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하는 동료들을 몇 두고 있다. 그들과 이야기를 하나 문득 나온 질문이 “좋은 악기란 무엇인가?” “좋은 악기라는 것이 있는가?”이다. 물론 장인은 연장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경구는 다소 함정이 있는 말이다. 장인도 어떤 연장은 가린다. 무쇠 망치 대신 모종삽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장인은 연장을 가린다. 단지 일단 어떤 조건만 갖추면, 더이상 연장을 가리지 않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장인에게도 좋은 연장이 있다. 그 “좋음”이 당췌 무엇이냐, 이것이 우리의 질문이었다.

연주자들에게 도는 어떤 말들이 있다. “이 악기는 이러저러한 음색을 가진 게 최고야”라든지 “이 악기는 그 브랜드에서 나온 게 정석이지”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정작 프로들의 연주를 보자면 상황이 좀 다르다. 브라이언 메이는 어릴적 자작한 기타를 전 생애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자코 파스토리우스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혼자 프렛을 뽑아서 적당히 개조한 베이스를 메인 악기로 사용했다. 디지 길레스피의 상징인 “휘어 있는 트럼펫”은 술취한 동료의 실수가 만든 결과물이다. 이러한 사연들을 보자면 과연 “바로 그 악기”라는 것이 최고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브라이언 메이(좌), 디지 길레스피(중), 자코 파스토리우스(우).

그러나 여전히 “이 악기는 좋은 악기이다”라는 말이 제대로 쓰인다. “일상언어 사용자가 일빠따다”(?)라는 현대 언어철학의 공리를 생각하자면 악기에 있어 좋음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그 악기를 좋은 악기로 만드는가, 라는 질문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 질문을 적절한 형태로 고치자면, “‘좋은 악기’라는 것의 의미란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의미”란 사전적 의미가 아닌 조건적 의미를 말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질문은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이다. “좋은 악기의 철학”을 시작할 시간이다.


일단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부터 생각해 보자. 악기가 아니라면 좋은 악기가 아니다. 이것은 분석적으로 참이기에, 뭐라고 말할 것이 없다. (이 논제가 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논리력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제도적 의미에서 악기에 분류되지 않더라도, “악기”의 기술적 의미로서 “음악을 구성할 수 있는 도구”라는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악기도 아니다. 이제 적어도 하나의 필요조건은 찾았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좋은 악기”의 의미 중 절반을 얻은 셈이다. 실제로 ‘좋은 악기’에서 ‘악기’는 절반의 음가를 차지한다!

이제 좋음에 대해 생각할 차례이다. 우리가 알기로 좋음은 나쁨의 반댓말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의 반댓말이라는 것은, 그것의 정반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반대되는 대상의 속성을 의미로 표현함을 뜻한다. 예컨대 ‘어둡다’가 ‘밝다’의 반댓말이라는 것은 <밝기이다>라는 속성을 공유하지만 그 정도에 대해 반대되는 속성을 갖는다. 한편 반댓말을 구성하는 두 축은 상대적 관계를 이루기도, 절대적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흑암을 0으로, 모든 물체가 희게 보일 정도의 빛을 10으로 부르자. 0의 빛보다 1의 빛이 밝다. 1의 빛보다 5의 빛이 밝다. 이것은 밝음의 관계적 용법이다. 한편 10의 빛을 밝지 않다고 할 사람은 없다. 8의 빛에 대해서도 밝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통용될 것이다. 0이나 1은 어둡다고 부를 것이다. 그 경계에 대해서는 애매성이 있지만, 일단 절대적 용법으로도 어두움이나 좋음이 있다. 이는 밝음의 속성적 용법이다.

악기의 좋음과 나쁨도 그렇다. 누군가는 카와이의 그랜드피아노보다 스타인웨이의 것이 더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두 악기가 모두 좋은 악기라고 부를 것이다. 연주를 하기에 충분히 좋은 소리를 연주자의 의도대로 내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한편 악기 제작 실력이 전혀 없는 회사에서 처음으로 만든 그랜드피아노가 있는데, 타건의 감도도 일정하지 않고 튜닝은 틀어지고, 심지어 어떤 현은 어느 건반을 누르더라도 타현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것보단 낫지만, 어찌되었건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없는 악기를 생각해 보자. 전자보다 후자는 좋은 악기이다. 그러나 둘 다 나쁜 악기이다.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적으로는 어느 악기 사이에도 좋고 나쁨이 있다. 반면 속성적으로도 악기에 대한 좋거나 나쁘다는 진술이 가능하다.

