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동함

삶은 작동된다. 살아보려는 발버둥,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 모든 몸부림을, 삶을 삶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으로 만드는, 그 모든 초월성, 그 모든 욕망과 불안, 두려움을 공급받아 작동한다. 이 작동함이 수많은 작동함들을 끝없이 일깨운다. 작동함은 버벅거리고 고장나고 망가지고 그리하여 멈추기 전까지는 요소화되지 않는다. 무엇이 작동하는가? 말하자면, 작동함에는 주어/주체가 없다. 작동함은 원만함, 원활함이고, 순환에 이은 순환, 결과가 원인을 보증해주는 연속, 더는 ‘원인-결과’의 이원화된 쌍으로 분화되지 않는 흐름의 선들, 그 선들이 겹쳐져 그려내는 모양이다. 그것은 성과들이다. 스스로의 성과가 스스로의 보존을 약속하며, 보존이 곧 성과인 성공함이다. 즉 작동함은 그 자신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끝없는 연속적인 성공들successive successes이며 성공적인 연속들successful successions이다. 

작동함이라는 흐름은 궤적을 그려보인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먼저 분간해내는 것은 바로 이 궤적일 것이다. 이것이 곧 거점이다. 무수한 거점들이, 그 거점들을 둘러싼 작동함으로서/써 작동된다. 작동함은 곧 작동됨이다. 작동함이 작동됨을 만들고 작동됨이 작동함을 만든다. 작동됨은 마치 어떤 것‘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원활함의 흐름이 윤곽을 그릴 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문제는 ‘능동성과 수동성’이 아니다. 전구라는 기계,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모든 기계들이 다 잘 작동여 빛을 내면 전구는 잘 작동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동함과 작동됨은 흐름의 운동과 흐름의 모습을 가리킨다. 결국 이것은 흐름이다.

(그러므로 작동함만이 있을 뿐 어떤 것‘이’ 작동한다거나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작동‘시킨다’는 말은 가능하지 않다. 어떤 것‘이’ 작동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라는’ 작동함이 있다는 말에 불과하다. 어떤 것이 작동‘된다’는 것은 그것을 거점으로 삼는, 그것을 둘러싼 작동함이 있다는 말이다.)

 

2. “아니다” – ‘통치성’

푸코에게 ‘권력’이 이미 그러했듯이, ‘통치성’ 또한 단지 억압, 금지, 예속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통치성’은 푸코에게 임시적인 개념이었던 듯하다. 흔히 오해되는 바와 같이, 『감시와 처벌』(1975)에서 문제가 되는 ‘규율 권력’은 권력의 유일한 형태도 전형적인 형태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식의 형태,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낡은 형태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한편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실행되고 있는 전략과 기술 들이다. 다만 푸코는 잔인한 형벌의 스펙터클이 사라지고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감금으로 일원화된 시기, 요란한 처형 기구들이 자취를 감추고 감옥이라는 새로운 형체가 생겨난 시기에 고안되고 체계화되어 감옥 뿐 아니라 다른 제도와 장치(병원, 학교, 병영 등)로 확대된 ‘규율 권력’, 신체를 부위별로 나누어 파악하고 재조립하여 신체로부터 유용성을 극대화하는 권력과는 다른, 좀 더 교묘해진 방식의 권력이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에 푸코는 ‘생명관리권력bio-pouvoir’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이러한 권력의 작용들을 바탕으로 한 정치에 ‘생명관리정치bio-politique’라는 이름을 붙인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안전, 인구, 영토』(1977~1978)는 생명관리권력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여 곧 ‘통치성’의 문제를 부각하여 다루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통치성’은 근대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볼 수 있는 신체에 대한 권력, 섹슈얼리티에 대한 권력, 생명(삶)에 대한 권력…을 아우르는 개념, 혹은 이러한 권력들이 얽혀서 작용하는 방식을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푸코에게 ‘통치성’이 어떤 것인지 물으려면 ‘생명관리권력’이 어떤 것인지를 또한 물어야 하며, 따라서 그 물음은 『안전, 인구, 영토』에 대한 독해, 그리고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1979)에 대한 독해 속에서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생명관리권력’에 대한 해명이 아니다. 내가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다만, 푸코에게 ‘생명관리권력’은 건강, 공중보건, 위생, 출생률, 기대수명을 관리하고 조절함으로써, 정치에 경제적인 운영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작용하는 권력이라는 점, 그러므로 ‘통치성’은 단지 ‘어떤 개념이 저것이 아닌 이것을 의미함’에 의해 어떤 행위를 제한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 흔히 사용되는 소박한 이원론을 잠시만 빌려 말하자면, ‘통치성’이란 개념들의 의미작용들 뿐만 아니라 ‘물리적 실체’들의 고안, 분배, 배열, 배치…까지를 포함한 모든 기술들과 전략들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통치성’이란 명령과 강제, 혹은 ‘채찍’이라는 물리적 폭력이라기보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기술(보다 추상적인 것에 대한 비유로서의 ‘당근’과 ‘채찍’)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통치성’에 대한 문제제기란, 이를테면 사람들을 잡아다 감금한 채 제대로 재우지도 않고 마땅한 휴식도 주지 않고 끝없는 강제 노역을 시키는 자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 이것은 ‘통치성’의 문제이기 이전에 적나라한 폭력과 착취의 문제이다 — 법으로 휴가 일수를 지정해야 하는 사회, 그조차 다 활용하지 못하고, 가능한 한 많이 남겨 보상 환급받는 일이 경쟁적으로 이뤄지는 사회, 무엇보다도, 휴가를 다녀오기 위해 (혹은 다녀오고 나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돌아오겠다(왔다)”고 말하는 것이 미덕인 문화, 휴가도 취미생활도 생산성을 위한 것으로서 정당화되고 장려되는 문화를 겨냥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통치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급’이 비밀 위원회를 결성하여 ‘정육점 주인이 비밀 경찰로서 우리를 감시하고 빵집 주인이 우리를 도청하고 우리를 고용한 양조장 주인이 우리의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 시간은 늘리기 위해 입법자들과 결탁하기 때문’이 아니라 — 물론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이런 노골적인 지배와 억압이 잔존하긴 하지만 — ‘정육점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 그리고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욕망과 불안(두려움)에 따라, 남들이 으레 따르는 관습의 단계들을 따르며 나름대로 살고, 누군가는 떳떳하게 다른 누군가는 비겁하게 살았을 뿐인데 모두가 — 먹고사는 ‘수준’의 위계가 있긴 하지만 — 그저 먹고사는 일을 위해 먹고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산다는 것이 먹고사는 일(혹은 ‘행복’을 위한 것)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내 생각에 ‘통치성’이라는 말은 가장 적절한 용어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통치성’이라는 개념은 통치하는 ‘주체’가 있어서 통치하려는 ‘의도’를 갖고 통치를 행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 용어를 버린다.

