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 작가의 ‘스타일’을 특징짓는, 얇고 기다란 인물상들 — 은 마치 육신이 불타고 남은 잔재같이 보인다.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의 섬세한 표현은 온데간데없다. 표면은 살결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거칠다. 육체는 기이하게 변형되어 있다. 아니, 말라붙어 있다. 이미 옷도 머리카락도 심지어 살갗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차갑고 단단하게 솟아있는 저 형체는 과연 무엇일까. 위태롭고 연약한, 존재의 가벼움? 그러나 자코메티의 마지막 작품(로타르Lotar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앉아있는 남자의 흉상Buste d’homme assis(Lotar III)》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과 마주해본 사람이라면 자코메티가 삶의 끝을 예감하며 빚은 찰흙덩어리가 실존의 가벼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업은 우리의 몸에서 가벼움을 덜어내고 남은 어떤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남는 것은 가벼움이 아니라 무거움이지 않을까? 자코메티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정적이고 명상적인 이 조각상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은 아마도 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진동일 것이다.
 

2.

그러나 우리는 얼굴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시대에 당도했다. 물론 우리가 ‘얼굴’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 사람의 얼굴’,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결코 잊지 않을 얼굴’과 같은 것이 혀끝에 질기게 남아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예쁜 얼굴’, ‘잘 생긴 얼굴’, ‘귀여운 얼굴’, ‘관리해야 하는 얼굴’, ‘화장을 하는 얼굴’……과 같은 것들이 얼마나 빠르게 전시되고 팔리고 또 새롭게 스카웃되는가.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재발명되는 이것은 수많는 말들, 자본과 지식, 기술이 우글거리는 공간이다. 얼굴은 몸의 일부가 아니다. 이것은 간단하고도 놀라운 사실이다. 해부학적으로 ‘얼굴’이라는 부위는 없다. 신체의 그 어떤 조직이나 장기, 혹은 그것들의 집합도 ‘얼굴’에 상응할 수 없다. 피부 조직, 근육 조직, 머리카락, 눈·코·입·귀 등의 기관을 모두 합쳐도 얼굴은 되지 않는다. 해부학에 심리학을 더해도 얼굴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내 얼굴은, 마치 내 이름처럼, 내 것이 아니다. 내 얼굴을 향유하는 이들 혹은 경멸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다. 아마도 얼굴은 빈 공간, 혹은 내 앞으로 열려있는 공간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타인들을 초대하도록 되어있는 방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신체의 표면, 혹은 표상, 즉 이른바 ‘신체의 이미지’에 의미가 덧씌워지고, 그것을 조작하고 변형하여 이용하는 작용에 다름 아닌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얼굴의 ‘의미’는 만들어진 것, 권력이 신체에 작용하여 생성해낸 것일까? 푸코Michel Foucault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책(『감시와 처벌』)에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신체다. 그 외의 것들은 무대의 공간, 무대장치 혹은 대사, 조연들이다. 푸코는 신체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두고, ‘정신’을 말할 때에도 그것이 신체가 연기하는 기교나 인격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러나 푸코는 이 신체라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있다. 푸코에게서 신체는 ‘일단 있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권력의 끊임없는 미세한 작용이 있다. 그것은 어디에 작용하는가? 신체에. 여기까지일 뿐, 푸코는 왜, 어떻게 신체는 권력이 뿌리 뻗을 수 있는 틈을 내어주는지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
 

3.

