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깊게 끌어보려다 얕은 스케치만 남겨 보았다. 스케치로만 남기려 하니 글이 매끄럽지 않고 중언부언한다. 그렇지만 일단은 여기에서 비평에 관한 비평은 멈출 생각이다. 필자의 역량이 그렇게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탓이다. 다음 발걸음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거지.


그럴듯한 상상

혜나는 미향의 딸이었을까

아웃사이더로 사는 나에게도 오랜만에 “인싸짓”을 할 일이 생긴 것이 이번 겨울의 일이다. 계기는 JTBC의 드라마 <SKY캐슬>이었다.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소위 “궁예짓”이라는 것을 해 본다. 혜나가 곽미향의 딸 아니었을까, 혜나를 죽인 건 조선생 아닐까, 우주가 자해를 하는 것 아니었을까 … 등을 이야기하고, 듣는 이는 “아, 그것 참 그럴듯하네”라든지 “에이 그건 좀 아닐 것 같아”라는 식으로 응한다.

서사나 허구가 아닌 것에 관해서도 그럴듯함이 존재한다. 어떤 이의 철학적 진술이나 도덕적 주장, 종교적 표현을 평가할 때 사용되는 대표적 기준 중 하나가 “그럴듯함”이다. 어떤 것에 기초한 진술이 아니고서야, 가장 토대에 해당하는 철학/도덕/종교적 명제는 선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선험적인 것을 규명하는 수단은 직관이다. 이 직관은 우리가 서사의 그럴듯함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럴듯함”의 철학

그럴듯함이란 무엇인가? 그 의미상, 그럴듯함은 어떤 진술이 참일 개연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한편 그 용법상, 그럴듯함은 분명히 참이거나 거짓임이 밝혀지지 않았음을 함축한다. 만일 그 여부가 분명히 밝혀졌다면 그것은 “그럴듯한 주장”이 아닌 “참인 사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을 참이게 할 도구로 우리는 추론 규칙을 포함하여 주어진 사실들만을 갖고 있다.

즉 어떤 믿음이 그럴 듯하다는 것은 다음을 함축한다. 1) 주어진 사실들과 추론 규칙으로부터 그 믿음이 나오지 않는다. 2) 그 믿음이 참일 개연성이 높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상당히 역설적으로 보인다. 어떤 믿음이 참일 개연성이 높거나 낮다는 사실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정당하게 추론된 믿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1은 그럴 가능성을 부정한다.

가능한 응답은 “그럴듯함”이 허구에 관한 믿음이 갖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서술되는 대상세계에 대해 특정한 허구를 부과하고, 그 부과가 허용될 수 있을 때 이를 그럴듯하다고 부른다. 하지만 이 응답은 충분하지 않아보인다. 한편으로 허구는 추상적 존재자로 여겨지는데, 다른 편으로 그럴듯함과 유사한 속성인 “닮음”은 질이나 양으로 환원 불가능한 구체적 관계인 것 같기 때문이다.

허구와 현실의 사이에서

우리가 허구를 만날 때

허구에 대응된 세계

그럴듯함을 해명하려면 일단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주어진 사실들과 추론 규칙으로부터가 아니더라도, 어떤 믿음의 개연성을 평가할 수 있다.” 무엇이 믿음의 개연성을 평가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가능한 답변은, 주어진 내용이 우리 세계에서 참이었다면, 그 믿음이 참이었을 때 어떤 믿음이 개연성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다. 즉, 어떤 믿음이 우리 세계와 유사한 내용을 전제할 때 그것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단순히 우리 세계와의 유사성으로 퉁칠 문제는 아니다. 다음 두 이유가 대표적이다. (i) 우리 세계와 어떤 면에서도 비슷하지 않은 어떤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예컨대 신화나 판타지의 세계가 그렇다. (ii) 서사와 세계의 유사성으로부터도 결코 따라나오지 않는 그럴듯함이 존재한다. 예컨대, “셜록 홈즈는 빨간색 속옷을 즐겨 입었을 것이다”의 개연성 여부.

(i)을 먼저 이야기해 보자. 가능한 응답은 판타지 세계에 대해서는 모종의 스토리북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스토리북을 참조해 완전히 허구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세정(2010: 437)은 이를 “텍스트의 지시 세계”라고 부른다. 그렇다. 신화나 판타지에는 그러한 세계가 전제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세계를 오로지 서사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일까? (i)은 다시 (ii)로 소급되는 문제를 남긴다.