(내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통치성’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비판이지만, 내 생각에 비판이 겨냥해야 할 대상은 ‘통치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멈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비판은 ‘작품’에 대한 비판이 아니며, ‘평가’의 의미는 전여 없다는 점, 그것은 차라리 비판적 사유, 비판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만을 말해두고서.)

 

3. 작동되는 삶, 삶의 작동됨

이건 나의 내밀한 고백이다. “내게 문제는 삶이 폭력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아니라 속임수와 유혹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건 흔한 아무개의 이야기다. K도 십대의 전부를 ‘열심히’ 공부하는 데 바쳤다. ‘대학이 이후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과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위로와 같은 말 둘 다를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다. 남고에서 ‘지금 네가 하는 공부가 미래의 와이프의 얼굴을 판가름한다’는 말은 선생님들로부터 흔히 듣는 말이었다. 그런 비슷한 문구가 급훈인 반도 있었다. 공부를 하는 아이는 ‘생각이 있고 철이 든 아이’였고, 그런 아이들은 공부를 포기한 아이들을 두고 ‘생각 없이 인생 버린 아이’라고 흉을 봤다. 왜 그렇게 모두가 대학에 잘 가야 한다는걸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까? 어찌저찌해서 K는 최고 중의 최고의 대학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학에 진학했다. 1학년 때에는 해방감에 하루가 멀다하고 술을 마셨다. 이것 저것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이제는 부모님께 용돈만 받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다양한 아르바이트도 했다. 군대에 다녀온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가 없다. 일 년 남짓 사귀었던 ‘여자친구’와는 거짓말같게도 ‘일말상초’ 때 싸우다가 헤어졌다. 복학해서는 학교 다니면서 토익 점수도 만든다고 정신이 없었다. 3학년부터 부랴부랴 남들 다 하는 ‘학점 관리’란 것을 했다. 동기들과 만나는 일도 드물어졌다. 그리고 기나긴 취업 준비. K는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돼야 할 것 같았고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결혼이든 뭐든 잘 풀릴 것 같았다. 그래도 K는 운이 좋은 편이었을까? ‘취준생’으로 일 년 반을 산 끝에 사람들이 한번씩은 들어본 적 있는, 나름 이름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 부모님이 다소 무리해서 맞춰준 정장을 빼입고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의 생활은 이등병 생활보다 지독했다. 이 년을 눈칫밥을 먹고 나니 그 망할 ‘사회생활’이랄 것을 알 것 같았다. 휴가를 쓸 때와 쓰면 안 될 때를 알 것 같았고 결재를 받아내는 요령을 알 것 같았다.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 보는 법을 배웠고 처체하는 법, 평판을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 오 년이 지나니 아무도 K를 ‘사회초년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퇴근하면 가끔 대학 시절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대개 집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았다. 몇 번의 소개팅, 어찌저찌 끝난 연애, 세 벌이 된 정장, 한 주먹쯤 잡히게 된 옆구리 살, 그리고는 남는 것이 없었다. 결혼을 해야 했다. 서른이었고 소개팅에 ‘진지하게’ 임해야 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진지한 연애를 일과 병행해야 했고 돈을 더 모으기 위해 야근이 잦았다. 그나마 수당을 쳐 주는 회사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 그리고 신혼여행. 이 시절엔 잠시나마 큰 걱정도 없었고 행복했다. 이걸 위해 이렇게 뛰어왔을까? 아내는 아이를 가졌고 K는 한 차례 직장을 옮겼다. 경력을 쳐주어 다행이었지만 전과 같이 안정적이고 대우받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들 하나, 또 그 밑에 딸 하나. 자식이란 게 이렇게 돈이 들어가는 지 몰랐다. 아내가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게 한 게 K의 그 말 때문이었을까? 어린이집을 믿지 않아서, 아내가 육아와 일을 다 짊어지다 몇 번이고 울게끔 한 게, K의 탓일까? K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중학생 고등학생의 학원비가 이렇게 많이 나가야 하는지, 이것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끝없이 승진하거나 복권에 맞지 않으면 안 되는 거구나, 그 생각 뿐이었다. 회사 사람들과 등산을 가거나 골프를 치러 다니는 게 낙이라면 낙이었다. 두 차례 이사를 했고, 이사를 했을 때는 마음이 좀 새로워졌었다. 공부에 집중하라고, 아내와 번갈아가며 종종 아이들에게 야단을 쳤다. 아들이 대학에 붙었을 떄, 또 딸이 대학에 붙었을 때, K는 정말로 기뻤고 보람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K와 아내는 이제 한 시름 놓았다고, 아이들 키울 만큼 키웠다고 생각했다. K는 빠듯하게 두 대학생들의 등록금을 냈다. 아들 딸이 장학금을 받아올 때엔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아직 다 키운 게 아니었다. 두 아이를 장가 시집 보낼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아들도 딸도 분가했다. 아내는 딸이 갈 때만 울었다. K는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하고 집 가까운 데 음식점을 열 만한 곳을 알아보러 발품을 팔 때 울었다. K와 아내가 더 늙었을 떄, 그들은 이제 무얼 어떻게 하고 살아야하는 건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바라는 것이 적지 않았고 두려운 것도 적지 않아서 K는 국수를 삶았고 아내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접시들을 닦았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숱하게 겪어도 쉽사리 살아가기를 멈출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나는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살아지고 있었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건 일단은 하나의 가설과 같은 문제제기이다. 오늘날 가장 특권적인 개념, 작동되는 거점 중에 가장 포괄적인 것은 바로 행복 그리고 생존이 아닐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살면서(산다고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 행복을 위해 산다(산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위한 삶과 살아남기 위한 삶이 먹고사는 삶이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먹고사는 수준의 문제가 된다. 월급 백 만원 짜리도 먹고사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월급 오백 만원 짜리 회사원도, 연봉 일 억을 버는 의사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낙오되기를 두려워하고, 또 행복하기를 욕망한다. 그런데 이것들, ‘행복해야한다’는 명령문,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라는 생각,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 모든 노력을 빨아들이는, 먹고살아야 한다는 과제… 이러한 것들이 삶의 작동됨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가장 거대한 작동함의 흐름 속 한 고리를 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저 살아남는 것, 먹고사는 것이 되어버린 삶은 예술도 정치도 없는 삶, 사유도, 다른 삶의 잠재성도 없는, 메마르고 황폐한 삶이 아닐까?

