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적 열망

형이상학적 열망, 이라는 말이 있다. 누가 처음 사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영어권에 동일한 표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특정한 하나의 진영에서만 독점하는 표현은 아니다. 하이데거 연구자인 소광희도, 비트겐슈타인 연구자 김영건도, 한국 분석철학 1세대 정대현도 동일한 표현을 공유한다. 몇 신학자와 종교적 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그 열망의 대상인가? 김영건이 <맞음과 확실성>에 대한 서평에서 말하기론 이렇다: “모든 것들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전체적 원리.” 정대현은 그에게 답론하며 형이상학적 열망이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존재의 뿌리에 닿고자 하는 소망.” 

철학적 논쟁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사실 어느 정도 역사를 갖고 옹호된 체계는(예컨대, 진리에 대한 실재론과 반실재론 입장) 논점선취를 하지 않고서는 쉽게 반박할 수 없다. 오늘날 가능한 대부분의 입장은 충분히 발전되었으며, 따라서 단순히 하나의 체계를 그것의 정합성에 근거하여 비판하기란 불가능해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왜 아직도 논쟁을 해야 하는가? 단순히 철학은 규약의 문제나, 공허한 문제로 떨어지지 않는가? 전자는 실용주의자 및 해체주의자의 생각이고, 후자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동일한 회의주의가 반복된다. 문헌이 잘 전해지지는 않지만, 소피스트들 또한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것 아닐까?

그런데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회의주의를 거부한다. 하나의 답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정당화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회의주의만큼은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형이상학적 열망”이 그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하나의 단일한 세계에 현실세계를 착륙시키고자 한다. 우리 모두의 세계가 다르다는 유아론적 입장 또는 우리가 어떤 세계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관념론적 입장은 우리의 형이상학적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두 입장이 거부된다.

철학사적 고찰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수행하는 논변도 이와 같다. 우리는 아주 상식적인 차원에서 “나 이외에도 사람들이 있다,” “세계가 존재한다,” “1+1=2이다,” “나는 세계를 직접지각한다”와 같은 진술이 참된 명제를 지시한다고 여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어떤 일상적 작업도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명제들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축hinge의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칸트의 선험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시공간이나 수량, 질적 차이 등은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하느님과 영혼, 자유의지의 존재 등은 선험적으로 요청된다. 그러한 선험적 사실이 부정된다면 우리는 과학적, 도덕적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그 선험적 명제들을 종합하여서 도출되는 사실들이 철학적 사실이다, 라고 칸트는 말한다.

이렇듯 “선험적 사실”은 형이상학적 “뿌리”의 유력한 후보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로부터 단일한 하나의 그림을 그리길 원한다. 왜 그런 그림을 그리길 원하는가? 다시 돌아가서, 형이상학적 열망 때문이다. 왜 그 열망이 있는가? 우리는 내재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이미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진 믿음으로서, 우리가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순환이 일어난다. 형이상학적 열망은 선험적 사실의 가능성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어떤 선험적 사실이 형이상학적 열망을 추동한다. 형이상학적 열망은 그림그리기로 완성되는데, 그림을 그리는 일은 선험적 사실들의 종합으로 가능하다.

과연 선험적 사실은 현실세계의 사실인 것일까? 흄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세계 속에서 자연적 사실 외에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을 단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크립켄슈타인의 지적처럼 우리는 더하기 연산이 “커하기” 연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만한 사실을 갖고 있지 않다. 현실세계 안에서 선험적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발견된다면 그것은 이미 선험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만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험적 지식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누군가는 선험적 사실이 본유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이는 선험적 사실이란 없고 모든 것이 경험적이라고 주장한다. 근대철학사에 기록된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의 논쟁이 여기에서 기인했다.

두 주장은 모두 문제를 갖는다. 이성주의자들의 논점을 따라가자면, 신생아 또한 덧셈과 문법에 관한 지식 내지 본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본유 관념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덧셈과 문법을 공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있으며, 그 어려움의 이유는 태교나 영아교육의 부족에 기인함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선험적 사실에 대한 관념은 본유적일 수 없다. 경험주의자들의 논점에도 흠결이 없지 않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선험적 지식은 증언에 의해 획득된 지식이다. 그러나 증언에 의한 지식이 정당화되려면 그 증언자는 납득할 만한 인과적 고리의 일부여야 한다. 결국 최초의 한 시기에 선험적 명제가 정당화되었어야만 나의 선험적 믿음은 정당화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경험주의적 후보가 규약주의이다. 콰인을 비롯하여, 이 입장에 분류될 수 있는 이들은 모든 선험적 지식이 경험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의 정당화는 공동체의 규약에 따른다고 생각한다. 왜 어떤 문법적 지식이 참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가? 언어 공동체가 그 문법 규칙을 승인하거나 거부했기 때문이다. 왜 번역의 불확정성이 발견되는가? 서로 다른 언어 공동체는 다른 규약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두 규약의 존재론적 동일성은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분석적 명제란 있을 수 없는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험적인 것과 동어반복적인 것이 아니고서는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대물 양상이 부조리한가? 언어 밖에서 이미 지시되는 대상이 있다는 생각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반으로 쪼개지는 트롤리

규약주의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규약주의적 입장은 회의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독자적인 하나의 자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규약이야말로 우리의 언어 사용으로부터 선험적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외연적인 방식으로만 언어 사용 양태를 관찰한다면 그 언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가 없다. <세실, 주희>에서 주희가 세실을 보며 느낀 “언어적 권력”의 요점이 여기에 있다. 중국어 방 안에 들어 있는 써얼이 결코 중국어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도 이와 같다. 따라서 단순히 언어 사용 양태로만 알아낸 그 “규약”에 대해 우리는 정당화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언어 사용자 집단은 동일한 규약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따라서 규약주의의 한 노선은 회의주의적 귀결로 나아간다.