(ii)의 부담감이 크다. 셜록 홈즈의 속옷 색깔은 우선 알 수 없는 사실에 관한 것이고, “빨간색”이나 “즐기다”와 같이 아주 질적인 속성과 관련된다. 판타지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지 글로서가 아니라 서사를 즐기고 머리속에서 재현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의 구체적 이미지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서사의 세계는 그렇게 구체적인 세계일 것이다. 세계의 구체성!

이 구체성으로부터 개연성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 세계와 유사한 세계를 생각할 때, 그 세계는 우리 세계의 구체적 대상들을 참조한다. 판타지 세계는, 그 세계의 구체적 대상을 참조한다. 각 세계의 구체적 사태에 대해 암묵적으로 참인 어떤 사실이 생각될 수 있다면, 그 사실과 대응되는 주장을 할 때 주장은 그럴듯하다.

즉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매우 구체적인 어떤 세계를 서사에 대응시키고, 대응시킨 세계에 있어 참인 암묵적 사실과 대응되는 주장을 그럴듯하다고 평가한다.” 그럴듯함은 일단 세계에 구속되므로 문제되는 것은 세계의 구체성이다. 그 구체성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이며, 세계는 얼마나 구체적일까?

허구의 세계는 얼마나 구체적인가

우리는 어떤 반사실적 조건문을 평가할 때 그 반사실에 관련된 사태들뿐 아니라 여타 구체적인 사실들로 구성된 그러한 세계를 대응시킨다. 예컨대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아이폰은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라는 반사실에 관련된 사태는 스티브 잡스가 특정 시점에 애플에 입사하고, 아이폰 설계를 진두지휘하는 그러한 사항들을 배제한 세계이다. 한편 그 세계의 스티브잡스는 질적으로도 우리 세계의 인간과 동일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입사하지 않은 허구를 생각해 보자. 그 허구는 스티브 잡스에 관한 명제들뿐 아니라 아주 질적인 것들, 예컨대 “감성”에 있어서도 현실과 다른 내용을 가졌을 것이다. 이 허구에도 내가 존재했을 것 같다. 그 세계에도 애플 사의 스마트폰이 있었을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그 세계에서 전혀 다른 감상을 애플 사의 스마트폰을 통해 느꼈지 않을까. 그런데 그 느낌은 사실로 환원되기 어려워보인다.

또 우리는 전혀 상관 없는 사실들조차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예컨대, “상기한 허구에서 2019년 1월 31일에 여정은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라는 진술은 참이나 거짓이지, 참도 거짓도 아닌 것은 아니다. 무엇이 더 참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겠지만 참도 거짓도 아닌 사실로 허구가 차있다는 것은 그러한 허구를 납득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최소한 두가지 의미에서 허구는 구체적이다. 허구의 세계는 추상적 사실 외에도 질적 사태에 관한 사실을 가지므로 구체적이다. 또한 무차별적인 명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참이거나 거짓이리라는 점에서 구체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함에 따라 허구의 세계를 우리 세계와 똑같이 질적으로 구성된, 모든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그런 세계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허구는 우리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허구적 존재자들은 우리와 똑같이 구체적 세계 아래 존재한다. 또 그 존재자는 현실적 입장에서 허구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우리와 동등할 것이다. 가능세계는 우리 세계의 대체 가능한 영역이므로 그렇고, 또 그렇기 때문에 대체 가능한 영역이 된다.

허구는 자의적인 세계에 대응된 서사인가

문제가 되는 것은, 허구적 세계가 우리와 똑같이 실재한다면 단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어떤 세계가 탄생한다는 존재론적인 괴상함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첫째로, 오로지 언술로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둘째로, 가능하다면, 우리와 그 세계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허구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실재한다고 보는 이들은 답을 준비해 두었다. 후자의 문제부터 이야기해 보자. 어떤 것이 하나의 세계라는 것은 내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는 적어도 시공간의 틀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허구의 세계가 세계라면, 그것은 현실 세계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인과적 상호작용을 겪을 수 없다.

