조금 알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분위기와 껍데기의 오프비트적 정동에 대하여

따라서 장류진의 「펀펀 페스티벌」은 우리에게 어떤 분위기 속을, 혹은 어떤 껍데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그 사이에서 나의 “쪼”를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역동적인 나의 껍데기이자 분위기이며, 정동의 시발점임을 제시한다. 애초에 마술이란 마술사가 아니라 관객 된 내가 카드를 뽑아야 시작하는 것이고, 카드를 뒤집어야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하나의 분리된 정동은 없겠지만, 동시에 내가 주변의 정동적 힘에 영향만 받는다고 상심해서도 안될 터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밟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린다

─Charlie Kaufman. 2007. 〈Synecdoche, New York〉
케이든이 만드는 세계는 하나의 ‘스케넥터디, 뉴욕’ 그 자체다. 한 창고에 ‘리얼리즘’이라는 도발적인 개념 아래 모방 도시 ‘시네도키, 뉴욕’을 건설한다. 자신의 세계를 통째로 ‘대체’해버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케이든은 연출가로서, 그 세계의 신으로서 군림한다. 실제 세계를 표방하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연극이며, 배우들은 연기를 하며, 케이든은 연기할 배우를 고르고, 그들에게 매일 역할이 담긴 수행지를 전달한다. 이 속에서 진정으로 대체불가능한 타인을 위한 공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