 

4. 작동함 / 작동함에 맞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당기는 주요한 힘들이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은 우리의 신체, 기억, 욕망, 불안(두려움), 판단 등 가능한 모든 작용기에 붙어 우리로 하여금 조금 더 사는 방향으로 가도록 이끄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힘들이 어느 순간 산다는 것 혹은 살아있다는 것을 그 힘들이 쉬이 달라붙을 수 있는 어떤 다른 것으로 바꿔놓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게 된다. 그 힘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게끔 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인가가 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게끔 하고, 그런 것들을 겪는 우리이게 한다. 이 힘들을 두고 ‘힘’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 이것들은 행사하고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생산하고produce 반복하고repeat 재생산(복제)reproduce한다. 이것들은 작동하는 것이다. 힘이 있어서 움직임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맞물려 이어지는 움직임의 흐름들이 있다. 작동함에 이은 작동함은 사건을 생산하고 사실을 생산하고 사건들을 배열하고 사실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작동함에서는 그 어떤 목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작동함의 순환적 흐름을 계속하고 보존하는 것 외에는. 작동함은 거점(작동되는 것)들을 거쳐 다른 거점들로 흐르며 실체를, 행위를, 의미를, 판단을 생산한다. 수많은 거점들을 두고는 그 거점들을 거쳐, 거점들의 배치를 통해 움직이며 작동한다. 학교라는 시설이자 제도가 작동된다. 기호로서의 대학이, 제도로서의 대학이, 혹은 대학이라는 개념이, 작동된다. 경쟁이 작동되고, 시장이 작동되고, 소비가 작동된다. 노동이라는 개념이 작동되고, 취업, 일자리라는 개념이 작동된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개념이 작동된다. 욕망되는 것으로서, 혹은 그 반대로서, 결혼이 작동된다. 법이 규정하는 제도로서의 결혼이, 사회적인 제도로서의 결혼이, 개념으로서의 결혼이, 기호로서의 결혼이 작동된다. 수많은 맥락에서 정상성이라는 개념이 작동된다. 피부색을 기호화하는 작동함이, 머리카락의 길이, 원피스나 치마 등의 의복, 메이크업, 브레지어를 기호화하는 작동함이, 신체의 이미지를 쉽게 욕망되고 소비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성적) 대상화’의 작동함이, 장애를 분류하고 능력을 계산하고 신체를 용납하거나 거부하는 작동함이, 오늘날의 사상가들이 ‘혐오’라는 개념으로 부르는, 수많은 작동함의 흐름이 갈라지고 합쳐지고 교차하고 공모하고 대립하며 도처에 널려 흐른다. 우리는 입시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고, 학점을 따고, 취업 준비를 하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기르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대학에 간다. 우리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분투하고, 상품을 욕망하고, 돈을 벌고 소비하고, 경쟁하고, 임신과 동시에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갑질’을 당하고, 야근을 하고, 크고작은 성폭력을 경험하고, 직장을 옮기거나 구조조정을 당해 직장을 잃거나 승진을 하고, 여행을 갔다와서는 다시 노동을 판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남는다. 이루 다 이름 붙일 수 없이 그저 자신의 작동함을 다하는 충실하고 원활한 작동함의 흐름들이 언제나 계속해서 작동한다.

