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이야기 — 임대형의 《윤희에게》 단평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져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좋은 서사는 당사자성과 관계없이, 또는 당사자성을 뛰어넘어 가장 올바르고 섬세한 언어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어떤 이야기들은 결국에는 말해져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입증한다. 임대형 감독의 (2019)는 바로 그러한 영화다.

종말 이후를 이야기하기 — 박민정의 「모르그 디오라마」 단평

눈을 감은 채 대중의 관음의 대상이 되었던 소녀의 시체와 눈이 가려진 채 나체 사진을 찍혔던 ‘나’의 신체는 시선을 빼앗긴 상태 그대로, 이백 년의 시간을 초월하여 대중의 시선 앞에 나란히 병치된다. 개인, 대중, 언론, 그리고 국가라는 공동의 가해-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자행 내지는 재생산되는 폭력의 유구한 역사로부터 우리는 사실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종말 이후의 서사란 이토록 잔인한 것이었나.

영원한 찰나의 아포리아 — 한유주의 「왼쪽의 오른쪽, 오른쪽의 왼쪽」 단평

그럼에도 어떤 이야기들은 계속 되돌아오고,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유령의 목소리를 빌려서라도 귀환해야 하고, 파편적인 기억의 조각으로나마 계속되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한유주는 이 이야기될 수 없으나 이야기되어야 하는 모든 것들을 찰나의 순간에 박제함으로써,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영원한 시간성 위에 놓는다. ‘나’의 이야기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유령의 목소리라고 할지라도.

멀고도 아득한 이야기 — 최은영의 「일 년 」 단평

그리하여 우리는 한껏 클로즈업된 렌즈 속으로 또다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서로에게 상처입을, 또는 상처입힐 가능성을 묵묵히 등에 업은 채, 그러나 내딛는 한 걸음마다 조금은 더 선하고 무해한 관계가 담긴 롱-쇼트로 이어지기를 조심스레 소망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씩, 때로는 머뭇대고 발을 헛디디면서도 어깨를 맞대고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경계의 틈새로, 새로운 세계 엿보기

초하라는 이름으로 지평에 첫 걸음을 내딛는다. 첫 걸음이니만큼 조금은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말을 골라보려 한다. 노을 지는 시간을 사랑한다. 감상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시간. 옳고 그르다고 굳게 믿어왔던 것들에, ‘과연 그럴까?’라는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순간. 황혼녘은 하루에 단 한 번뿐이지만, 동시에 매일 찾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계에 최초의 노을이 나타난 이래로 쭉 지속되어 왔고, 이 세계가 존속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초의 노을이라는 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