우리 시대에 신체가 어떻게 말해지고 향유되는가? 바로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인 주제였다. 그리하여 내가 닿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신체는 어떻게 차별받는 대상, 노동을 하는 것, 상품화될 수 있는 것…… 등등이 될 수 있는가? 삶을 지탱하고 있는 신체, 경험하고, 기억을 담고 있고, 조금씩 망각하고, 천천히 무너지고 있지만 바로 다음 순간까지는 존속하여 “여기 아직 무엇인가가 살아 움직인다!”라고 외치는 신체, 다시 말해 고유한 신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어려서부터 보고 들어서 조금도 낯설지 않은, 그러나 일단 주의를 기울이고나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개념들 — ‘이상형’, ‘애교’ 등등 — 과 동거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단은 이것들을 문제 삼자. 이와 같은 개념들은 우리 사회의 특정한 영역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들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들은 특정한 이념을 대표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 말을 뱉는 발화자는 어떤 특정한 차별의 기제 혹은 권력의 작용에 기여하기 위해 발화하지 않는다. 다만 이 개념, 아마도 이 언어를 공유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할 이 단어들은 특정한 행위들을 직접적으로 요구한다. 이것들은 신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체가 만들어야 할 모습에 관한 교범manual에 대한 주석 — 바로 이 언어, ‘한국어’로 쓰인 주석 —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정해야 한다. 개념들, 말들이 우리 사회의 한 축을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파편적인 증거에 불과하다. 무엇에 대한 증거인가? 우리 자신에게 속한 줄로만 알았던 신체는 개방되고 개발될 수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공적인 신체public body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나타나는 동시에 행위의 어떤 면을 끝없이 요구하는 어떤 것이 우리 문화 속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다. 다만 여기서 말해두어야 할 것은, 이 교범은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 고정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누구나 참여하여 덧붙일 수 있고 누구나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할 수 있으며 수많은 예시와 모범, 반면교사, 미담, 모험담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우리가 욕망해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차분하게 설득하여 우리의 욕망들을 줄 세우고 구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신체로 이루어진 책이다. 옛날에는 오직 책일 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가능한 모든 미디어media를 흡수하여 몸집을 부풀리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되고 감상되는 신체, 처벌하는 규율 권력이 아니라 출연시키고 클로즈업하고 배치하는 상품화의 효과, 감옥이 아니라 카메라로 둘러싸인 세트장을 말하고자 한다.
 