어디까지가 억압된 삶이고, 어디까지가 상투적인 삶일까? 이것이 도저히 구분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사유는 삶이 작동되는 것이 아닌지 묻기 시작한다. 도처에 작동함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런데 삶의 작동됨은 작동함들의 (인과론적) 근원도 (목적론적) 목표도 (결과론적) 귀결도 아니다. 삶이 작동된다는 것은 이 모든 작동함의 (복수적인) 총체성이다. 작동함이란 작동함이라는 흐름 자신을 보존하는 효과, 사실을 배열하고 의미화하는 효과, 행위를 이끌어내는 효과, 사건들과 사건의 계열에 미치는 효과이며, 어쩌면 이것은 그 자체로는 동의해야 할 것도, 거부해야 할 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삶이 작동된다는 것,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것에 속한다. 우리 삶 속의 경험, 행위, 혹은 경험과 행위의 관계가 섬뜩할 만큼, 소름끼칠 만큼 닮아 있다는 것, 폭력과 부당함의 경험도 (그것의 행함도), 내밀한 불행까지도 놀랄 만큼 닮아있다는 것, 나의 불행 또한 ‘상투적인 불행’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것에 속한다. 그래서 사유는 비판가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비판은 작동함을 —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실재를 — 겨낭한다.

문제는 (이를테면) 문화, 제도, 규범…의 (시대에 따른) 상대성과 (오늘에 관한) 자의성을, 그것들에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토대가 없다는 사실을 토로하는 일이 아니다. 문화, 제도, 규범…이 낳는 폭력을 고발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당위, 마땅한 반응이자 의무이지만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에서 ‘폭력적인 부분’을 적출하고 교체하는 식으로 ‘개선’하려는 일은 폭력이라는 반복적인 사건, 고통의 반복적인 경험을 산출하는 (총체성으로서의) 작동함을, 살아있다는 것을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끝없는 살아남기로 만들어버리는 그 효과를, 무력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관건은 작동함에 맞서, 삶에 작동됨에 맞서는 일이다. 그 이름이 비판이다. 나는 또한 그것을 불온이라고, 불온되기라고 부른다.

들뢰즈는 니체에 관한 한 짤막한 텍스트〈유목적 사유Penée Nomade〉(1972)에서 리샤르 드사이Richard Deshayes를 인용하여 말한다. “산다는 것, 그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Vivre, c’est pas survivre” 이것이야말로 비판적인 것의 목소리, 불온되기의 목소리가 아닌가.

 

5. 계열 / 만남 / 경험과 행위 ‘사이’

계열

사건은 사건으로부터만 태어난다. 일어남은 다른 일어남들과 더불어서만 가능하다. 사건은 태어나면서 즉시 다른 뭇 사건들과의 관계 속에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사건은 이 자리매김으로써 죽고, 그 죽고 난 자리에 사건의 다음을 가능하게 한다. 사건은 일어남이면서 동시에 계열화의 효과이다. 뒤따라오는 것consequence은 같은-계열의 것con-sequence이다. 계열의 분기, 교차, 중첩, 단절, 지속…은 곧 사건의 계열들이 서로에 개입하는 효과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실체라고 부르는 것, 존재라고 부르는 것,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 행위라고 부르는 것…이 비롯된다. 우리는 (아직) 모든 계열들을 다 추적하여 알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반드시 선형적일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다 같은 심급의 평면 위에 있지도 않다.

