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생일이 언제였더라

지인들에게 종종, 어떤 부족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들에게는 정해진 생일이 없었고 몇 번씩이고 새로 태어났다. 이를테면 어느 날 강렬한 경험이나 깨달음이 찾아온다. 혹은 자기가 살던 세계가 원래와는 조금 달라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러면 그 날이 가장 최근의 생일이다. 그들은 이따금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에 기뻐하고 서로를 축하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올해의 첫 아침을 부산의 고향집에서 맞았다. 어머니는 일출을 보는 군함을 타러 일찍 나가셨고 아버지는 큰방에서 주무시고 있었다. 적당히 밝아져 부스스 일어났다. 햇빛이 커튼에 여과되어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의 첫 빛도 역시나, 그다지 찬란하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좀더 자다가 부모님과 함께 늦은 아침을 먹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됐다. 그렇다는 생각을 며칠 하다가 그 부족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다.

‘안쪽으로 눈이 돌아가버린 인형’이라는 이미지를 읽은 적 있다. 중세의 어떤 사람들은 Accidia라는 영혼의 병이 있다고 믿었단다. 그들은 Accidia 환자의 병적인 내향성을 눈이 돌아간 인형이라고 비유했다. 증상은 다음과 같다.

“이 질병의 희생자들은 노동과 기도의 의무를 저버리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며,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며, 생각에 잠겨 있고, 무기력과 정신적 태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에 몰두하며, 주로 책을 읽는다. ”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사실 문맥은 좀 더 진지하고 복잡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눈이 돌아간 인형. 이입하게 돼서 글을 잘 따라갈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너무 많은 일들에 ‘그러려니’하게 됐다. 또는 ‘모르겠다’는 말이 습관이 됐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일이 점점 늘어났고,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바깥 세계와 타인들에 무감각해져버렸다.

그러니까 생일을 맞지 못한 지 꽤 되었다는 얘기다. 한참 쪼그라드는 중이다. 사실 생일을 자축하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됐다.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매년 생일이 돌아오는 게 새삼스럽다.

auto-fiction

얼마 전에 동료들과, 철학이니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된 계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땐 벤야민이라고 답했던 것 같다. 지난 글에서 말했듯 내 필명도 벤야민에게 빚지고 있기도 하니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엄밀히 말하자면 ‘최초의 기억(!)’으로는 벤야민이 아니라 레비나스를 꼽아야겠다.

07년이었나 08년, 중학생 때였다. 한창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말더듬이에게 세상은 우호적이지 않았고 타인들에게서 적잖은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생각건대 나는 어디서나 환대받지 못했다. 그때의 경험들을 구질구질하지 않게 잘 말해내고 싶지만, 아직 어려우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그러다 레비나스를 만났다. 무한으로서의 타자라니. 혼란스러워하는 소년이 혹하기에 충분한 카피 문구 아닌가. 그 나이에 레비나스를 제대로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 위안받기 시작했던 것 같다. 타인을 함부로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말아. 네가 보고 생각하는 게 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 대신 나도 너를 조심스럽게 대할게. 그렇게 남을 증오하지 않으면서 나를 지키는 방식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때 나의 축 하나가 세워졌다고 해야겠다.

그런가 하면,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축이 또 하나 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첫 선물다운 선물은 (기억이란 왜곡되기 마련이지만) 김연수의 단편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다. 나는 아직도 그 책 뒷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 일부를 종종 인용하곤 한다 :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권말 ‘작가의 말’ 중.)

그때쯤 레비나스 다음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사람은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데 말야, 세상에 다른 사람을 이해할만한 구석이라고는 존재하지를 않는데, 어떻게 그게 되지. 어떻게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지. 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고등학생 이후의 내 삶은 아무래도 이 두 축 사이의 길항─어쩌면 하나로 통하는 질문─으로 정리되는 것 같다. “타자를 진정으로 만날 수는 없어!” vs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노력한다면 닿지 않을까?”

それがナルトだ!!

만화 <나루토ナルト>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몇몇 에피소드/장면은 주기적으로 유투브에서 찾아보기까지 하는데, 나가토(페인pain) 에피소드가 그 중 하나다. 나가토는 꽤 잘 만들어진 악역이다. 그는 말한다. 세계는 증오로 가득차 있다. 압도적인 힘과 공포로 증오를 잠재우고, 억제력이 약해질 때쯤 다시 힘과 공포를 불러와야 한다. 그게 진정한 ‘평화’다. 당연히 우리의 나루토는 그런 게 무슨 평화냐고 반박한다.