4.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란 무엇인가? 어원적으로는 ‘창녀 혹은 매춘에 대한 기록’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포르노그래피의 ‘역사’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내가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포르노그래피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요약하자면, 오늘날 포르노그래피는 방송·출판·게시·전송되는 매춘, 즉 대중the public을 위한 레디메이드ready-made 매춘이다. 그러나 이 ‘매춘’이라는 표현은 다른 것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포르노그래피가 파는 것은 확실히 성행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포르노그래피가 성행위 장면을 촬영하여 영상으로 만들거나, 만화로 그리거나, 글로 묘사한 것이라고 해도, 포르노그래피가 제공하는 것은 성적 이미지들이지 성행위 자체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르노그래피를 포르노그래피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그것의 필수적인 요소 혹은 특징을 조사해봄으로써 그것을 더욱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의 분석은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이성애자 남성을 고객으로 하는 포르노그래피를 중점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분석은 ‘성소수자’를 위한 포르노그래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출연하는 신체들의 성sex이 남성-여성이냐 남성-남성이냐 트렌스젠더 남성-여성이냐 하는 사실 이상에 있기 때문이다.)
(1) 무엇보다도, 포르노그래피는 신체를 출연시키고 전시하고 묘사한다. 포르노그래피가 ‘인위적인’ 신체, 혹은 ‘변형된’ 신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설령 포르노그래피 속에 등장하는 신체가 수술을 통해 확장된 성기나 유방이든, 극단적인 체중 감량을 거친 신체이든, 혹은 비율을 변형하여 그린 신체이든 간에, 등장하는 신체가 하나이건 둘이건 여럿이건 간에, 신체를 묘사하지 않는 포르노그래피는 있을 수 없다. (2) 그런데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신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는 묘사되지 않는다. 신체는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포르노그래피는 신체 전반을 혹은 특정한 부위를 묘사하는 동시에 그 행위를 묘사한다. 성행위 장면 또는 자위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 포르노그래피라 할지라도, 신체는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중이다. 많은 영상 형태의 포르노그래피가 걸어가는 여성의 엉덩이와 골반의 움직임을 뒤에서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어떤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알몸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곧 있을 거친 성교 이전에 등장한다. 또 다른 포르노그래피에서는 한 남자가 물을 잔뜩 튀기며 다이빙을 하고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는다. 이런 장면들은 포르노그래피 속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거나 혹은 그 자체로서 성적인 상상과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성교나 자위가 아닌 다른 행위를 묘사하는 장면의 경우에도, 그리고 그것이 성교를 곧바로 연상시키는 움직임과 거리가 멀지라도, 포르노그래피는 신체가 움직이는 전체적인 모습 혹은 신체의 특정 부위를 묘사함으로써 그 행위에 대한 묘사가 전체 이야기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떠맡도록 만든다. (3) 또한 행위에 대한 묘사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포르노그래피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는 전형적인 이미지들, 즉 ‘성적 코드’를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그 반복으로부터 오는 진부함을 피하기 위해 배경이 되는 상황, 플롯, 등장하는 인물들에 약간의 변화를 준다. 성적 코드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몇 개가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한다. 성기는 가장 직접적인 이미지이지만 성기만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성적인 흥분을 지속시키지 못한다. 보통의 경우 삽입성교, 구강성교와 함께 여성의 얼굴, 입술과 혀, 타액, 유방과 유두, 잘록한 허리, 골반과 엉덩이를 잘 섞어서 편집한다. 청각적인 요소 중에서 가장 흔하고 전형적인 것은 여성의 과장된 신음소리이며, 살이 부딪치는 소리 또한 요긴하게 활용된다. (4) 여기서 더 나아가, 포르노그래피는 개인의 특수한 성향과 취향을 반영한다. 그러한 방편 중 하나로서, 어떤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성적이라고 생각되는 전형적인 신체의 이미지 외의 특별한 신체 부위 또는 신체에서 나온 분비물을 등장시킨다. 발가락으로 성기를 애무하는 장면, 또는 소변을 갈기는 장면 등이 그 예이다. 어떤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의 유두에서 젖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묘사한다. 또 다른 방법은 일상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그러나 범하는 것이 금지된 신체를 등장시켜 개인의 환상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예컨대 성인 여성이 아닌 유아 혹은 청소년이 등장하는 것, 혹은 그에 준하여 성인 여성이 학생의 복장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있는가하면 등장인물이 교사, 의사, 간호사, 경찰과 같은 전문직 혹은 비서나 하녀 등의 직업을 가진 것 등등이 있다. 포르노그래피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의 문화에 따라서는 여성을 유달리 수동적이고 가냘프게 묘사한 것, 심한 경우 강간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설정한 것이 인기가 있는 한편(일본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여성을 거칠고 폭력적으로 묘사한 것, 여성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나름의 고객층을 유지한다. 이것들은 한없이 다양해보이지만 이러한 유형들 자체가 반복적이며 따라서 분류 가능하다. 실제로 포르노그래피를 게시하는 웹사이트들은 ‘카테고리’ 별 정렬 기능을 제공한다. 진정으로 독특한unique 취향을 반영한 포르노그래피는 없다. 이것들 모두가 예측 가능한 수요에 대한 공급인 것이다. (5) 한편 포르노그래피 속의 등장인물들은 거의 인격을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등장인물들은 그들 자신의 신체와 관련된 묘사를 가질 뿐, 이른바 문학적 의미에서 ‘인물’이라고 할 만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다. 포르노그래피 속에 사건이 묘사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어지는 사건이나 상황의 개연성을 주는 등의 장치일 뿐, 하나의 인물을 만들어낼 정도의 사건은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포르노그래피에서 사건은 희박해지고 상황만이 남는다. 이것은 오로지 감상자의 몰입을 위해서이다. 인물의 내면심리가 복잡하거나 인물이 독특한 성격 혹은 성장배경을 갖고 있을 경우 감상자가 ‘그 인물의 신체를 입고’ 포르노그래피 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인물을 그려내는 데 필요한 묘사는 포르노그래피의 관점에서 경제적이지도 않다. (6) 따라서 포르노그래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저 역할놀이를 하는 것처럼 드러난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것에 충실하다. 누군가는 상황을 지배하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당하는 입장이거나 수동적이다. 혹은 모든 인물들이 성교나 애무에 미쳐있다. 광란의 파티가 벌어지는 것이다. 또 다른 예에서, 한 인물은 줄곧 잠들어 있는 상태이다. (7) 이와 같은 방식들을 통해, 포르노그래피는 응축적이고 그러므로 경제적인 구성을 갖는다. 너무 장황한 장면은 유통이나 공유의 과정에서 잘려나가고 편집된다.
이상은 오늘날 쉽게 구할 수 있는 포르노그래피들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을 추려본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포르노그래피에는 픽션(소설, 만화, 혹은 배우가 연기하는 비디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경험담이나 만화, 또는 영상 촬영이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거나 카메라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실제의 성교 장면(이러한 것들 중에 대부분은 리벤지 포르노이다)과 같은 것들 또한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것들도 위에서 기술한 특징들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일단은 유통되고 유포되는 과정에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편집과정을 거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개인의 성생활이라는,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경험과 행위가 어떻게 단숨에 포르노그래피로 판매될 준비를 마치는 것일까? 만약 포르노그래피를 즐기는 감상자의 위치까지 분석에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포르노그래피는 관음증적인 것, 역-판옵티콘이다.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신체는 공적인 공간에 공개되고, 익명의 불특정 다수가 그것을 본다. 그런데 등장하는 신체의 입장에서는 그 시선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포르노그래피는 광장에 몰려든 군중이 밖에서만 안이 투명하게 보이고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의 신체들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저 구경꾼들은 서로가 서로로부터 분리되어있다. 그들은 각자 혼자서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구경꾼의 신체는 아무에게도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경꾼들이 수없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한 곳을 보고 있는 것이다. 구경꾼은 가장 공적인 장소에 놓인 신체를 가장 사적인 위치에서 본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종합해보자. 포르노그래피가 출연시키는 신체는 행위하는 신체이다. 그런데 그 행위는 상황을 설정하거나,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에 개연성을 부여하거나, 그 자체로 성적인 코드로 해석된다. 결국 행위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다. 즉 그것들은 성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효과를 창출해야한다. 그리고 행위를 하는 신체들은 감상자에 의해 몰입될 수 있는 등장인물이며, 감상하는 자는 자신을 등장인물의 위치에 놓음으로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 신체를 취사선택하고, 일련의 행위들을 상상하고 모방하고 습득한다. 포르노그래피는 일회적인 성적 흥분을 이끌어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잘 조직된 환상fantasy — 환상은 망상delusion이 아니다 — 의 왕국을 지속적으로 공급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포르노그래피는 그저 신체를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대한 혹은 신체를 통한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체를 개발하고 향유하는 일련의 기술과 방식의 총체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신체에서 공적인public(공공의/공개적인/대중적인) 영역을 발견하고 개발한다. 완전히 사적인 몸은 없으며, 우리의 몸 구석구석에는 이미 꼬리표가 달려있다. 그것들은 ‘말해질 준비가 된’ 몸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역-판옵티콘에 놓이는 즉시 포르노그래피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분적으로나마 포르노그래피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감시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에게 속하며, 그러므로 가장 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누구나의 것이 되도록, 누구나 말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으며 모방하고 겪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포르노그래피는 성이라는, 우리들의 가장 보편적이고 강력한 욕망을 기반으로 해서 체계를 갖추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성이라는 터부시되는 주제를 다소 포기하면서 우리의 또 다른 욕망들의 그물을 타고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변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포르노그래피는 상품화된(누구나 이용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된) 사적 경험이다. 예컨대 현대의 간편한 여행이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여행이 하나의 포르노그래피가 된 것은 여행이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촬영하여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게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진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서, 검색 엔진에 “프라하 여행”이라고만 치면 언제든 우리의 욕망을 환기시킬 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누구나 포르노그래피를 발행publish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신체의 공적인 영역을 컨텐츠contents로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그것들은 고객들을 만족content시키겠다고 외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단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또 다른 만족을 위해 포르노그래피의 바다를 떠돌아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포르노그래피가 제공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욕망할 수 있는 것’, ‘욕망해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 수 있는가? 이것은 행위에 관한 물음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우리들 각각이 가장 잘 모르는 물음, 그 무지를 들춰내는 물음이다. 포르노그래피는 바로 이 물음에 답을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물음은 그저 유보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포르노그래피를 ‘구독 취소’해도 다른 포르노그래피로 넘어가서 ‘구독한다’. 우리는 행위한다. 오직 행위함으로써 우리는 살아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행위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저 ‘그렇게 하게 되어서 그렇게 한다’. 포르노그래피는 단순히 은밀하게 소비되는 상품, 대량으로 생산되는 거대한 산업을 넘어선다. 그것의 원리는 신체를 향유하는 방식들, 신체가 행위하는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모든 분야로 퍼져나간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 포르노그래피라는 개념을 일반화하여 — 우리 문화의 한 절단면에 ‘포르노그래피즘pornographyism’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자 한다. 이제 남아있는 문제는, 어떻게 포르노그래피즘은 공적인 신체를 창출하는지, 그 신체는 어떻게 다시 포르노그래피즘에 기여하는지를 해명하는 것이다. 즉 내가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도입했던, 신체의 이중성에 관해 해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앞에서 포르노그래피를 상세하게 분석하면서, 신체와 행위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 나아가, 신체와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다름 아닌 행위라는 것이 이 논의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6.