만남

사건은 가장 개별적인 것이긴 하지만 결코 독립적이지는 않다. 다시 말해 사건은 늘 사건과 사건의 만남(접촉, 대면, 교섭, 혹은 충돌…)이다. 그러므로 사건은 단일한 계열의 선 위에 있지 않고 늘 (사건들의) 교차점 위에 있다. 아니, 사건은 오로지 이 교차이다. 사건은 만남이라는 것, 바로 여기에서 결코 사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건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사실이 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남은 서로 다른 두(혹은 여러) 계열이 공유하는 단 한순간을 각 계열들로부터 떼어내지 않은 채 그 계열들을 긍정하여 그 만남을 바꿀 수 없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것, 그러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실, 이것은 만남이라는 번쩍임의 두 얼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이 그저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경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관찰 또한 하나의 사건이다. 관찰로부터 사실이 나타날 때 사실은 관찰의 사실로서 나온다. 다시 말해 관찰하려는 사건이 있어서 이것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관찰 자체가 사건과 사건의 만남이며, 그러므로 하나의 사건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실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관찰이라는 말을 경험으로 바꾸어 놓아도 마찬가지이다. 경험 자체가, 경험하려는 그 사건이라는 만남에 교차하는 사건의 계열이 아니고서는 그 만남을 경험이라고 부를 근거가 없을 것이다. 즉 경험은 그 또한 사건이되 그 자신이 만남의 한 편이고 그러므로 자신이 보고자 하는 사건이 바로 그 자신인 그러한 만남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건이 경험(혹은 경험하는 자) ‘밖’에 잇다거나 경험은 ‘어쩔 수 없이’ 사건에 ‘개입’하는 일이라는 두 관점이 같은 오류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행위 없는 순수한 경험이라는 환상을 제거한다. 경험은 행위에 기대어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겪기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물론 역도 성립한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겪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 행위라는 사건의 계열은 그 자신의 다음 행위, 그 다음 행위에 의해서 계열화될 뿐 아니라 경험과의 관계 속에서 계열화된다. 경험의 계열 역시 행위의 계열과의 관계 속에서 계열화된다.

경험(의 계열)과 행위(의 계열)

우리는 사건들의 세계에 살며, 마찬가지로 사실들의 세계에 산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이 세계도 이러한 구분을 만들고 지탱하지는 않는다. 이 두 항의 ‘나누어짐’은 효과, 가장 ‘작은’ 의미에서의 ‘힘’에 다름 아니다. 세계는 사건과 사실의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엎치락뒤치락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삶은 경험일 뿐 아니라 행위이며, 우리는 겪음으로서/써 살 뿐 아니라 함으로서/써 산다. 그러나 한 편에 경험이 있고 다른 한 편에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행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하는’ 그 무엇과 행위를 ‘하는’그 무엇이 별개로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은 경험과 행위의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엎치락뒤치락으로 ‘나아간다’.

경험의 계열과 행위의 계열은 오직 서로간의 교섭, 인점, 대립, 간섭, 의존, 순환 관계라는 효과로서 계열화된다. 어떻게 행위에 이어 행위, 그리고 행위…가 이어지는가? 어떻게 경험이 파편화되지 않고 이어지는가? 어떻게 행위를 경험하며, 경험으로부터 행위로 이어지는 가? 이 교섭들이 또한 계열화될 때, 그것이 보다 더 단순하게 계열화되는, (물리적 실체의) 존재성의 계열, 즉 신체의 계열과 만날 때, 그 계열 속에서 계열화되는, 역시 존재성의 계열화에 의존하는, 기억이라는 계열과 만날 때, 이 복수의 계열화는 ‘나’라고 불릴 만한 것의 희미한 형체를 드러낸다 —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경험과 행위 ‘사이’

경험의 계열과 행위의 계열이 얽히는 곳에서, 그 만남과 단절, 교차, 재개의 과정에서 일단 솟아나는 것은 주어/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솟아나는 것은 차라리 구문syntax 혹은 넥서스nexus 들이며,  빈 자리, 그러나 곧, 자주, 반복해서, 채워질 자리, 비워질 자리이며, 몸의 기억함, 상상함, 욕망함, 두려워함…이고, 작용기가 달린 몸-자아, 의미적인 것이 스며드는 장소, 의미적인 것의 결핍과 과잉의 지형도이다. 주체적인 것들의 솟아남은 이차적인 분기이다. 경험과 행위의 —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 ‘사이’에 잇는 것은 경험과 행위를 연결해줄 뿐 아니라 그 연결의 선을 가로지르는 선들의 다발, 불안정하므로 쉽게 반응하는 계열들이다.

그리고 작동함의 계열이 있다. 이것은 경험과 행위 사이를 가로지르는 구문화된 계열들에 기호적인 것을 접속하여, 경험의 계열과 행위의 계열 사이의 계열들을 조직화한다. 이것이 아마도 주체화의 계열이 아닐까? 

 

6. 작동함 – 경험의 반복성과 행위의 반복성

경험의 반복성과 행위의 반복성

우리들 각각을, 여럿이자 모두로서의 우리와 접속시키는 것이 이 주체화의 계열들 그리고 그것들과 엮여 흐르는 작동함의 계열들이다. 작동함의 계열은 구문화의 계열로 엮인 신체의 계열, 기억의 계열, 욕망의 계열… 위에 겹쳐지며, 혹은 타고 흐르며, 경험과 행위 사이에 교차된 흐름을 기호화하고, 그 사이를 횡단한다. 그제야, 우리가 ‘안과 밖’이라는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안과 밖’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안과 밖’을 괘념치 않는 이 횡단적인 것의 계열 혹은 그 계열화의 효과이다. 작동함은 행위를 이끌어내는 효과들이되, 주체화의 계열에 접속하고 교차하여 경험과 행위가 맺는 관계를 조직하는 효과이다.

