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맞다

만약 내가 이 헛짓거리를 계속한다면, 다음 물음은 아마, 이 답도 없이 구성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으로 보이는 체계를 한순간만이라도 그럴듯하게 고정시킬 수 있을까, 비슷한 물음이 될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게 돼야 내 비평의 틀이 생길 거 같은데, 만약 정말로 끝까지 헛짓거리라면, 빨리 다른 우회로를 발견하거나, 이 작업이 애초에 필요 없는 일이라는 확신을 찾았으면 좋겠다.

믿음의 문제

그러니까 김연화에게 자기 사랑의 진실됨을 증명하는 일과 데드마스크의 진위를 증명하는 일은 비슷해보였을 법하다. 그래서 데드마스크가 진짜라는 정황에만 집중한 거다. 데드마스크가 ‘진짜 진짜냐’,라는 문제랑은 완전히 다른 층위다. 믿고 싶어서 믿기 때문에 진짜다. 다시 말하건대 내게는 세상의 너무 많은 문제들이 이 비슷해보인다.

중요한 것은 말입니다

적당한 말은 이제는 정말이지 그만하고 싶다.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들이 많고, 그 문제들에 나름의 답을 내리기 전까지는 내 모든 비평은 적당한 꾸밈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계속해서 해 볼 것이다. 언어 언어 언어를 가만 입안에서 굴려 보는 이제니의 화자처럼, 혹은 이인삼각하듯 천천히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옆으로 샜다 하는 박솔뫼의 화자처럼.

휘발된 부분─백수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휘발되었던 그 힘이 그녀의 서사에 다시 끼워진 후, 그녀는 다른 아름다움을 되찾는다. 폐허에 세워질 다음 집은 그녀가 꿈꾸었던, 혹은 살아왔던 어떤 집과도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삶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으므로. 다른 집에 관한 꿈은 필요 없을 것이다.

해변을 걷기

고향을 다녀올 때마다 ‘바다 짠내를 충전해왔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파도가 그리는 선과 나란히 해변을 걷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바다로 뛰어들어도 안 되고 해변을 영원히 걷는 것도 안 된다. 다시 내륙으로 돌아와야 한다. 다만 해변을 걷는 자의 마음쯤은 지키고 살아도 좋을 것이다. 겨우내 맡으려고 바다 짠내를 긷는 일 비슷한 것이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정용준, 「사라지는 것들」

이 이야기에서 내게 남은 것은 더 이상 갈팡질팡하지 않게 된 나이 든 한 사람의 모습이다. 앞서 이 소설을 고른 이유로 ‘나와 닮은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고 두려워하는 자, 그 와중에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있는 자, 다음이 무서워서 버티다가 안에서부터 무너져내리는 자. 나와 닮은 이 인물들과 함께 다리 하나를 건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좋은 소설이었다. 소설의 좋음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아름다움은 협잡에 관해서는 늘 볼셰비키다 ─ 정한아 『울프 노트』 단평

우리도 모르게 쓰게 되는 어떤 서두. 폭발하면서 태어나는 힘. 이 아름다움은 어떤 협잡에 대해서도, 중성화된 고양이나 미모사가 아니라, 볼셰비키일 것이다. 여기에 론 울프들의 행로가 있다. 귀 기울인다면, 귀 기울인다면, 우리는 볼셰비키적인 서두를 쓰게 될 것이다.

공동公同 혹은 공동空洞

그러나 결국 나/우리는 공동公同과 보편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걸 허상으로 놔두고 각자도생하는 순간, ‘이젠 아무래도 미시적인 것들을’ 운운하는 순간에야말로 ‘우리’는 허상이 된다. 그래서는 어떤 악도 걸러낼 수 없고 어떤 선도 지킬 수 없다. 지금-여기에는 분명히, 우리를 관통하고 있는 질문들이 있다. 그것들 앞에서 좀 더 깊게 오래 진지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