몸은 하는 몸, 하고 있는 몸, 했던 몸, 해온 몸, 할 수 있는 몸, 하게 될 몸, 할 몸, 하기를 요구받는 몸, 해야 하는 몸, 하기를 바라는 몸, 하고 싶은 몸, 하기를 원하는 몸, 할 뻔한 몸, 끝내 못 한 몸, 안 한몸, 안함으로써 한 몸, 해낸 몸, 하고도 또 하는 몸이다. 요컨대, 몸은 하는 몸, 행위하는 신체이다. 신체는 행위하는 신체로서만 비로소 신체이며, 행위는 신체의 운동과 변용을 통해서만 비로소 행위이다.
그러므로 신체의 이중성은 곧 행위의 이중성이다. 보여주는 것바꾸는 것의 두 계열은 구분되지 않은 채로 뒤엉켜 있다. 공적인 신체는 행위로부터 표현을 이끌어내는 신체, 표현expression으로서의 행위와 점착되어 있는 신체다. 즉 그것은 ‘말을 하는’ 신체, ‘꼬리표가 달려있는’ 신체, ‘말해질 수 있는’ 신체이다. 포르노그래피즘은 행위로부터 표현을 읽어내며 오직 표현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인가를 바꾸는 행위가 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현실’에 관여하는 행위,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강도와 범위이든 간에, 세계에 ‘돌을 던지는’ 행위다.
 

