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후회, 그리고 희망

왜 이른바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가? 그의 탄생 자체가 우리의 현재적 행복을 확언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의 가르침이 위대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이루었다는 위대함이 지금 우리의 곁에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탄생이 열어준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과 그리움 속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탄생이 정말로 일어났었음을 믿으며, 그가 열어준 기회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리고 다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 속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비평의 본질과 대안적 비평: 밤비의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에 대한 제언

본고는 밤비의 논고에 대한 비평이다. 나는 먼저 앞선 나의 글들에서도 제안된 바 있는, 비평에 관한 나의 이해를 제공한 뒤, 나의 비평 개념으로부터 밤비의 비평에 관한 관점을 고찰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른바 ‘에세이영화’라는 것이 그 자체로 대안적 비평의 중핵이 된다기보다는, 여전히 ‘자전적 서사’가 그 중심에 있으며, 밤비의 비평론의 방향이 이 중심을 향해야 함을 밝힐 것이다.

woman on a boat holding gas lantern

진리란 단지 우리 안에 있는가?

이 배는 단지 허상인가? 또는 이 배는 단지 역사적인 어떤 것만을 제공하는가? 즉, 우리가 진리를 판별하는 이 체계는 허상에 불과하며,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틀에 불과한가? 이는 그런데 ‘인식적 규범성’이라는 생각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괴상하다. 어차피 우리가 그 자체로 참인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이 배를 뭐하러 타고 있으며 그 배를 수리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뭔가 하나의 배가 다른 배보다 더 탐구를 위해 쓸모있기에 이 배를 타고, 또 이 배보다 더 쓸모있는 배를 알게 되면 그 배를 타는 것 아닌가?

열정, 세계, 삶

‘열정에 대한 열정’을 미심쩍게 보려는 우리의 경향성은 잘못된 이분법의 산물에 불과하다. 열정에 대한 열정이 구축한 ‘열정의 의의’는, 열정에로의 길을 닦는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실재에의 열정과 조우한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그림을 수용한 채 우리가 하고 있는, 또한 할 수 있는 작업들을 그대로 해 나갈 수 있다.

합리적 인간

나는 차라리 메타이론적 층위에서, 합리적 선택에 관한 탐구들이 미래 선택에 대해 갖는 규범성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어떤지 제안한다. 즉, 경제학은 경제 행위에 쓸모 없다. 윤리학은 윤리적 삶에 쓸모 없다. 문법학은 올바른 언어 사용에 쓸모 없다. 미학은 아름다움의 추구에 쓸모 없다. 다만 이러한 탐구 활동은 우리가 어떤 규범을 갖고 있는지를 살피는 이정표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합리성 탐구 활동에 대한 기대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다.

계시

토대주의자들의 딜레마란 늘상 이런 식이다.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거나 자기정당화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정당화하는 토대는 우리에게 큰 지식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텐데, 정당화될 수 없는 토대를 신뢰한다는 것은 오로지 규약 또는 결단의 문제인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실재의 공허함

어떻게든 실재를 공허하지 않게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앞 문단에서 예를 들었던 방식들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론적 양화를 선호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색이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잔인하다. 여러 방식의 주장 가능성은 열어두되, 그 중 하나의 방식만을 채택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험적 종합이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 (하)

이제 문제를 철학의 경우로 축소해 보자. 논리실증주의는 쇠락하는 듯 보였지만, 세 축으로 매인 이분법은 여전히 건재했다. 상술한 내용까지만을 고려한다면 왜 이 이분법이 유지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콰인은 의미론적 전체론에 근거해 분석성과 종합성이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다고 했고, 굿맨은 “이상한 속성”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미래에 과거 경험을 투사하기 때문에만 정당화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이분법을 유지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조금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선험적 종합이란 어떤 의미에서 가능한가? (상)

어떤 학제에서 의견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학제에서의 모든 주장이 자명하게 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 학제에서 적어도 어떤 주장들은 자명하지 않게 참이 된다는 것은, 또한, 그러한 주장들은 우리의 지식의 폭을 넓혀준다는 것을 뜻한다. 즉, 단지 우리의 말장난이나 사전 편찬 작업 등으로는 할 수 없는 류의 작업이라는 소리이다. 이러한 작업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을 함과 동시에, 우리는 “선험적 종합”의 가능성의 문제에로 돌입한다.

출발선 위에서

이번달 우리가 나눈 대화는 각자의 토대에 관한 것이었다. 좀 더 멋지게 말하자면, 각자가 선 출발점이 어느 트랙 위의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이번 대화의 의의가 있었다. 나는 재미 있어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 있는 재미 없는 주제를 꺼내는 것을 나의 경기로 보았다. 단현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로부터 건설적 확장을 하는 일을 그의 경기로 삼았다. 파상은 비평 대상 그 자체만을 갖고 비평 밖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그의 경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평뿐 아니라, 우리가 가는 방향 자체도 다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