허구의 세계는 세계이므로, 그것은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상호작용 불가능한 개체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탄생은 우리의 언술에 의하지 않아야 한다. 그 세계는 우리와 독립된 독자적인 지도를 갖고 있다. 단지 땅의 경계를 나누는 지도가 아니라, 시공간적으로 세계를 나누어버리는 그런 지도이다. 이 나뉨이 세계의 경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전자의 의문은 간단히 해소된다. 우리는 언술로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은 언술 이전에 있던 것이다. 서사 이야기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참조한다. 그 이야기에 담긴 사실들은 그 사실이 참인 특정한 세계를 참조하여 허구의 세계를 상상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보지 않는다면 실재하는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허구의 구체성이 해명될 수 없다.

따라서, 실재론의 관점을 수용할 때 우리는 허구적 세계를 독립된 하나의 어엿한 세계로 보아야 한다. 단지 우리는 어떤 서사를 그 세계에 대응시킬 뿐이다. 마치 기술어구의 속성적 사용이 특정한 기술구를 만족시키는 사람을 지시하듯, 어떤 서사는 그 서사가 기술하는 세계에 대응된다. 그 세계는 서사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서사와 대응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현실’이야

현실세계

우리는 현실 속에 살아간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가부를 가릴 필요가 없다. 어떤 세계가 현실이라는 것은 그 세계가 그러한 믿음/발화의 주체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실성과 상호작용 가능성의 의미가 같다면 둘은 필요충분 관계에 있을 것이다. 정말로 어떤 것이 현실적이라는 것과 그것이 세계와 상호작용 가능하다는 것이 필요충분 조건인가? 이를 위해 신적 존재자의 현실성에 관한 두 논변을 생각해 보자.

우주론적 신 존재 논증:

(1) 작용인이 실재한다.

(2) 모든 것에는 그것에 앞서는 원인이 있다.

(3) 모든 원인에 대해 앞서는 원인으로서 신이 실재한다.

유물론적 신 부재 논증:

(1) 신이 세계의 원인이 되는 초자연적 존재자라고 가정하자.

(2) 세계는 물리적으로 닫힌 인과를 갖는다.

(3) 비물리적 존재자는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4) 물리적 사건은 다른 물리적 사건의 인과적 원인이 될 수 있다

(5) 따라서 비물리적 존재자는 세계의 원인이 아니다.

(6) 따라서 세계의 원인이 되는 초자연적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7) 따라서 가정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는 신이 작용인으로 존재하여야 하므로, 즉 다른 현실적 존재자와 상호작용하여야 하므로 신이 현실적이라는 논증이다. 즉, 현실성이 상호작용 가능성의 충분조건이다. 후자는 신과 세계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면, 그 신이 현실적이 아니라는 선제를 가질 때 타당하다. 즉 신이 현실적이라면, 그는 세계와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현실성은 상호작용 가능성의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현실성과 상호작용 가능성은 필요충분 관계에 있다.

“현실세계”

흄의 다음 주장은 법칙에 관한 일종의 회의주의적 주장으로 간주된다: “사실로부터 당위를 끌어낼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실들이다. 따라서 당위에 관한 주장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인접한 존재자들에게 반복되는 현상이 일어남에 따라 우리가 엮어낸 허구적 사실에 관한 주장이다.

하지만 흄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든간에, 현실세계에는 이런 저런 법칙들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가장 확실한 것은 물리 법칙이다. 우리는 물리적 불가능성에 저항할 수 없다. 당장 3*10^8m/s를 능가하는 속도로 달리거나, 다른 저항 없이 중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운동하려고 해 보자.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

그 외에 논리, 수리 법칙도 있는 듯하다. 내 맘대로 논리학이나 수학이 바뀌지 않는 것이 그 근거이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논리 법칙이 바뀐다면 이번 학기 논리학 학점은 A+로 거저 먹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모두 안다. 공학수학(2)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우리가 저항 불가능한 규칙들이 어딘가에 있다. 그렇다면 어떤 법칙이 정말로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법칙을 직접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사실 어떤 법칙이 있음이 아니라 막연한 법칙적 작용만을 발견한다. 그런데 ‘현실세계’가 지표적으로 인식되는 바로 이 곳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상기한 구체적 법칙이 현실에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 타당한가?

실제로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어떤 법칙의 사례들이지, 법칙 자체가 아니다. 여러 구체적 사례들로부터, 모종의 선험적으로 간주된 규칙을 통해 어떤 보편 법칙을 정식화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엄밀히 말해 현실적 존재자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흄의 논증이 의미하는 바였다. 우리는 경험하는 것들로부터 그것의 물리적/윤리적/형이상학적 당위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은 모두 무의미하다.