7.

신체는 이른바 ‘의식’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언어를 배운다. 그 언어는 가끔 ‘국가/민족-어’ — 우리가 일반적으로 (체계로서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 — 의 가죽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그 언어는 여러 심급을 갖고 있으며 그 층위들끼리 어휘나 통사법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 언어은 서로 다르면서도 번역 가능성을 갖고 있고, 때로는 어휘를 수출하고 수입한다. 그것은 집합적인collective 원리, 내적이고 자족적인 원리의 체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 자체로 메커니즘이며 또한 그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것들끼리의 접촉, 충돌, 영합, 혹은 불화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초월적’이지 않다. 그것은 단지 신체를 신체와 맺어주는 무도회장이자 신체가 신체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말하는 들이다.
그 춤의 이름은 포르노그래피즘이다. 포르노그래피즘은, 말하자면 신체가 표현하도록, 말을 하도록 가르치고  개발하는 문화다. 그것은 “행위로부터 표현을 읽어내며 오직 표현만을 요구한다”. 포르노그래피즘은 신체로부터 공적임발현시킨다. 고유명사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시사함으로써 무너져 내려 보통명사가 되듯이, 고유한 신체가 공적인 신체가 된다. 신체는 원래 순수한 것인데 권력이 그것을 조작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그것에 관한 제반 지식과 함께) 새롭게 만들어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신체를 ‘열어젖히고’ 그리하여 공적임발현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고, 행위에게서 이중성을 찾아내어 가시화하고, 적어도 한 축에 작용하여 감응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 페이지를 더하게끔 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8.