오늘날 삶이 ‘거의’ 작동된다면 그것은 개념의 의미작용이 (혹은 ‘통치성’이) ‘개인’의 ‘자율적인’ 행위를 억압하는 힘이 있어서도, 어떤 것이 저것이 아닌 이것을 의미’하므로’ 우리가 저것이 아닌 이것을 하게 되는 인과성 때문도 아니다. 작동함이란 사건을 그리고 사실을 생산함으로써 배열하고 배열함으로써 생산하는 것, — 결국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지만 — 경험의 반복성(동일성)을 그리고 행위의 반복성(동일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동함은 사건과 사실을 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 그리고 자아를 생산한다. 그것은 ‘안과 밖’의 효과를 생산한다는 것인 동시에, 그 그 ‘안과 밖’을 가로질러 조직화한다는 것이다.

작동되는 거점

작동함이라는 끝없는 순환적 흐름의 거점인, 작동되는 거점은 기호일 수도, 개념일 수도, 제도일 수도, 문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 중 그 어떤 것도 거점이 아니다. 거점은 현행적actual이면서 구체적인 것이다. 그것은 기호이면서 개념이기도 한 것, 제도이면서 서사이기도 한 것, 개념이면서 문화이기도 한 것…이다. 거점은 이들 범주적 구분과는 무관하게 그저 작동된다(되고 있다). 그것은 작동되어 작동함의 흐름들을 끝없이 계속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제도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어떤 것은 단일한 거점이 아니라 다수의 거점들을 통한 흐름의 다발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물리적인 실체라는 계열, 행위라는 계열, 기호와 판단의 계열 들이 얽히고 꼬여 사건들을 생산한다. 어떤 거점들은 개념이라는 범주와 밀접하면서도 제도라는 범주와도 밀접하다. 바꿔 말하면, 작동함의 흐름이 순환적-자기보존적인 (고리와 같은) 윤곽, 궤도를 그림으로써 그것은 개념 혹은 제도… 등의 이름을 붙일 만하게 가시적인 것이 된다.

어떤 작동함의 흐름을 예시로 들어보자. ‘경쟁’이라는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실력’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특권화되어 있다. ‘공정한’ 경쟁이 화두가 될 때에도 ‘왜 이런 분배를 위해 하필이면 이런 것을 내용으로 한 시험으로 경쟁이 이루어지는가’라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쟁이라는 개념을 특권화하기 ‘때문에’ 기꺼이 경쟁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경쟁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를 경쟁에 뛰어들게 하는 것은 분배의 근거이자 방식으로서의 경쟁, 제도로서의 경쟁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우리를 경쟁하는 개인, 경쟁하는 주체로 만든다. 우리는 경쟁이라는 개념을 학습하고, 나아가 체화한다. 우리로 하여금 너무나 많은 노력을 쏟아붇게 하는 이것, 우리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분배 방식인 이것은 실제로 우리를 분류하여 강의실 문 앞에서, 사무실 문 앞에서, 우리를 들여보내거나 밀쳐내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경쟁은 개념의 면을 갖고 있으면서 제도의 면을 갖고 있다. 경쟁이라는 개념적인 거점이 제도적인 거점을 돕고 또 제도적인 거점이 개념적인 거점을 돕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작동함은 우리의 경험과 행위 사이에 자아를, 욕망과 불안을 조직하고 체계화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더 복잡하게 거점들의 공모 관계가 얽혀있을 것이다. 경쟁이라고 불리는 작동함의 흐름은 이러한 수많은 작은 흐름들, 이러한 거점들(개념적인 거점들, 물리적인 거점들, 제도적인 거점들, 심리적인 거점들)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대학의 이름이 곧 차등화 혹은 계급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호의 작동함과도 얽혀있을 것이고, 생산성에 관한 작동함, 계급, 젠더, 인종, 장애…에 관한 이루 지칭할 수 없는 수많은 작동함들과 맞물려 작동할 것이다.

거점들을 거쳐, 작동함은 작동하고 또 작동한다. 작동함은 메마른 현행성actuality(현실성 혹은 현실태), 반복되는 현행성, 그 어떤 잠재적인 다른 것의 생성도 이뤄질 수 없는 불모의 생산성이다. 작동함의 과잉, 바로 이것을 두고 우리 시대의 가장 예민한 사유들 중 몇몇이 ‘동일자의 지옥’이라는 표현으로 문제화한 바 있다. 작동함이란 동일자의 생산과 재현/표상representation이다.

 

7. 비판 – 불온을 가동하기

작동함의 과잉에 맞서, 삶의 작동됨에 맞서 —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맞서 — 작동함을 방해하는 것,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는 것, 그러므로 불온한 것, 작동되는 거점을 드러내고 문제 삼고 그것이 삐그덕거리고 버벅대고 망가지도록 불온을 가동하는 것이 바로 비판이다. 산다는 것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되지 않도록, 전력질주하는 당연한 판단들, 행위들이 머뭇거리도록, 멈춰서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비판이다.

