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타계한 마광수 교수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그의 <연극이란 무엇인가> 수업을 수강한 것은, 청강 없는, 수강을 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당신께서 건강을 문제로 수업을 열지 않으셨으니 그의 수업을 들은 마지막 세대가 나의 동기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랑할 일인지 부끄러운 일인지 나는 A+학점을 받았었지요. 그 수업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과제는 공식적으로는 ‘로맨스 소설 쓰기’로 일컬어졌던 사실상 “야설 쓰기” 과제였습니다. (전자가 데 유레라면 후자가 데 팍토겠지요.) A+를 받게 한 나의 과제는, 당신께서 죽기 직전 당신의 자아와 자기애적이라고 할지, 동성애적이라고 할지, 그런 류의 사랑 관계를 맺는다는, 여튼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기말 과제를 준비하던 중에 A+를 받았다고 하던 지인에게 연락해 무슨 내용을 썼냐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습게도 그가 쓴 “로맨스 소설”의 내용은 기억이 안 나네요. 대신 제출해야 하는 세 가지 과제 중 하나인, 교과서 비평의 내용은 기억이 납니다. 그는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타로카드와 연관하여 비평했다는 모양이었습니다. 이 즈음에서 <지평>의 저자들끼리나 술자리 중 꺼낼 말을 꺼내게 됩니다: “그의 비평이 도무지 타당한 비평일 수 있었겠는가?”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가 타로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저자에게 A+를 받았으니 도무지 타당한 비평이 아니라고 할 수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또 묻게 됩니다. 무엇이 타당한 비평인가? 어떻게 우리는 비평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일까?


어젯밤 술잔을 기울이다 친구에게 타로점을 봐 주었습니다. 연말연시마다 동료들의 점을 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혹자는 미신을 거부하는 물리주의자이며 하나의 운명적 법칙만을 인정하는 유일신론자이자, 어쩌면 그 둘의 종합인 그리스도인인 내가 타로점을 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글쎄, 라고 나는 답합니다. 점괘가 정말 어떤 현실을 반영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그저 한번 슥, 본 뒤 적당히 의미부여를 하는 것 아닐까요. 식전기도를 한다든지, 똑바로 누워 잔다든지, 베이스의 줄은 3-1-4-2현 순서로 교체한다든지 하는 의례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출석을 부르는 것도, 성체를 먼저 영하는 것도, 영하기 위해 줄을 설 때 합장을 하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것 안 한다고 하늘에서 번개라도 치는 것일까요. 어쩌면 여기에도 사실-법칙의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제출했던 그 과제, 야설이랄지 호러랄지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나의 그 소설이 제출됨에 따라 그것은 로맨스 소설이 된 것일까요. 사실상 나의 소설이 예화하는 속성은 <야설임>이었겠습니다만, 학교라는 맥락이 그것을 <로맨스 소설임>을 예화하는 것으로 정당화한 것이었을까요. 도무지 그런 것이 가능한가, 이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어쩌면 “로맨스 소설”이라는 이름으로도 교수가 의도하기만 한다면 어떤 삼류 소설을 일컬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도넬란이 말했듯 저 사람의 잔에 샴페인이 아닌 데미소다가 들어있었어도 나는 ‘샴페인 든 저 사람’으로 그를 부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세상에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무엇이 타로 점을 맞게 만드는 것일까. 한 친구는 나의 애매한 점괘 해설을 두고 “너무 뜬구름잡는소린데”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이해한대로 이 말이 점괘를 더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행하고 있다면 그의 전제에는 “점괘 해설은 어느 정도 명확해야 한다”가 숨겨져 있을 터입니다. 그런가요, 과연 점괘라는 것이 명확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명확한 점이야말로 의미없을런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명확한 점이라면 기껏해야 그것은 하나의 사실일 텐데, 사실로부터는 아무런 심오한 진리도 나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정말 심오한, 이른바 “법칙”이라고 불리는 그것들은 개별 사실들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법이지요. (이 “법”은 누가 정했을까요?)