그러나 나가토는 결투 중에 나루토를 제압해놓고 질문한다. 사람은 절대로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어.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같은 고통이 아니지. 그래서 세계는 전쟁을 반복하고 증오로 가득해졌어. 모두에게 압도적인 고통을 안겨 주는 나의 방식이 아니면, 어떻게 그 증오의 고리를 끊을 거지 나루토?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나루토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싸움은 재개되고 나루토는 결국 나가토를 이긴다. 그러나 이제 증오의 문제에 대답해야 할 차례다. 동료를 죽이고 마을을 폐허로 만든 나가토를 아무래도 용서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복수해버리면 증오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야말로 딜레마.

복수하는 대신에 나루토는, 스승 지라이야가 쓴 소설을 한 손에 들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 저주를 풀어주겠어. 평화라는 게 있다면 내가 그걸 찾아내겠어. 나는 포기하지 않아. 막무가내인듯 보이지만 (그래서 악역보다 논리가 부족하다고 욕을 먹는 대목이지만) 나름의 이유에 설득당해서 이 꼭지를 쓴다.

사실 저 대사는 스승의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그리고 스승 지라이야는 과거의 나가토에게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 (나가토는 나루토와 같은 스승을 둔 사형제다) 나가토는 확신에 가득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비뚤어져버린 것이다. 나루토 너는 대체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냐고, 네가 앞으로 어떤 아픔을 겪더라도 변하지 않을 수 있냐고 나가토는 묻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여기서 스승의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진다. 다름아닌 ‘나루토’! (설정상 나루토를 만나기 전에 쓴 소설이니까 동명의 제자를 만난 것은 우연/운명이다) 스승은 나루토가 이 주인공 ‘나루토’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증오의 고리를 깰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기의 의지이기도 한 그 소설책을 나루토에게 전달했다.

책을 손에 든 나루토는 나가토의 마지막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주인공이 변해버린다면 스승의 이야기도 달라지는 거다. 그건 ‘나루토’가 아니다. 어떤 아픔이 있더라도 걸어가겠다. 그게 바로 나루토다それがナルトだ!! (이걸 ‘나루토’라고 쓸지 나루토라고 쓸지 한참 고민했다)

내게는 이 선언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레비나스나 김연수와는 또다른 이야기다. 그게 바로 ‘파상’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무엇, 에 관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그렇게 중첩된다. 정말이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될/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음, 근데 이건 조금만 뒤로 미뤄야겠다. 그래서 도대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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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람의 눈이 안쪽으로 돌아가버리냐는 것이다. 생각건대 나는 언제부턴가 ‘나가토’처럼 걸어온 것 같다. 내 밖의 세계를 함부로 확신하지 않는 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튕겨나왔다. 그 긴장을 유지하기란 여간 일이 아니다.

나는 내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이따금 필요 이상으로 돌진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차갑고 무심하다. 그런 방식으로 일과 관계나 신념을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 실수들이 쌓이다 보면 그렇게 행동한 게 전부 내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매번 다른 원리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런 단절 혹은 무기력감이 종종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생각과는 다른 나를 발견할 때. 세계가 내가 생각하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깨달을 때. 그간 이것저것에 부여해온 의미가 무너질 때. 그래서 번번이 실패할 때, 실패해서 다시 일어설 힘이 나지 않을 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만 같고 세계에는 어떤 의미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고 만사가 부질없어진다. 그러다 자칫하면 눈이 안쪽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쓰기, 라는 싸움

사람이 이야기의 세계에서 산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사실 모든 것에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레비나스니 김연수니 나루토니 하기 전에, 세계는 그저 그대로, 그냥 그렇게, 거기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이야기는 없다. 그 세계를 언어로 정제하여 발화하는 순간 세계에는 의미가 씌워진다. 인물과 행위와 사건들이 별자리처럼 이어진다. 우리는 그 상像 을 바라보며 산다.

작가 김봉곤은 그래서 ‘쓰기’라는 지난한 싸움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데뷔작 ‘Auto’는 얼핏 정리되지 않은 파편같다. 1인칭 서술자 ‘나’가 실연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간 ‘나’의 세계에는 ‘사랑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아주 새로운 감정’이 찾아온다. 그리고 언뜻 상관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나열된다. 그러나 아주 단절되는 일은 없이, 은근슬쩍 연결되어 어떤 상을 만든다. 단절의 순간─자신에서든 세계로부터든─에서 김봉곤은, 썼다. ‘그래서 썼다’

