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를 생각합니다. 그의 “수태고지”, 즉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예수의 잉태를 고지받은 사건에서 우리는 어떤 마리아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복음서의 증언으로부터 흔히 상상되는 마리아는 예수의 잉태로 인해 크게 기뻐하는 여인입니다. 또 교회의 전승과 후대에 <수태고지>라는 제목으로 그려진 예술작품들은 그 여인을 지적이며 활기 넘치고, 반가운 마음으로 가브리엘의 영보榮報를 받은 이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빈치의 그림은 이런 상상력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 빈치, 레오나르도. 수태고지Annunciazione, 1472-1475. 패널 위에 템페라와 유채.
(출처: 위키피디아)

그의 <수태고지>에서 마리아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석조 건물 앞에서 우아하게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여성으로 묘사된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평안의 인사를 전하고, 마리아는 그 인사를 기품 있게 받고 있지요. 마리아에게 입혀진 푸른 천은 그의 고귀함을 의미합니다. 가장 화려하고 희소한 안료를 통해 마리아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 그림은 또한 마리아를 꽤나 나이 있는 여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빈치가 반영하는 마리아는 20대의 교양 있는 귀족 여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전승 및 역사적 검토를 통해 상상되는 마리아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살아간 역사적 배경이 남겨두는 실마리들은 이렇습니다. 마리아는 로마 식민지배 하의 팔레스타인에 살아가는 식민지 여성이었습니다. 이 여성들은 로마군에 의한 성폭행 범쥐 취약 집단이었던 탓에 당시에는 10대 중반에 결혼을 시키는 조혼 풍습이 성행했습니다. 또 그녀는 이미 사회생활 중에 있는 노동자 남성과 약혼 관계였구요. 당시 노동자는 계층적으로 자유노예이거나 노예보다는 높지만 학식을 가질 여유가 없는 평민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역사적 마리아”의 몇 이미지를 구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10대 초중반이었을 것입니다. 성관계 경험이 없던 채 예수를 잉태했다는 증언은 그가 요셉과 한 결혼이 초혼이었음을 보여주며, 그렇다면 그녀는 다른 여성들처럼 10대 중반에 결혼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 열 세 살이었다는 비공식적인 초기의 문서도 이러한 관점을 지지합니다. 한편 그의 남편 요셉은 목수인 것으로 보아 육체노동에 종사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유사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그 또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계층에 속했을 것이므로, 시대상에 따라 마리아는 교양 있는 글을 읽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임신 사실을 깨달은 마리아가 다 빈치의 그림과 같이 반응했을 리 없습니다. 역사 속 마리아는는 책을 읽지도 못했을 것이고, 푸른 드레스는 본 적도 없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이 또한 20대가 아닌 10대 초반이었을 것이구요. 한편 당시 여성의 간통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잘못으로 여겨졌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이구요. 즉 우리가 역사적 고찰로부터 상상해야 할 마리아는 10대 초반의,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유대계 소녀입니다. 로제티의 그림은 이 상상력에 조금 더 부합하는 듯합니다:

로제티, 단테 가브리엘. 수태고지Ecce Ancilla Domini, 1850. 캔버스에 유채.
(출처: 위키피디아)

로제티의 <수태고지>는 다 빈치와는 천사의 모습에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그는 전승에 따라 천사를 중성적 이미지로 그리고 있지요. 자신의 잉태 소식을 듣는 마리아의 표정은 굳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중성적인 이질적 타자에 대한 거부감이, 다른 편으로는 자신의 임신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임신 사실에 대한 두려움은 다시 두 종류의 두려움으로 나뉘겠지요. 하나는, “내가 돌에 맞아 죽지는 않을까?”, 다른 하나는, “내가 이 아이를 잘 기를 수 있을까?”


우리가 상상하는 성모의 모습을 다시 그려 봅니다. 루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마리아 찬가’라는 제목의 노래를 전합니다. 이는 마리아가 그의 친구 엘리사벳을 만나 부른 찬양으로 전해집니다. 성서가 마리아의 반응에 대한 올바른 전거였다면, 그는 당장 죽을지 모르는 위기 가운데에서, 또한 수탈당하는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이렇게 노래했던 셈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루가의 복음서, 1장 46-49a절, <공동번역성서>