비판은 시대에 밀착해 있으며, 작동함의 방식들(전략들)을 뒤틀어 즉각 작동함에 들이민다. 다반 비판은 원활한 흐름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름거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깜빡이는 점멸, 간헐적으로 번쩍이는 섬광이며, 나름의 박자로 때리고 울리는 음향이다. 그서은 무엇보다 행위의 혁신이며, 또한 거점들의 요구, 그것들이 경험으로부터 욕망, 불안, 판단…을 조직화하는 방식에 대한 불응이다. 비판은 예민해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작동함이 재생산하는 반복적인 경험들 속에서 ‘괜찮지 않는 것’을 식별해내고, 판단, 합리화, 가치부여가 섣부르게, 특권적으로 스며드는 지점을 예의주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컨대 비판이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삶의 질quality of life’이 형편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거나 그것을 향상시킬 대안(으로서의 제도)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은 언젠가부터 수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 특권적인 개념에 의구심을 품는 것이다. 왜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에는 ‘취미 생활에 지출하는 비용의 (소득 대비) 비율’, ‘(총 노동 시간에 대한) 여가 시간의 비율’…과 같은 것들이(것들만) 들어가는가(왜 그런 식으로 정의되는가)? 왜 삶이 국가 혹은 정부에 의해 ‘품질 관리quality control’를 받는 대상이 되었는가? ‘질 좋은 삶’은 과연 좋은 삶, 탁월한 삶인가? 어찌하여 삶은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라는 표현에서 보여지듯이 노동(직업, 일)을 뺀 나머지, 노동(직업, 일)과 동등한 두 항을 이루는, 그에 반대되는 항이 되었는가? 과연 ‘삶의 질’을 어느 ‘적정 수준 이상’으로 관리하는 국가는 개인들로부터 최대한의 (노동) 생산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술과 전략을들 구사하는 국가와는 달리 더 이상 폭력성을 발휘하지 않는가? 이런 물음들이 비판의 시작과도 같은 문제제기이다.

또한 비판이란, 말하자면 단지 ‘행복’이라는 개념의 의미작용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행복’이라는 개념이 특권적인 것이 되게 한, 작동되는 거점들이 실제로 삶의 양식들을 발생시키고 반복시키며 작동시키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비판은 무엇보다 특권의 회수, 특권적인 것들의 재배치, 특권의 재분배이며, 유동성, 즉 고여있지 않게 하기이다. 그것은 작동함을 방해하는 불온함의 거점들을 발명하기, 그 거점들에 영구히 머물러 그에 의존하지 않고, 작동되는 거점들의 배치를 뒤흔들기 위해 불온함의 거점들 또한 뒤흔들어 변형하기를 뜻한다. 왜냐하면 작동함, 즉 원활히 잘 돌아간다는 것은 그 어떤 실패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실패 또한 처치하거나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동함은 ‘불량’을 전혀 생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량률’을 관리하고 ‘불량’을 구분해 처치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불온 또한 ‘처음 한 번’의 불온이어서는 안 된다. 작동함은 불온을 ‘허용된 불온’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불온은 끊임없이 궤도를 전이하고 얼굴을 바꾸고 음색을, 곡조를, 문체를 변이해야 한다.

(담론 혹은 체계(이 말이 가리키는 것이 제도, 법, 도덕… 혹은 다른 무엇이든)는 결코 단일한 전체가 아니다. 담론의 ‘바깥’에는 담론이 있으며, 체계 ‘바깥’에는 그 바끝을 위한 체계가 있다.  담론도 체계도 없는 순수한 실재적 영역이란 없다. 비판은 담론의 바깥에서 담론을 들여다보고는 그 담론을 부정하고 박살내는 일이 아니다. 비판은 우선 담론의 작동함의 흐름을 건너 이 담론에서 저 담론으로 도약하는 것, 이 담론에 저 담론을 마주세우는 것, 그런 식으로, 머물러있지 않고 옮겨다니는 것, 궤도에서 궤도로 언제고 전이할 수 있다는 그 잠재성potentiality이다.)

 

8. 특히, 예술 – 불온을 심기

예술은 비판하기 혹은 비판적인 것 중에서도 유별난 것이다. 비판은 탄탄한 이론적 구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특권적인 개념들과 그 개념들의 배치에 맞서 다른 개념들의 짜임을 고안하는 일을 포함한다. 그럼으로써 불온을 가동할 수 있다. 예술은 개념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감각과 정서로는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경험을 박아 넣음으로써 우리를 멈춰서게 한다. 예술은 현실에서 문제를 발견해냄으로써가 아니라 현실의 조각을 떼어다 스타일로 빚어냄으로써 불온이 된다. 예술은 부조리의 폭로가 아니며, 자아(자의식)을 현실에 하나 더 보태어 포개놓는 일도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예술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자신을 지우기 위해서 작품을 짓는다. 작품은 실재의 한 부분을 모방하는 것, 혹은 ‘반영하여 비추는’ 것 또한 아니다. 가장 뛰어난 예술 작품은 대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을 겪는 이와의 겪음이라는 만남 속에서, 스스로 실재 속의 무엇이 된다. 예술가는 (작품도 자신도 아닌) 다른 무엇을 사랑하기에 작품을 빚고 거기에 생명력을 준다. 그것이 세상에 (결국) 나와버렸다는 것은, 예술가가 알았으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나와버린 작품에 대한 애착,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예술가는 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빚지 않는다. 그것은 광포한 사랑에 빠지는 순간 예감했던, 내키든 그렇지 않든 잉태하여 낳을 수밖에 없는 아이이다. 아이는, 그를 낳은 이가 그를 아끼든 내치든,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술에 관해서라면, 불온은 거창한 정치적 저항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진실에 붙여진 이름이다. 분류되지 않고 환원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진실. 예술은 진실을 담는다. 예술은 진실을 포착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불온으로서의) 진실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진실을 감지하면, 그것이 소중하다면, 그 둘레에 돌을 쌓고 나무를 깎아 올려 누각을 짓는다. 무엇인가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그 무엇인가를 지켜주려고, 찾아오는 이가 여기에 머무르다 가게 하려고, 그 이에게 그 무엇인가를 겪게 하려고, 누각을 짓는다. 누각이 담고 있는 것, 이곳을 찾아오는 이로 하여금 겪게 하려는 것, 그리고 그 누각이라는 집. 이것들이 쉽사리 분리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참인 것이 참하고, 참하여서 참될 때, 그 집, 그 집짓기에 우리가 붙이 ‘거창한’ 이름이 예술이다. 예술은 일단 심어놓으면 스스로 가동하게 될 불온을, 우리의 현실 속에 심는 일, 박아 넣는 일이다.