이 글을 한 편의 이어진 글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보지만, 모든 것은 조각조각나버리고, 이음매는 그대로 드러나버린다. 왜 나는 이 글을 쓰려 했으며, 왜 이런 형태의 글을 쓰려 했는지 불가해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형식은 꼭 산문이어야만 했다. 내가 산문을 쓰겠다는 마음가짐은, 이 글을 산문으로 쓰리라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몹시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의 단절. 내가 시간의 단절, 이라는 어절을 쓰고 다음 문장이 이어지기까지의 공백을 알 수 없듯, 영화의 컷과 컷 사이 얼마나 많은 시간의 단절이 있을지 짐작할 수 없듯. 그러나 시공간의 틈은 매끄럽게 포장되고 이음매는 재단되어 이렇게 한 문장, 한 문단을 이룬다. 그 사이의 공백을, 거리를 아무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것을 모른다. 이 문장과 저 문장을 쓰기까지 몇 시간이, 며칠이 지났을지 짐작이 가능할까? 그 거리감과 공백을, 내가 느끼는 허탈감과 지독한 고독을 나는 모르듯, 나도 그의 것을 모르고, 당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지금을 나는 모른다는 사실은 나를 고통스럽게도 하지만, 어쩌면 이 문장은 또 매끄럽게 이어져 있고, 매끄럽게 읽히고, 우     리     는 가               끔              이  어  져    있    기도 하고, 당신은 이어주었고, 나도 다시금 힘을 내어 잇기를 계속한다. 나의 글쓰기만큼 내밀한 사랑을 당신이 이해해줄 수 있을까? 나의 사랑만큼 내밀한 글쓰기를 당신이 이해해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고, 시작되고, 어느 순간 이어져 있음을 기뻐하다 다시 끊어졌다, 이으려 하고, 우리는 이어질까?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나는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이어져 있었음을, 그 환희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하고 글을 쓴다. 그를 쓴다. 사랑하고 있음을, 이야기가 된다는 내밀한 확신에서 오는 희열을 나는 버리지 못하고, 그 어리석음, 단절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나는, 모든 것을 잇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 글을 쓴다. (김봉곤. ‘Auto’. “여름, 스피드”. 문학동네. 211-212p)

모든 것을 잇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 글을 쓴다. 두 번째 챕터의 부제는 ‘환상교차로’다. 유년의 향수부터 최근의 일들까지, ‘나’에 관한 이야기-파편들이, 어쩌면 불확실한 기억에서 나왔으므로 환상일 수도 있는 파편들이, 서로 접속하고 교차하고 이어진다. 그렇게 구구절절한 산문이 하나 완성된다. 원래의 세계가 무너진 다음, 혹은 써내야 할 ‘나’가 흐릿해진 다음, 그 다음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계기지가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사랑했던 이와 친구들과 어머니, 많은 타인들이 등장한다. 또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까지 말을 건다. 이어짐에 관한, 산문이라는 형식 자체로서의 메타포. 단절과 변화와 불확실성을 경험하면서도/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일. 쓺으로써 위로받는/하는 일. 끊어져 있는/가는 것들을 이어붙이는 일. 자아와 세계를 향한 사랑-글쓰기. 그래서 ‘나’ 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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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있다. 애당초 ‘나’는 타자-세계와 분리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조심조심 줄타기를 할 일이 아니다. 이미, 그냥 거기에, 애초부터, 우리는 서로 겹쳐 있다. 내 이야기에는 내가 생각했던 나와 내 부모님과 동료들과, … 또 그들의 이야기 속에 내가, 그들 자신이, 그들의 사람들이, … 우리는 모두 어떤 이야기 속의 ‘나루토’다.

그래, 나루토가 포기해버리면 ‘나루토’의 이야기가 달라져버리듯이, 그 ‘나루토’가 그 ‘나루토’가 아니게 되듯이,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와 겹쳐 있다. 그러나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 속에 먼저 확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김봉곤의 ‘나’처럼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이다. 이야기는 양날의 검이어서, 계속해서 매달리고 퇴고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나가토’의 이야기처럼 된다. ‘사랑하다가 헤어졌다가 또다시 사랑하겠지’ 라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나’가, 그게 꼭 합평을 하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쓰고 읽고 합평하고 퇴고할 수 있는 이야기-세계에서, 이야기-‘나’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은 내게 너무나도 중요하다. 반복되는 단절과 의심에 지쳐서 눈을 안쪽으로 돌려버린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헤라자데다. 또 세헤라자데가 되는 일이다. 이야기 속에서 나와 내가 이어지고 너와 내가 이어진다. 세계가 별자리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야기는 증식한다. 천일의 밤 각각이 천일의 밤을 낳고 다시 천 곱하기 천일의 밤이 각각 천일의 밤을 낳고, … 그 모든 밤들은 저마다 다르고 만날 수 없는 것 같지만, 별자리처럼 어딘가에서 이어진다. 나는 그런 픽션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happy birthday to me

각자와 각자가 사는 거면 철학이 뭐가 중요하단 거니. 이 밤과 저 밤이 다른 거면 우린 왜 모여 사는 거니. 이 도시의 별 없이 밝은 밤이 밝혀주는 건 도대체 뭐니. 그러니까 각자와 각자가 살아도 철학이 꼭 중요하기를. 이 밤과 저 밤이 달라도 우리는 정말 우리이기를. (우원재, <또>의 가사 中)

이해할 수 없어서, 이해할 수 없더라도, 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쓰는 나날들을, 걸어가려 한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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