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지난 글 ‘함정인 것 같긴 하지만‘에서 이렇게 글을 열었다.

      비평의 문제들 ─ “문학비평을 왜 하는가?” 혹은 “문학비평의 책무/목적은 (있다면) 무엇인가?” “문학비평에 ‘좋음’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이렇게 글을 닫았다.

      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답변은 비평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확정적인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질문을 확정할 수 있다. 생각건대 다음 물음, 더 본질적인 물음은 문학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좋은 문학비평은 무엇인가’를 제대로 묻기 위하여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음 질문으로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글 ‘참 어려운 일입니다‘에서 랑시에르를 빌려왔다.

      그러므로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사람들의 감각적 일치와 불일치의 구획이 문학에서 드러남을, 그리고 문학이 그 구획과 관계들 속에 정치적으로 개입함을 의미한다. 미학적 실천은 항상 질문하며,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의 관계에 뛰어드는 ‘행동 방식들manieres de faire’이다. 미학(문학)은 그래서 정치다.

   그러면 이제 ‘좋은 문학비평은 무엇인가’를 다시 물을 차례다. 랑시에르를 따른다면, 좋은 문학비평이란 문학에서 드러나고 있는 감각적 일치consensus의 구획을 더 선연하게 조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박민정의 ‘세실, 주희’를 그런 식으로 비평해본 것이다.

 

2.

   그러나 사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 가지로 나누어야 했다. 첫째, ‘문학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 둘째, ‘가능하다면 어떻게 정의되는가.’ 전자를 빠트렸기 때문에 내내 찝찝했던 것이다.

   나는 ‘비평 함수’같은 것에 매료된 셈이다. 텍스트가 아무리 특수해도 함수에다 집어넣으면 비평이 되어 나오는, 뭐 그런. 이를테면 텍스트를 읽는 보편적 방법과 관점이 있어서 대상 범주의 자의성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아야 했다. 랑시에르가 재밌어보였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문학은 내재적으로 정치다. 그러면 문학 비평은 정치적인 담론을 ‘항상’ ‘직접’ 겨냥할 수 있다는 얘기잖아. ‘와 멋있다!’

   아니, 그런 마스터 키는 없다. 비평은 함수같은 게 아니다. 랑시에르의 예에서처럼 함수는 항상 정의역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앞서서 해결되어야 할 문학 개념의 정의가능성을 건너뛰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질문들을 혼동하거나 생략하고 있었다.

   생각건대 문학이라는 개념은 정의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다. 확정된 경계는 아니지만, 어떤 범주를 분명히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의 필요조건―혹은 본질―같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A, B, C, … 등등의 유한한 원소로 이루어진 성질 집합이 필요조건으로서 문학을 정의한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중 하나가 빠진 것이 문학이라고 불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문학은 X다! 라는 선언은 항상 반박 불가능한 반례를 만난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이런 문제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이론’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문학 가족’이 있다 하자. 이 가족의 사람들은 물론 서로 닮았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유한한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주먹코와 반달눈, 두가지 요소를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똑같이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들을 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 정도가 최선이다. 문학에는 공통 본질이 없다. 단지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건 나름대로의 문학 범주를 형성해서, 문학에 관한 담론이 가능할 최소한의 여지를 만든다. 더 풍부한 논의를 위해서는 테리 이글턴이 그의 글(‘문학 이벤트’. 김성균 역. 우물이 있는 집)에서 취하는 방식처럼, 문학을 정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간의 주장들에 하나하나 반례를 붙이면 된다.

   언뜻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해법같지만, 나는 이런 정의불가능성이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로 빠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가(비트겐슈타인이) 『철학탐구들』에서 질문하듯이, 희미한 인물사진은 인물사진이 전혀 아닐까? 우리가 태양과 우리의 간격을 밀리미터 단위로까지 측정할 필요가 있을까? ‘대략 그곳 어디쯤에 서있어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까? 정확한 경계선이 표시되지 않은 농지는 농지가 전혀 아닐까? 그러니까 개념의 모호함이 때때로 정확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이글턴, 61)

 

3.

