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이야기해 보자. 지평이라는 이름 아래 세 지평을 공유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연구공동체’를 표방하는 우리를 보며, 혹자는 우리가 이어지는 담론의 공박을 치열하게 펴 갈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와 비슷한 이들이 만든 정기간행물이나, 비슷한 이들이 만들었던 ‘글쓰기 모임’을 떠올리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 공동체가 운영되리라고 예상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연구공동체 지평’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하려는 작업은 기성 학술지의 방식으로 논증과 토론을 이어가자는 것이 아니며, 그럴 듯한 주제 아래 글을 빼곡히 써 가는 글쓰기 모임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학술지가 아니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나오는 반응을 ‘[비평]’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붙인 ‘~에게 부쳐’라는 제목의 글로 정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글짓기 모임이 아니다. 우리는 그 어떤 구체적인 주제어도 제시하지 않고 각자의 주제를 써 갈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한다. 심지어 누군가의 글을 보고 생긴 느낌을 표현하고자 할지라도 우리가 하는 것은 각자의 말이어야 한다.

우리는 학파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연구방법론이나 하나의 명시적인 주제, 또는 하나의 지배적인 담론을 구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글을 쓸 때 각자의 방법론과 각자가 관심하는 주제와 각자가 외치는 담론이 나타난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말을 이어갈 작정이다. 이달의 주제로 여겨졌던 ‘여는 말‘의 글들은 이 포부를 잘 보여준다. 세 사람의 글쓰기 양식에는 좀처럼 접점이 보이지 않으며, 언뜻 이 공동체는 세 개의 평행선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선들이 무언가 공유하는 점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자. 각자가 평행한 말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는 (허울 좋은 이름이지만) 하나의 실험을 하고 있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다른 말들을 하는 이들이 같은 담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인) 기대이다. 전혀 다른 학문적 배경과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모였을 때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단현이 사용하곤 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곳에서 우리가 하려는 작업은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촉발하는 사태들의 예시를 보이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 촉발이 실제로 일어난다!”라는 말만 외치는 공허한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의 텍스트”를 만들고 그 텍스트에서 촉발된 다른 텍스트를 명시적으로 써 보자는 것이 우리의 기획이다.

이른바 ‘간학문적 연구’라는 이름 아래 수행되어 온 그런 것을 해 보자는 것도 아니다. 어떤 틀에 짜여진 ‘프로젝트 식’ 연구는 지평의 이상과 맞지 않다. 우리는 아니다. 학술지가 되지 않기 위해, 작문 모임이 되지 않기 위해, 학제간 연구 프로젝트가 되지 않기 위해(우리 세 사람이 어떤 ‘학제’에 들어있는 사람이기나 한가!) 의도적으로라도 각자의 글에 대한 명시적인 반응은 최대한 삼갈 작정이다. 그저 각자의 글을 흘러 나오게 해야 한다.

멋있게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에게 명시적인 ‘집필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이 공간에 어떤 글들이 이어질지에 관해 짧게 소개하겠다:

블로그 <지평>에는 두 종류의 글이 게재된다. 하나는 월간 기획이다. 우리는 매달 한 사람의 ‘촉발자’를 정하고, 그로 하여금 어떤 질문을 던지게 할 것이다. 이후 순서에 따라 그 글에서 촉발된 글을 두 저자가 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글들의 결산 격이 되는 글을 촉발자가 게재한다. <여는 말>의 구성이 그 예시이다. 그 외의 글은 어떤 기획도 없이 세 저자가 나름대로 촉발하고자 하는 문제 의식들을 써내려간 것들이다. 이 글들은 어떤 특별한 장소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다. 월간 기획으로 쓰인 글들을 포함해, 각 저자의 모든 글은 저자별 목록에서 열람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저자가 명시적인 주제의 글타래를 쓰게 되는데, 그러한 특집성 글타래는 기획/특집 목록에서 열람할 수 있다. 참고로 기획/특집 카테고리에서는 특집성 글 외에 월별 기획물도 함께 열람 가능하다.

지평은 이어질 수 있을까? 어찌 되었건 서로의 지평이 이어져야만 우리 지평 또한 지속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이어짐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써는 절박한 기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만, 언젠가 이 기대가 오로지 기대는 아니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지평의 문을 이렇게 연다.

2018. 4. 2. <여는 말> 끝.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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