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예술은 다른 예술 장르들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영화는 한 눈에 보아도 다양한 예술들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움직이는 사진이거나 그림이며, 연극의 영상화인 듯하다. 또한 서사를 손에 쥐어 문학과 관계하고, 음악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는 무용 혹은 조각과도 연관성이 보인다. 건축과 미장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더 깊게 이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관계는 단순히 영화가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다’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

비평은 원래부터 ‘작품’과 비평가 ‘한 개인’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쨌거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이뤄지는 ‘사적인 만남’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특수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영화는 언제나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개별적인 인물과 관계한다). 비평이 만약 작품에만 종속적이기를 멈추고 비평가에게도 권리를 내어준다면, 작품과 비평가는 비평에서 만나 새로운 창작으로 나아갈 것이다. 비평가가 작품으로부터 파생된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게 흘려보낸다. 이것은 현대 영화가 나아가고 있는 진행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연극 : 배우 중심의 다큐멘터리 연극 제언

직접성과 현장성을 소유한 것, 그리고 직접성과 현장성이 소유한 것은 배우의 몸이다. 재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배우 자신의 이야기를 배우의 몸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이야기하기 서사는 배우로 하여금 오브제와 설치물 등으로 물체성이 강조된 그들의 몸을 통해, 그리고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희곡에 나타나는 해체된 언어의 발화행위보다 더욱 독립되고 확장된 창작주체로서 기능하게 한다.

Pathos in Faces

— John Cassavetes. (1968). 〈Faces〉.
감독 존 카사베츠John Cassavetes는 어떻게 클로즈업이 영화를 예술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배우의) 얼굴들과 결합하여 어떤 힘을 내는지를, 그리고 사건 중심의 영화, 논리정연한 영화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밝혀낸다. 영화는 더욱 현실적이어야 하고, 더욱 인간적이어야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밟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린다

─Charlie Kaufman. 2007. 〈Synecdoche, New York〉
케이든이 만드는 세계는 하나의 ‘스케넥터디, 뉴욕’ 그 자체다. 한 창고에 ‘리얼리즘’이라는 도발적인 개념 아래 모방 도시 ‘시네도키, 뉴욕’을 건설한다. 자신의 세계를 통째로 ‘대체’해버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케이든은 연출가로서, 그 세계의 신으로서 군림한다. 실제 세계를 표방하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연극이며, 배우들은 연기를 하며, 케이든은 연기할 배우를 고르고, 그들에게 매일 역할이 담긴 수행지를 전달한다. 이 속에서 진정으로 대체불가능한 타인을 위한 공간은 없다.

술과 담배, 사탕과 싸구려 찻잎

─Jia Zhang Ke. 2006. 〈Still Life〉
폐건물들은 여전히 철거되고 있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 사이로 누군가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 외줄타기를 예술이라 한다면, 그리고 영화를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이 예술로 승화된다. 그들의 헐어버린 공간은 예술적 공간이 되며, 그들의 ‘위험을 버티기’ ,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는 예술적 행위가 된다.

신神마저 시선을 거둘 때 사랑은 완성된다

─Pawel Pawlikowski. 2019. 〈Cold War〉
유독 〈콜드 워〉에서 카메라는 ‘운명’이며, ‘시대’이며, 인간들을 미쟝센으로 배치하며 내려다보는 ‘신’이다. 운명은 응시하는 시선이다. 신(神)-카메라의 내려다봄이란 행위는 이 영화 속 대부분의 쇼트에서 발생한다. 는 대단히 독특한 앵글과 설정으로 개인을 왜소하게 만든다.

녹색은 녹슬어도 녹빛인데 어쩌란 말이냐

─고레에다 히로카즈. 1995. 〈환상의 빛〉
바다 사이에서 그녀가 드디어 불을 피웠다. 온 몸으로 그를 애도한다. 후경에는 파도가, 전경에는 잔잔한 물에 비친 그녀가 있다. 그녀가 남편에게 묻는다. 그는 도대체 왜 죽었을까요. 나는 이해가 안 돼요. 남편이 말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유혹하는 빛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시간을 닮은 카메라

─알폰소 쿠아론. 2018. 〈로마〉
그렇다고 하여 영화가 끝까지 이런 비참함만을 이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분명 클레오는 치유 받고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는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것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삶의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 연대하는 것. 나도 움직이는 것. 나도 말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그저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