그런데 좋음이 속성적 용법으로 쓰일 때와 관계적 용법으로 쓰일 때, 우리는 두 술어 “좋다”가 갖는 의미를 차별하지 않곤 한다. 형편없는 악기와 그것보단 덜하지만 연주가 불가능한 악기를 두고 둘 모두 나쁘다고 하면서도, 전자가 후자보다 나쁘다고 할 때 두 “나쁘다”는 같은 조건을 갖는 듯 보이는 것이다. 한편 둘이 차별되는 경우도 있다. 음의 정밀성이 동일한 카와이 사의 피아노와 스타인웨이 사의 피아노를 보며 그 음색에 따라 “카와이 사의 피아노가 좋다” 운운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볼 때, 관계적 용법에서 “좋음”이나 “나쁨”은 앞의 경우에서와 뒤의 경우에서를 차별하지 않고 쓰인다. 삼익의 피아노와 영창의 피아노가 동일한 사양을 갖는데, 우연한 하자로 삼익의 것만 튜닝이 틀어진다고 하자. 그 때 나는 “둘 다 좋은 악기이지만, 얘는 튜닝 때문에 별로네. 영창 걸로 가자”라고 할 것이다. 이 때의 “별로이다”는 차별되지 않는 관계적 용법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악기에 있어 “좋다”는 용법에 측면에서 둘 또는 셋으로 나뉘되, 셋으로 나뉘는 경우 모종의 의미 상 모호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속성적 용법에 있어서는 그 기준이 상대적으로 분명한 듯하다. 제대로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악기이다. 무엇보다 연주자가 소리를 내려는대로 연주 되어야 할 것이고, 듣는 이가 불쾌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연주자가 불쾌한 소리를 내려고 한다면?) 물론 여기에는 그 연주자가 표준적인 악기에서 의도한 소리를 낼 능력이 있고, 감상자가 표준적인 음악에 불쾌함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다소 정치적인 조건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준성 조건이 과하게 상황을 제약하지 않는다는 점에만 동의한다면, 일단 속성적 좋음에는 연주자의 의도에 부합한 소리를 낸다는 것과 듣는 이가 불쾌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으로 포함되는 듯하다.

어려운 경우는 관계적 용법에 있어서이다. 두 악기가 모두 좋은 악기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주자는 카와이를 스타인웨이보다 선호한다. 두 악기가 모두 나쁜 악기인 경우에도 연주자는 둘 중 하나를 “차라리 나은 선택”으로 고른다. 그 때에도 상대적으로 하나의 악기는 다른 악기보다 좋다. 또, 악기의 속성적 좋음을 미분하여 어느 악기는 0, 어느 악기는 0.2, 어느 악기는 0.7, … 등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일단 전자에는 연주자의 주관이 개입할 것이다. 이 선택에서 “이 악기가 저 악기보다 좋다”라는 진술은 “나는 이 악기보다 저 악기를 좋아한다”라는 진술로 완벽히 대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악기의 선호가 아닌 선정 기준의 선호에 주관이 개입한다. “나는 이 요소에 이런 비중을, 저 요소에 저런 비중을 두고 악기를 평가한다”가 전제된다면 “이 악기는 이 비중에 따라 이 정도의 순위를 갖는다”라고 말할 수 있고, 이 진술은 미분화된 악기 평가를 완전히 대치할 수 있다.

한편 관계적 용법에 있어 이런 예외 상황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 피아노는 감도도 별로고 소리도 이상하게 나지만, 그것이 나름 맘에 들어. 난 이 피아노가 스타인웨이의 고급 그랜드피아노보다 좋아.” 이 때의 좋음은 어떤 좋음인가? 일단은 이 문맥은 관계적 용법에 해당하는 문맥이다. 발화자는 그 악기가 자신의 의도에 맞다는 점에서 스타인웨이에 비해 좋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쩌면 여기에서 “좋아”는 속성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악기의 속성적 좋음이 <연주자의 의도에 따라 연주됨>을 내포한다면 연주자의 의도에 맞는 것만으로 좋은 피아노의 조건 중 일부를 만족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속성적 용법에 있어서도 좋음에는 연주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일까? 어떤 점에서는 그렇고, 또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연주자의 의도에 따라 연주됨>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객관화된 속성이라는 데에 있다. 이것이 객관적 속성이라는 것은 다음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된다. 두 변수에 대해 “x가 y의 두 배이다”는 전적으로 객관적인 진술을 구성하는 문장꼴이다. 그럼에도 x의 값에 따라 y의 값은 변화한다. 마찬가지로 “악기 x가 연주자 y의 의도에 따라 연주됨”은 객관적 진술을 구성하는 문장꼴이되, y의 값에 따라 x의 조건이 변화하는 함수꼴일 뿐이다. 그런데 그 x의 조건이 y의 의도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어찌 본다면 주관이 개입된다. 그러나 이는 속성 <좋음>에 개입되는 것이 아니다. 그 좋음이 내포하는 속성 변항에 주관이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속성적 용법은 여전히 어느 정도 객관적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연주자의 악기를 두고 그 연주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그 연주자가 자신의 악기를 통해 충분히 원하는 소리를 낸다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왈가왈부할 수 있다면, 그 연주자가 표준적인 악기를 잘 연주할 수 없는 경우이거나 그 악기가 듣는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는 경우 뿐이다. 이는 표준적인 악기의 조건을 갖기만 한다면 해결될 일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특정 악기가 그 악기 중 가장 뛰어난 악기라고 해서도 안 된다. 일단 의도한 소리가 나기만 한다면, 연주자의 의도에 따라 10만원짜리 악기도 충분히 좋은 악기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제시하는 결론은 별 것 없다. 초심자에게는 적당한 악기를 추천하되, 어느 악기를 써야만 잘 연주할 수 있다느니, 얼마짜리 악기를 쓰는 내가 대단하다느니, 저 사람 악기가 이 악기 제품군 중 최고라느니 말하지 말자. 당신이 연주자로서 악기를 평가하는 경우에는 그 악기를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좋음이나 나쁨은 당신의 선호에 환원되거나, 당신의 선호를 조건에 포함하는 좋음과 나쁨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떤 악기를 좋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악기를 까내릴 수는 없을 노릇이다.

분석을 짧게 요약하자. 악기의 좋음은 속성적 용법에서 객관성이 보장된다. 좋은 악기의 객관적 조건은 그 “연주자의 의도에 맞게 연주되는”, “악기”라는 것이다. 악기의 좋음을 이만큼이나 정성들여 별 소득 없이 분석해 보았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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