사실과 법칙의 문제를 다시 만나 버렸군요. 갑작스럽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습니다. 내가 여기까지의 흐름을 모두 계획했겠거니, 하고 지평의 두 동료는 체념 내지 으레 하는 그런 평가를 할 테니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타로점을 보다 문득 생긴 회의감이 마광수에게 A+를 받은 그 과제를, 그리고 그 과제가 마광수를, 마광수가 이 글의 첫 문장을 쓰게 했다고, 그리고 그 문장으로부터 지금 이 문장 “타로점을 보다 문득 생긴 회의감이 마광수에게 A+를 받은 그 과제를, 그리고 그 과제가 마광수를, 마광수가 이 글의 첫 문장을 쓰게 했다고, 그리고 그 문장으로부터 지금 이 문장 “❏”를 쓰게 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나의 말을 믿어줄까요”를 쓰게 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나의 말을 믿어줄까요.


다시 교수를 생각해 봅니다. 방학 때 나와 친구들은 A+이니 B+이니 D-이니 하는 글자들을 가지고 서로의 과제가 좋았느니 안 좋았느니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정말 이 글자들이 우리 과제의 “좋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정말로 마 교수가 선풍기에 과제를 날려서 우리를 평가한 것 아니었을까, 그 많은 학생들의 소설을 읽을 수나 있는 것일까, 하며 여러 도시전설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학자로서 마 교수가 정말로 우리의 글을 꼼꼼히 평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글쎄, 알 수 있을까요. 실제로 교수가 편의에 따라 매 학기 성적 평가를 다르게 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요. 어쩌면 그저 학점을 주어서 마 교수는 나로 하여금 “그래도 내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 아니려나요. 사실상 나의 과제는 의미있다기엔 나와 마 교수, 단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상자 속 딱정벌레와 같은 그런 무의미한 물건은 아니었을까요. 다시, 나는 왜 “사실상”과 “의미”를 함께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다시 사실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일까요.

아주 최근에 알게 된 동료와 수업 하나를 함께 듣고 있습니다. 사실 수업 초에 그는 나의 동료는 아니었고, 그냥 “어떤 사람” 한 명이었습니다만, 어쩌다 보니 동료가 되고 말았네요. 어쩌면 이 또한 법칙의 문제로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런 법칙이 실제로 있기나 한 것일까요. 여튼간 그가 세미나 막바지에 기말발표로 냈던 주제가 생각납니다. 그는 <도덕적 운Moral Luck>이라는 개념을 발제했는데, 그 운인즉슨 우리가 어떤 상황에 우연히 처해있어서 도덕적이라거나, 비도덕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그런 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앞에 걸인이 없다면 나는 적선과 측은지심의 의무를 지지 않았을 터이고, 나 이외에 사람이 없다면 내가 도덕적으로 행동할 의무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글쎄요, 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무는 범주적이어야 한다고, 가설적이지 않은 의무만이 의무라고 하지 않으려나요. 도덕적 운은 단지 사실의 문제 아니려나요. 사실에 좋고 그르고가 있나요. 이렇게 말하면 푸코나 아감벤은 펄펄 뛰며 화를 내겠지요.


또 하나의 동료를 떠올려 봅니다. 어쩌면 내가 대학에서 알게 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인 M이 언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한 적은 과거의 대상일까요, 현재에도 존속하는 대상일까요?) “좋은 논문은 어떻게 쓰는 걸까.” 나는 으레 사용하는 그 거만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자들이 좋다고 인정하면 좋은 논문 아니겠냐.”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모든 좋은 비평이, 좋은 논문이, 좋은 설교가 단순히 사람들에게 인정받음에 따라 좋아지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어떤 법칙이, 규칙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왜 다시 법칙과 사실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일까요. 나는 왜 방금 ‘법칙’과 ‘사실’의 순서를 왜 바꾸어 말한 것이었을까요. 여기에 도무지 설명력 가진 “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냥 우연의 문제, 일의성의 문제 뭐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왜 여기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그저 현학적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광수 교수는 현학적 자위행위야말로 인간적이라고 했을 법한 위인입니다만, 나는 과연 그런 답에 고개를 끄덕일 만한 사람일까요. 나는 여전히 법칙을 찾고 있고, 단지 사실만인 세계에는 못 살겠다고 할 그런 사람입니다.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겠죠. 파상은 그런 법칙이 그저 유용함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지, 그게 실제로 그런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할 것이고, 단현은 그 법칙이 아닌 그 법칙에 관한 어떤 개념이 공동체의 사실로 있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들이 그렇게 말하리라는 것도 내가 그들에게 부과한 어떤 법칙에 의한 것 아닐까요. 역시 그래서 오해가 가능하려나요. 나는 지금 어떤 함정에 빠진 것일까요.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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