외않됀데?

그런데 어쨌든간에 우리는 그런 법칙들이 있다고 잘 말한다. 법칙에 관한 주장도 따라서 별로 무의미하지 않다.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실용적이다. 수리 법칙은 공학 및 자연과학에 응용되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 논리 법칙은 철학과 졸업생들을 평생 벌어먹게 한다. 물리 법칙으로 누군가는 우주에 갔다더라.

그런 법칙을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며? 그렇다. 그게 문제다. 왜 법칙이 정당한지 말하지 못한다면 달착륙 음모설은 100년도 계속 될 것이고, 철학과나 물리학과, 수학과의 학생들은 앞으로 평생 굶는 것이 예정될 것이다. 그런데 딱히 말할 것이 없다. 이러한 법칙들은 그저 선험적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는 선험적 사실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저 그것이 그런 것 같기 때문이다. 선험적 지식에는 별도의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단지 개별적 사실들에 관한 직관이 선험적 정당화의 전부는 아니다. “2 더하기 2는 4인 것 같아!”라는 식으로, 전혀 수리적 원리를 모르는 상태로도 선험적 사실에 관한 인식론적 행운epistemic luck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는 어떤 합리적 절차에 근거해 있는지의 여부이다. 칸트는 아마도 이 근거에 해당하는 선험적 사실을 ‘초월론적transcendental’이라고 부른 듯하다. 선험적인 것들 중에서도, 다른 선험적 사실을 포함해 인식 제반을 근거지우는 모종의 절차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러한 절차는 어디에 근거지워지는 것일까? 모르겠다. 우리는 심지어 초월론적 사실을 발견하지, 이미 알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사실들이 작동하는 방식 속에서 작동한다.

다시 발견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초월론적 사실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사실 역시 그 자체로 경험되는 대상이 아니다. 눈은 스스로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저 우리는 경험들에 비추어볼 때, 가장 그럴듯한 어떤 원리를 초월론적 사실의 기제라고 판단한다. 이렇게 다시 그럴듯함이 우리를 제약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법칙의 내용을 정당화한단 말인가?

동일시

사고의 전환을 하나 제안할 생각이다: “우리가 어떤 법칙을 이야기할 때 상정되는 구체적인 법칙은 일종의 서사이다.” 자연적 법칙이 없다는 헛소리를 하자는 게 아니다. 몇가지 소재로부터 그럴듯한 서사를 만들어 내듯, 몇가지 자연적 사례들로부터 그럴듯한 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사는 우리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서사의 내용은 그 내용과 특정한 가능세계를 대응시킨다. 법칙에 관한 내용은 그것이 적용되는 우리 세계와 대응된다. 앗, 뭔가 이상하다. 서사에 대해서는 단지 서사를 근거로 해서 그것에 대응되는 세계를 찾으면 그만이다. 말하자면 “일반 사고”이다. 그런데 법칙에 대해서는 그것이 대응될 세계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일반 사고와 단칭 사고를 한참 전에 언급한 적이 있음을 기억해 주면 재밌겠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지표적 공간인 현실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현실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을 말할 때, 그 이야기는 어떤 세계에서 참인 사실들을 엮어 구성한 통일된 서사이지만, 허구 서사와 달리 그 대응이 단칭적으로 이루어진다. 아주 구체적으로, “바로 이 세계에서 이 법칙이 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 법칙이 참이라면 ~ 이럴 것이다’와 같은 조건절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법칙적 주장이 일종의 허구 서사적 요소를 담고 있다 하자면, 그 주장은 특정한 가능세계를 참조한다. 한편 그 가능세계는 현실세계이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그러한 법칙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 현실세계를 참조한 주장을 했다기보다는 어떤 가능세계를 참조한 뒤 그 세계와 현실을 동일시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즉, 현실세계에 대해 특정한 법칙의 세계를 대응시킨다.

그런데 이렇게 구체적인 현실세계에 법칙의 세계를 대응시킬 수 있는 것일까? 실재론의 입장을 따라가자면, 대응은 당연히 가능하다. 다행히도 우리는 앞서 서사의 세계를 현실만큼이나 구체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법칙이 대응되는 세계의 모임 중, 우리 세계와 동일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세계만을 남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세계들이 현실세계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이 세계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구성된다.