   생각건대 아무리 문학을 정의할 수 없다고 해도 문학이라는 개념이 ‘무한퇴행’해서 결국 실재하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신성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공통점은 있다 ; 문학은 어떻게든 존재자(존재하는 것들)와 그들의 연관을 드러낸다. 이건 정말이지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그래서 문학의 ‘본질’ 혹은 정의소素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럴듯한 영점을 확보해 준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언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유니콘이나 리바이어던같은 비현실적 존재자들도 어쨌든 인간의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니까. 굉장히 넓고 무책임한 생각이지만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의 최대치는 존재하는 것들 뿐이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들을 떠올려낸다고 한들 그것은 이미 존재자가 된 후에나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허구의 문제는 ‘존재론적’으로는 중요할 수 있으나 문학의 권리문제de juris, 그리고 문학이 생산하는 담론들/문학비평의 권리문제와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 허구는 언제나,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관념이다)

   그 존재자들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연관한다. 나는 다른 어떤 것과도 연관하지 않는 하나의 주체가 혼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 그런 존재방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하더라도 언술불가능할 것이다(혹은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야기에 현실적/실체적인 주체가 오직 하나만 있더라도, 하다못해 그것은 관념들과 연관한다. 아무리 추상적 해체적 경향의 시 작품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는 관념, 개념, 혹은 이름, 무엇이든, 복수의 것들이 상호연관하고 있다.

   물론 이건 문학만의 특질이 아니다. 여타 인간의 사유와 행동 일체, 혹은 심지어 세계 전체가 가지는 특질이다. 세계는 실체로든 관념으로든 존재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며(아직 존재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기존의 존재자들을 연관시켜 언제든지 존재하게끔 할 수 있는, 혹은 그런 의미에서 이미 존재자-가능태인 것들―상상력과 허구, 그 세계의 개연성은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오롯이 혼자서 그 근거와 내용과 형식을 완결하는 존재는 없다. (여담 : 그런 ‘축’이 없더라도 사유는 가능하다―수학의 dynamic modeling에서 자주 등장하는 변수 정의의 recursive form과 관련하여 언젠가 다루고 싶은 주제기도 하다)

   문학과 세계 간의 관계같은 건 없다. 둘은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다. 문학이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학은 이미 세계의 존재방식, 혹은 세계가 주체에게 드러나는 방식 중 하나다. 세계는 언술하거나 인식하는 순간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애초에 세계를 전체로서 ‘한꺼번에 그대로’ 만날 수 없다. 언제나 선택과 초점화가 따라온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대하는 주체는 항상 편집자다. 작가 또한,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혹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자들을―개념과 그들의 연관들을―절취하고 재조립하는 편집자다.

   그래서 이는 문학을 한정짓지 않으면서도 약한 방식으로나마 문학을 설명한다. 문학은 X다, 라는 정의는 불가능하지만 문학은 이러저러하다, 라는 기술은 가능하다. 물론 다른 범주들과 ‘문학’을 구분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않는, 하나마나한 작업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비평의 가능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4.

   애초의 목표는 ‘좋은 문학비평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 ‘문학은 무엇인가’를 물었으나, 문학을 정의할 수 없다는 답을 얻었다. 그러나 비평을 묻는 일은 아직 가능하다. 대신 ‘문학비평’이라는 말을 다시 물어야 한다. ‘문학비평’이라는 확정적인 실체는 없다. ‘문학’이 확정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특히 다루는 비평의 한 불확정적인 범주가 있을 뿐이다. ‘문학’비평이라는 말에는 아쉽게도 관습/제도적인 의미 이상은 없다.

   다만 문학에는 언제나, 세계 자체와 마찬가지로, 존재자들이 있고 그들이 연관한다. 그리고 거기서 개념이나 의미가 발생한다. 비평은 ‘문학’이라는 불확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든 거기서 발생하고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비평을 묻기 위해 대상의 본질이나 범주를 확정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학은 그 개념이 불확정적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 자체와 다름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문학비평은 문학이라는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실 세계를 직격하는 일이다.