포르노그래피는 겉으로 보기에는 ‘성적인 표현’을 약화함으로써 자신의 활동범위를 넓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이 출연되는 신체를 선별하고 개발하는 방식을 보면, 여전히 자신의 원래 능력을 넓은 범위에서 십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포르노그래피는 다수자인 ‘이성애자 남성’의 욕망과 수요에 맞춰 신체로부터 공적인 신체를 성적 코드로서 창출해낸 방식을, 일반적으로 ‘음란물’의 범주에 속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컨텐츠들에도 적용한다. 이를테면, 도대체 왜 아이돌 가수, 기상캐스터, 스타 강사, 개인 방송 제작자, 헬스 트레이너가 거의 같은 신체의 조건들을 갖고 있으며 거기서 거기인 신체의 동작과 표현들을 활용하는가? “소비자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즉 그런 조건을 갖추어야 출연할 수 있고, 그렇게 선별을 거치고 신체를 발달시키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은 경제적 설명이며, 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체에 대한 이중의 효과이다. 상품화될 수 있는 신체만이 상품화된다. 이것은 동어반복인가? 일단은 그렇다. 그러나 관형어와 서술어가 각각 다른 사태를 지칭한다면, 즉 두 개의 계열이 각자 발생하면서 또한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는 모습을 표시한다면, 아니다. 신체가 특정한 코드/표현을 드러내도록 하는 효과가 있고, 신체가 그러한 코드/표현만을 욕망하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일관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신체를 가꾸고는 이것을 공개하고 보여주고 뽐내고 판매한다.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가꾸어진 신체만을 욕망하고 허용하고 소비한다. 다시 말해, 욕망해도 되는 것만이 욕망된다.
(욕망이라는 개념을 절대화하지는 말자. 욕망이란 쉽게 말해 ‘하고 싶음’, ‘하기를 원함’이며, 따라서 신체와 행위를 연결하는, 신체와 행위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변이이다.)
 

9.

보여주는 것 외에, 얼굴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다. 이때, 똑같이 ‘얼굴’이라고 불리지만, 아마도 그것은 다른 신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직면하는 일이다. 다른 얼굴, 혹은 거울과 대면하는 일. 또는 도대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한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세계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고개 돌리지 않고 쳐다보는 일.
(욕망해도 되는 것만을 욕망하는 것과는 다른 행위가 가능할까? 세계에 ‘돌을 던지는’ 행위가 과연 가능할까? 이 물음은 여전히 남아있는 물음이다. 이것은 아마도 다음 과제가 될 것이다.)
 

10.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L’homme qui marche》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오직 옆모습으로만 알려져 있다. 가늘고 가냘픈 몸통과 다리, 이제 곧 뒤에 있는 다리를 앞으로 뻗을 것 같은, 걷는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내가 그 조각상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나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그 얼굴을 잊지 못한다. 눈, 코, 입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이제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내가 본 것은 표정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감정이 묻어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얼굴. 말을 학살하고 난 뒤의 얼굴. 청동보다 단단한 침묵. 나는 겁에 질렸던 것 같다. 그 작품의 ‘의미’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과 주장들이 얼마나 ‘가냘픈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응시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 눈에 의해 나는 변질되었다. 이 순간, 살아있는 것, 몸을 가진 것은 누구인가?

단현
danhyun0124@naver.com

One thought on “포르노그래피즘, 공적인 신체, 다시 행위

  1. 사적인 영역에서의 행위가 공적인 영역으로 끌려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신체성이 진행 되는 것에서 행위의 연속성 혹은 행위의 의미가 가정되어있나요? 그렇다면 관음 혹은 ‘보는 것’의 개념에서 ‘보여지는 것’과’보여주는 것’의 개념이 텍스트(대상물)에 대한 동시의 불분명한 것에서 그것과는 별개의 표현주의 행위로 분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욕망의 연쇄로서 포르노그래픽이라면 필히 기관없는 신체, 껍데기만 남은 채 연속되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에서 다루는 신체와 행위의 거세된 육체와 포르노 그래픽을 말하기에는 그 기준이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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