세계 바꾸기

뒤집힌 세상

법칙은 행위를 구속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물리 법칙은 운동을 구속한다. 논리 법칙은 진술을 구속한다. 윤리 법칙은 실천을 구속한다. 이 구속은 이미 일어난 정당한 행위가 아니라, 곧 일어날 행위의 정당화에 관한 사실의 구속이다. 물리적 정당화는 자연에 일어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논리적 정당화는 추론의 건전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윤리적 정당화는 도덕적 평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믿음은 우리의 정당화 방식을 또한 구속하는 듯하다. 법칙에 의해, 자연적 사실의 예외 여부가, 추론의 건전성 여부가, 도덕적 합법성 여부가 갈린다. 즉 인간은 대응된 세계에 부과된 법칙을 통해 사건을 해석하고, 해석된 바를 하나의 사실로 구성한다. (그것이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한편 인간은 자신을 의식한다. 그 결과, 발화나 행위 등의 실천적 영역에서 인간은 부과된 법칙을 그 준거로 사용한다.

자기 의식이라는 습관이 참 무섭다. 칸트의 말대로 인간은 법칙과 사실을 각각 다른 세계에 두고 의식하는, 이른바 “이율배반”을 겪는 종이다. 그렇다보니 인간은 사실을 구성하는 육체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자기가 부과한 법칙에 맞추어 만들어 간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도덕적 행위”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영역에서는 법칙이 사실에 우선한다.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은 뒤집혀 있는 셈이다.

어떤 법칙에 근거하여 행위할 것이냐, 이것은 자기 결단의 영역처럼 보인다. 도덕적 법칙은 자연적 사실로부터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적 사실로부터 윤리적 당위가 나오지 않으므로 법칙은 선험적이다. 그런데 선험적인 것은 행위주체의, 기껏해봐야 그가 속한 언어공동체의 결단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법칙에 근거할지의 여부는 결단에 매인다. (물리 법칙은 사실을 어느 정도 참조하기에 좀 다르겠는데)

이 결단이 세계를 특정 법칙이 참인 서사에로 인도한다. 우리는 이 세계를 특정한 법칙 이야기가 참인 곳으로 간주하고, 그 이야기에 따라 행위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응에 따라 나름 세상이 바뀔 수 있는 셈이다. 우리의 세상 이해가 첫째로 바뀌고,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둘째로 바뀐다.

중요한 것은 비평이 아니라

이 결단은 언제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우선, 비평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생각이다. 비평은 참일 때에만 수용된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간주하는 세계는 구체적 사실과 참인 법칙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세계에서 비평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비평은 구체적 사실 속에서 특정 법칙을 발견하는 역할만을 할 텐데, 이 역시 창조라기보다는 발견에 가까워 보인다.

오히려 결단은 다른 이의 자기 표현에서 나올 것 같다. 표현은 사실을 구성하고, 모든 법칙은 사실을 참조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없다”라는 문장을 물리 법칙으로 간주하던 이는 비행기를 보고 종래와 다른 세계를 대응시켰을 것이다. 전혀 연역적이지 않음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논증을 보며 표준논리학을 강하게 믿는 이는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단, 비행기를 예외 사태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비형식적 추론을 그럴듯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관찰자의 승인에 근거한다. 이 승인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미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발견함에 따른 것이거나, 체계에서는 부정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승인한 것이거나. 후자의 경우가 창조적 결단에 해당할 것이다. 전자는 비평만으로도 발견될 수 있는 태도 전환이다.

물론 후자에도 비평적 과정이 개입할 수 있다. 그럴듯함을 규명하는 것은 비평의 영역에 속할 터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그럴듯함”은 비평이 아닌 자기 표현의 영역에 기초한다. 언뜻 이는 역설적이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형식화된 논리 구조가 일상 언어 사용자의 발화 가운데에서 발견되고, 철학자들은 그러한 발견을 체계화한다. 성도의 고백 속에서 하느님의 성질이 발견되고, 신학자들은 그러한 발견을 조직화한다. 지표적 인식 내용 속에서 모종의 법칙이 귀납적으로 발견되고, 과학자들은 가설 연역적 방식을 통해 그 법칙을 형식화한다.

