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세계, 삶

‘열정에 대한 열정’을 미심쩍게 보려는 우리의 경향성은 잘못된 이분법의 산물에 불과하다. 열정에 대한 열정이 구축한 ‘열정의 의의’는, 열정에로의 길을 닦는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실재에의 열정과 조우한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그림을 수용한 채 우리가 하고 있는, 또한 할 수 있는 작업들을 그대로 해 나갈 수 있다.

규범성 없는 당위성의 가능성

말하자면 우리는 당위성을 다시 사유함으로써, 당위성에서 규범성을 걷어 내어 ‘규범성 없는 당위성’을 발명함으로써 행위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면서도 폭력을 배제할 근거를 확보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규범성이라는 가장 오래된 습속ethos으로부터 사유가 자유로워짐으로써(그것을 다만 실용적인 규칙과 습관으로만 유지함으로써) 정치성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함정 맞다

만약 내가 이 헛짓거리를 계속한다면, 다음 물음은 아마, 이 답도 없이 구성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으로 보이는 체계를 한순간만이라도 그럴듯하게 고정시킬 수 있을까, 비슷한 물음이 될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게 돼야 내 비평의 틀이 생길 거 같은데, 만약 정말로 끝까지 헛짓거리라면, 빨리 다른 우회로를 발견하거나, 이 작업이 애초에 필요 없는 일이라는 확신을 찾았으면 좋겠다.

합리적 인간

나는 차라리 메타이론적 층위에서, 합리적 선택에 관한 탐구들이 미래 선택에 대해 갖는 규범성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어떤지 제안한다. 즉, 경제학은 경제 행위에 쓸모 없다. 윤리학은 윤리적 삶에 쓸모 없다. 문법학은 올바른 언어 사용에 쓸모 없다. 미학은 아름다움의 추구에 쓸모 없다. 다만 이러한 탐구 활동은 우리가 어떤 규범을 갖고 있는지를 살피는 이정표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합리성 탐구 활동에 대한 기대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실재의 공허함

어떻게든 실재를 공허하지 않게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앞 문단에서 예를 들었던 방식들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론적 양화를 선호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색이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잔인하다. 여러 방식의 주장 가능성은 열어두되, 그 중 하나의 방식만을 채택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믿음의 문제

그러니까 김연화에게 자기 사랑의 진실됨을 증명하는 일과 데드마스크의 진위를 증명하는 일은 비슷해보였을 법하다. 그래서 데드마스크가 진짜라는 정황에만 집중한 거다. 데드마스크가 ‘진짜 진짜냐’,라는 문제랑은 완전히 다른 층위다. 믿고 싶어서 믿기 때문에 진짜다. 다시 말하건대 내게는 세상의 너무 많은 문제들이 이 비슷해보인다.

상대주의의 폭력 혹은 단일한 실재에 대한 긍정

이러한 국면에서 방관 혹은 기계적인 중립은 사실상의 상대주의다. 그리고,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확정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는 단지 합당하지 않은 인식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리의 차원에서 관용이 아닌 폭력이다. 일어났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의 세계에, 오직 하나인 실재에 새겨져 있으며 따라서 결코 부정될 수 없다.

출발선 위에서

이번달 우리가 나눈 대화는 각자의 토대에 관한 것이었다. 좀 더 멋지게 말하자면, 각자가 선 출발점이 어느 트랙 위의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이번 대화의 의의가 있었다. 나는 재미 있어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 있는 재미 없는 주제를 꺼내는 것을 나의 경기로 보았다. 단현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로부터 건설적 확장을 하는 일을 그의 경기로 삼았다. 파상은 비평 대상 그 자체만을 갖고 비평 밖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그의 경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평뿐 아니라, 우리가 가는 방향 자체도 다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