예술은 ‘아직 겪지 않은 자들’을 ‘겪은 자들’로 만드는 사건을 생성하는 식으로 가동되는 불온, 경험과 행위 사이에 주제적인 것을 조직하여 자아를 재생산하는 식으로가 아닌, 경험과 행위가 서로에게 낮설게 되는 을 새겨넣는 식으로 가동되는 불온이다. 예술의 경험이란 우리를 변질시키는, 물음을 감염시키는 만남이다.

(먹고살기 위해서이든, 다른 욕망이나 거창한 목표, 이를테면 출세 혹은 정의…를 위해서이든,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훌륭한 딴짓거리를 해보자는 데에서부터.)

(유희하기jouer는 행위를 행위이게 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을 가리킨다. 유희jeu는 쾌락 혹은 휴식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jouer과 같은 것이다. 유희는 희롱과도 구분된다. 왜냐하면 유희하기란 무엇보다 혼자가 혼자 속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할 수는 있되 각자가 각자의 유희jeu(게임)를 실현한다. 유희에서는 ‘누가 누구를/에게’라는 것이 없다. 유희는 ‘시간을 때우는 것tuer le temps(killing time)’과도 구분된다. 그것은 시간을 지속적으로 되살려내는 일, 시간이 최대한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쓰이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유희의 유일한 목표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이따금 드러나는 ‘예술적’이라는 말의 용법은 이러한 맥락에서 정말이지 적절하다. 기술이나 묘기는 노동이나 상품으로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에 경지에 이르는 장면을 연출하더라도 유희가 아니다. 예술이란, 무엇보다 무용한 기술, 무용하므로 불온한 유희이다. 아무 곳에도 쓰이지 않는 것, 오직 쓰이지 않음으로서만 쓰이는 것이다.)

 

9.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 – 불온되기

우리가 만일 거부하고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고통과, 그것을 야기하는 폭력에 반하여서다. 우리가 비판하기, 불온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동함의 과잉에, 삶의 작동됨에 반하여서다. (물론 폭력을 생산하는 작동함이 있다는 것이 명백한 만큼 저항하기이기도 한 비판하기가 가능하며 필요하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모든 질서를 거부하고, 문화도 제도도 규범도 없는 ‘순수상태’라는 꿈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너머로 나아가도 역시 질서가 있음을 알면서도 지금 여기의 질서에 고개를 저을 이유, 다른 질서를 꿈꿔볼 필요를 만났을 때 하나의 질서에 정착하려는 안온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 그리하여 질서와 질서들의 질서에 유동성을 부여하는 것, 삶을 특이성의 발현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을 꿈꿔볼 뿐 삶의 부분도 전체도 삶 자체가 아닌 다른 것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에 붙여진 이름이 비판이다.

그러므로 비판, 불온되기는 — 푸코가 그의 말년의 작업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 이중의 작업이다. 비판은 스스로의 삶을 살아남기 위한 것, 작동되는 것이 아닌 탁월하고 훌륭한 것, 독창적이고 고유한 것으로 깎아내는 수련임과 동시에 삶이 작동되게 하는 수많은 작동함을 무너뜨리려는 실천이다. 그것은 스스로 “실존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인 동시에 정치적 투쟁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또한 ‘파레시아’ 라는 개념, 그리고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이라는 표현을 통해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술 작품이 그래야 하듯, 삶 또한 그저 지탱하고 보존하는 것 혹은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을 부여하여 짓고 깎아내는 것, 작동함의 흐름들에 순응하고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끝끝내 불온한 것으로 남아서, 그 자체로 음미할 만한 것, 놀랍도록 뛰어난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불편하게, 거북하게 혹은 메스껍게, 어지럽게, 그리고 끈질기게 남아있게 될 물음을, 당연한 판단들의 원활하고 부드러운 흐름 속에 꽂아넣기 위해 정성을 쏟아 그 물음을 제련하고 세공하는 수고로움. 그 물음이 비판의 모습으로 깎아지든 예술의 모습으로 깎아지든 간에, 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지난한 여정을 ‘예술 작품으로서의 삶’이라고, 불온되기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나는 종종 예술을 ‘세속에 깊게 뿌리박는 수행’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불쑥불쑥 발동되곤 하는) 자아를 비워내야 한다고, 삶 속에서 나 자신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찾아, 그것을 기도하듯 탐닉해야겠다고. 그럴 때 삶은 예술과도 같은 것이 되겠다고.)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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