   요약건대 문학 혹은 이야기의 내용은 결국 세계의 내용이다. 비평은 대상 자체의 개념이 아니라 내용―물론 이 내용 또한 존재자들과 그 연관에서 발생하는 개념들일테지만―을 대상으로 하며, 그래서 대상 자체의 개념/범주가 불확정적이라 할지라도 비평의 가능성은 확보된다.

   물론 그것이 ‘좋은 비평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바로 내놓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물음을 일단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비평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앞선 단락들에서 이미 확보했으므로 재론하지 않겠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비평의 기본적인 책무 같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 비평은 우선 대상 텍스트(문학이든 뭐든)에서 드러나는 존재자들과 그들의 연관 방식을,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개념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잘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텍스트는 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세계와 모든 면에서 일대일 대응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그 텍스트에서 초점화하는 세계의 부분을 읽어내되 텍스트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억지로 대상삼아서는 안된다.

   그 다음은 그것들을 판단하는 일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개념들―혹은 그것의 자기강화나 충돌―이 ‘정당한가’를 묻는다. 이때 비평가는 대상텍스트를 넘어선다. 그는 비록 텍스트의 내용에서 출발했으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과 연관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를 수단으로 삼아 자기 할 말을 하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텍스트는 세계와 독립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개념’이란 참 사소한 말이 된다. 애초에 인간이 개념이 아닌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 개인적인 감각이나 언술할 수 없는 순수한 경험들은 오류의 가능성을 안고 있을지언정 어떻게든 개념이 되어 주체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비평의 대상이 ‘개념’이라는 말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중요하지만 그 이상의 진전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수학적 trivial에 해당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비평이 ‘개념과 그들의 연관’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비평의 ‘좋음’이 있다면 비평의 주체가 범람하는 대상들(텍스트들) 사이에서 굳이 하나를 선택하는 이유와 연관한다. 왜 하필 이 이야기를 비평하는가. 왜 하필 세계의 그것을 문제삼는가. 비평의 대상 자체보다는 ‘왜 하필 그것을 문제삼았는지’가 비평의 요체를 이룬다. 이때 비평은 세계에 대한 능동적인 반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텍스트라는 우회로를 거쳤더라도 비평은 그 텍스트의 선택을 통해 세계를 직격한다. 텍스트라는 우회로가 비평의 유일한 선택지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말로는 세계 자체가 거대한 텍스트이며 그것을 언술/편집한 개별 텍스트들을 다루는 일은 세계 전체를 다루는 일과 애초에 같은 걸지도 모른다.

 

5.
   비평의 의의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비평의 대상은(문학은, 혹은 텍스트는)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세계의 파편들이다. 이는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비평은 그 파편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제 발로 오르는 일이며 그래서 세계 쪽으로 나아가 대면하는 일이다. 세계 전체의 거대함에 질식하지 않을 수 있으며, 파편들에 굳게 발을 디디면서도 파편이 아니라 세계를 치열하게 겨냥하는 일 또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비평의 좋음이라는 단어는 별 의미가 없다. 물론 대상에서 실제로 드러나고 있는 것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비평이 있을 수 있다. 그건 덜 좋은 비평이 아니라 틀린 비평이다. 비평의 좋음은 기껏해야 그 다음 과정에 기준이 걸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벌써 세계가 있다. ‘어떤 비평이 좋은 비평이냐’라는 물음은 차라리, ‘지금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6.

   결론은 사실 이런 거다―”복잡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열심히 읽고 써라!” 정말이지 하나마나 한 이야기다. 그러나 하나마나 한 이야기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때 고민은 산으로 간다. 그간 내게는 한꺼번에, 그리고 한달음에 전체를 직격하려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정말이지 좋은 비평의 자세가 아니었지 싶다.

   이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우직하게 비평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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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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