다른 측면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적 노선을 따르면 절대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그와 유사한 노선을 채택하는 이들은 언어의 양태 자체는 규약적이지만, 1) 우리의 삶의 양식이란 공유되는 것이며 2) 다른 언어 공동체 혹은 언어 비사용자와도 모종의 소통을 이룰 수 있으므로, 규약주의가 형이상학적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볼 때, 콰인이 지적한 번역의 불확정성이 발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믿음은 동일한 진리 내용을 갖는 믿음을 함축할 것이므로, 서로 다른 두 존재론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의 의미 이론이 이러한 노선을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이다. 결국 세계에는 하나의 존재론만이 구현된다. 그렇다면 세계 그림은 상대적이지 않다. 따라서 절대주의이다.

규약주의적 입장은 상대주의의 귀결인 회의주의와, 정당화될 수 없는 믿음인 절대주의 사이에 적절한 믿음의 토대를 두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노선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규약주의는 그러한 토대가 되기 어렵다. 상기한 정대현의 재반론에 대해 논하는 김영건과 엄정식의 글이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모든 것을 단순한 규약으로, 언어적 사항으로 넘겨버리는 일은 결코 형이상학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규약주의는 선험적 사실로 정당화될 수 없다.

미완성된 그림

왜 우리는 하나의 그림을 그리려 할까? 자연스럽게 누군가 자신과 다른 인간이 있음을 믿으며, 또 그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나뿐이라면 이렇게 나의 의사에 반하는 일들이 한가득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그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적 사실이다. 실존적 경험 속에서 우리는 타자가 존재함을 강하게 믿는다. 다원적인 경험이 절대주의를 좌절시키듯 타자에 대한 경험은 회의주의를 좌절시킨다.

지난한 형이상학의 역사가 보여주듯 좀처럼 그러한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몇 사람들이 지적하듯 단순히 그 그림을 그리려는 우리의 의지는 “철학적 질병”에 불과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열망을 철학적 질병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 형이상학적 열망은 그것이 완성될 수 없다는 선험적 이유를 논증할 때에만 반-철학적 방식으로 치료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선험적 방식으로 논증한다면 그것은 이미 일종의 형이상학적 태도이며, 후험적 방식으로 논증한다면 그것은 선험적 사실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형이상학이 불가피하다.

어떻게 형이상학이 가능한가. 칸트는 <형이상학의 진보>에서 그것이 단순히 도식화나 강단철학적 정식화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대신 우리의 삶 속에서 실용적으로 요청되는 믿음을 형이상학적 사실로서 승인하는 것을 그는 참된 형이상학적 태도로 간주한다. 치솜 역시 Thought and its Reference에서 유사한 입장을 보인다. 왜 실재론이 옳은가? 어떤 명제들은 특정 존재자들에 관한 존재론적 개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자의 실존함을 함축하는 명제들에 대해, 우리는 그 존재자들이 실존하는 존재자의 지위를 점해야 한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나 이렇게 그림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통일된 그림을 원한다. 선험적 명제들이나 그것의 종합으로부터도 얻어질 수 없고, 후험적으로도 얻어질 수 없는 그런 믿음 p를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철학적 불일치는 이 p에서 일어난다. 명제의 이치성에 따르자면 어떤 세계에서도 p이거나 -p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철학적 방식으로도 얻어질 수 없는 p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본질적인 철학적 문제는 오히려 여기에서 일어나는데, 우리는 이 본질적인 질병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대부분의 근본 문제는 이렇게 답답함만을 남긴다. 이 답답함에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또한 철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관련 문헌

상기한 내용 중 특정인을 언급했을 때 그 언급의 각 출처는 다음과 같다.

  • 소광희. “논리의 언어와 존재의 언어.” 현대유럽철학연구 3 (1998): 15-43.
  • 김영건. “맞음과 확실성.” 철학연구 46 (1999): 267-278.
  • 정대현. “형이상학적 열망.” 철학연구 48 (2000): 247-258.
  • Wittgenstein, Ludwig. On certainty. (번역: <확실성에 관하여>)
  • Hume, David.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번역: <인간지성에 관한 탐구>)
  • Kripke, Saul.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번역: <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
  • 박민정. <세실, 주희>
  • Searle, John R. “Minds, brains, and program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3.3 (1980): 417-424.
  • 엄정식&김영건. “언어적 전환과 확실성.” 철학논집 (2005): 41-87.
  • Kant, Immanuel. “Welches sind die wirklichen Fortschritte, die die Metaphysik seit Leibnizens und Wolf’s Zeiten in Deutschland gemacht hat?” (번역: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시대 이후 독일에서 형이상학이 이룬 실질적인 진보는 무엇인가?”, <형이상학의 진보, 발견>에 수록.)
  • Chisholm, Roderick M. “Thought and its reference.”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14.2 (1977): 167-172.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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