어떻게 이러한 노래가 가능한가,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한편으로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함에 따라 생존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의 임신이 알려질 경우 간통으로 몰려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편으로 마리아는 메시아를 키울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메시아답게” 키울 수 있을 것인지도 문제거니와 정말로 이 아이가 메시아가 맞는지 역시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겠지요. 자신이 져야 하는 짐보다도 큰 짐을 지게 된 마리아, 그럼에도 그는 낙관하며 노래했습니다. 아마도 이어지는 노랫말에서 이 노래가 가능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의 복음서, 1장 49b-53절, <공동번역성서>

즉 그는 세계에 대한 “주님”의 영도가 미천한 자들을 구원하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 근거는 이전에 일어났던 전복의 사건들입니다. “내가 보아하니 교만하고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은 몰락하고, 가난하고 겸손하며 보잘것없는 이들은 높아지더라!” 이것으로부터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나의 신세를 높이실 것이다!”로 마리아의 믿음이 나아갑니다.

이러한 발전을 위해서는 “주님”에 관한 적어도 두가지 전제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전에 일어난 전복의 사건이 ‘주님’으로 불리우는 어떤 주체에 의해 능동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즉 전복은 우연히 부작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라는 의미부여가 선제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주님”은 일관되게 행동한다는 믿음입니다. 그가 변덕스러운 행위자라면 이전에 교만한 자들을 몰락시켰더라도 이번에 역시 그러리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러한 “주님”에 관한 두 전제를 두고 “인격적”, 그리고 “신실함”의 두 속성으로 부릅니다. 인격적-모델은 신적 존재에 의한 사건들이 진지한 목적 가운데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신실함-모델은 신적 존재는 일관되게 행위함을 의미합니다. 이 두 모델로부터 마리아는 이전에 일어난 어떤 사실을 ‘주님이 행하신 것’으로 간주함에 따라 이후의 자기 처지를 높일 “주님”을 상상하는 낙관적 태도로 나아갔던 것이지요.

어두운 현실 속에서 낙관하는 마리아를 생각합니다. 엄격한 회의주의자는 마리아에게 “당신이 믿는 그 믿음은 아무런 근거 없는 독단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믿음은 뭔가 인식론적으로 정당하게 형성된 믿음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그럼에도 마리아는 믿었고, 아마도 이 믿음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의 진술은 “독단적 믿음”이 세계에 미치는 힘에 관해 상상하게끔 합니다. 성서는 마리아에게서 나온 아이가 감히 세계를 구원한다고 불리우는 메시아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메시아의 생애의 첫 자국에 마리아의 노래가 있습니다. 마리아 이야기는 낙관을 통해 메시아가 태어나는 하나의 긴 줄기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의 모범으로 마리아의 태도를 참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자신이 구원의 씨앗을 품고 있음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부터 미래를 낙관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그가 품은 씨앗은 자라나 기적을 일으키고 민중을 치유하는 메시아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비유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꼭 태 속에 있는 아기가 아니더라도, 모든 방식으로 품는 낙관적 기대는 그것을 믿고 행동함에 따라 현실이 된다는 교훈을 수태고지 이야기는 담고 있는 셈입니다.

꼭 그리스도인이어야만 마리아를 참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실재론자는 마리아의 낙관적 태도를 닮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정의로운 신의 권능이 그렇다고 생각했듯, 실재론자들은 일관된 법칙이나 객관적인 사태들, 우리와 관계하는 존재자들이 정말로 세계에 작용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믿음을 흔드는 것은 회의주의적인 반실재론의 반박입니다. 어떻게 법칙이 “발견”될 수 있으며, 사태가 객관적일 수 있고, 존재자들이 실재하는지를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들의 존재 양식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가지적이지 않은가요?

회의주의 이후의 실재론자들은 한 발 물러서서 답합니다. 확실한 실재, 라는 것은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재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가질 수는 있습니다. 말하자면 불확실함 속에서 갖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은 만연한 불확실함을 잠시 제거한 채 적용되는, 그러한 확신일 것이구요. 실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그런 확신을 요구하는 듯합니다. 어떤 확신도 없이 불확실함을 잔뜩 의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을 것이니까요.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낙관이 요구됩니다.

더 나아가 실재론자로서 갖는 하나의 낙관은 이렇습니다. 확신 가운데에서 어떤 실재를 믿을 때, 그 믿음은 자라나 하나의 분명한 실재를 이룰 수 있지 않을지. 이러한 낙관 속에서 마리아를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가 품는 실재의, 사실의, 법칙의 이미지가, 낙관한 마리아가 품은 그리스도가 그러했듯, 하나의 진리로서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들과 함께 성탄을 맞습니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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