비평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비평가들에게 문제가 될 것 중 하나는 “비평은 실천적 역량을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 나는 올바른 비평은 순전히 개념적인 것에 관한 참된 진술이라고 여긴다. 실천적 비평 내지 정치적 비판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런 주장은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에 따르면 비평은 전혀 실천적 의의를 갖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 반감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비평, 또는 비판이라는 것이 실천의 계기가 될 수 없으며, 시도해서도 안 된다고 제안하고싶다. 즉 실천을 위해 비평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라는 것이다. 왜 비판은 실천의 계기가 될 수 없는가? 비판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그 비판이 참된 진술에 근간해야 하는데 진술의 참됨을 정하는 기준은 언중에게 있기 때문이다. 왜 비평은 실천의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은 올바른 비평이 아닌 권위에 근거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비평에 관한 나의 신념을 반복해 본다. 비평은, 철학은, 신학은 무언가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바꾸는 것은 분석되는 대상이다. 비평은 대상을 분석하고, 그 대상에 대한 통념을 수정하길 요구한다. 그런데 이 수정은 창조적 수정이 아니다. 단지 이미 있던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비평은 사실을 재해석할 수도 있고 법칙을 수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재해석이나 수정을 승인하는 것은 공동체의 몫이고, 승인됨에 따라 이는 저항이 아닌 발견으로 간주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이 비평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본질을 간주할 수 있다면, 비판을 실천적인 행위로 여기는 것은 큰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실천을 비판에서 떼어내고, 실천의 계기가 정말로 될 수 있을 법한 것으로 비판을 대체하는 것이 낫다. 그 대체물은 자기 표현이다. 비판은 자기표현을 돕기 위해 도입된다. 한편으로는 비판 대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분석해서 표현을 돕고, 다른편으로는 표현 주체가 갖는 억견을 분석해서 모순 없는 관점을 갖도록 돕는다.

자기표현, 모두 말하기

파레시아를 다시 생각한다. 모든 것을 말해내는 것, 내가 그에 대해 갖는 모든 생각을 대담히 표현하는 것이 파레시아의 본질이고, 푸코는 바로 그 표현이 모종의 실천적 역량을 갖는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더 나아가, 그는 비평의 본질이 파레시아에 있다고 간주한다. 나는 전자를 인정할 수 있지만 후자를 인정할 수 없다. 비평이든 비판이든, 그것은 사실 주장이다. 그러한 주장은 논증적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어떤 것이 논증적이라면 참일 때에만 수용될 수 있다. 참일 때에만 수용될 수 있다면, 논증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반면 파레시아는 세상을 바꾼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논증이 아니며, 비평이나 비판의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다.

파레시아의 능력은 언어적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표현을 통한 발화효과에 있다. 화행speech-act은 진리를 말하지 않지만 세계에 영향을 준다. 어떤 것을 선언할 때, 그 선언이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지고 이에따라 승인된다면, 선언은 그것을 승인한 공동체에게 어떤 존재론적 결단을 요구할 터이다. 이런 것은 분명히 “파레시아”라는 것의 역할이다. 반면 이 역할은 분석에 기반하는 비평 내지 비판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비판의 갈래로 여겨질 수 없어 보인다.

실천을 비판의 고유한 영역에서 떼어낼 때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이겠는가? 철학적 의의와 실천적 의의 모두를 찾을 수 있다. 철학적으로는, 실천적 요구를 하지는 않지만 대상을 충실히 해석하는 비평을 비평으로 볼 근거를 얻으며, 좋은 비평과 나쁜 비평을 구분할 근거를 얻는다. 실천적으로는, 꼭 “맞는 말”이 아니고서도 실천적 진술을 할 근거를 얻으며, 대상의 면밀한 조사 없이도 “나의 의지”만으로도 실천적 진술을 할 근거를 얻는다. 이러한 진술이 오히려 파레시아의 본질이다.

실천하고자 하는 이는 비평을 넘어 자기표현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또, 노골적으로 실천을 조장하지 않는 비평의 가치를 폄훼하지 않을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어떤 사실에 관한 태도에만 머무를 때엔 새로운 사실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에게 새로운 사실을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 역시 부조리하다. 비평과 파레시아는 이렇게 분기를 이룬다.


  • 김세화. (2010). “해석학적 허구주의”, 철학적분석 21, pp. 1-26.
  • 오세정. (2010). “신화, 판타지, 팩션의 서사론과 가능세계”,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47, pp. 429-453.
  • Lewis, David K. (1978). “Truth in Fiction”,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15. 1, pp. 37-46.
  • ______. (1986). On the plurality of worlds.
  • Tidman, Paul. (1996). “The Justification of A Priori Intuitions”,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56.1, pp. 161-171.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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