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의 복음서 1장 1~14절, 공동번역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개정 공동 성서정과(Revised Common Lectionary)에 따르면 2020년 12월 25일은 나해(Year B)의 성탄절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날의 복음서 본문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위에서 인용한 본문, 요한의 복음서 1장 1~14절이다.

한편으로 이 본문이 예수의 탄생을 기념해야 하는 성탄절의 본문으로 사용된 것은 조금 의아하다. 나는 이 본문에서 일종의 제문(祭文)의 형식을 본다. 복음서 기자는 마치 ‘그의 삶은 이러했고, 그의 삶 가운데에서 진리가 드러났으나 우리는 그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는 후회와 슬픔의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죽은 이를 기리며 끝으로 그의 영예를 높이듯, 그에게 은총과 진리가 가득했다는 감상을 남기며 기념사를 마친다. 이 울적한 기념문이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인 것인가?


구세주의 탄생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들)을 생각한다. 그의 탄생은 돌아보자면 전혀 의미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로 신의 현현이었건 아니건 예수라고 우리가 부르는 그 인물은 기원년 전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이끌기는 했지만, 결국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부활하고 승천했건 아니건 죽음을 이겼다고 우리가 말하는 그 인물은 자신을 사로잡았던 이들에게 보복을 하고, 이 땅에 보복적 정의를 실현하기는커녕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다만 그의 뜻을 잇는다는 몇몇 사람들만이 남았고, 그들의 의지가 이어져 지금까지의 기독교 세계를 만들어 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의 탄생은 의미가 있다. 노동자의 자녀로 태어나 지식인 계층에 올랐고(이 과정이 모세의 삶과 정확히 반대라는 것은 흥미롭다), 다시 그가 속했던 민중계급의 삶을 치유하고자 한 그 사람이 정말로 구세주라면, 복음서 기자가 말하듯 그 사람이 정말로 신의 현현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무한정한 거리가 좁혀질 수 있다는 증거를 얻게 된다. 모든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어떤 일들은 억겁의 시간이 지나야만 다시 이뤄지지만, 그럼에도 한 번 일어난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앞선 신의 현현을 우리는 허망히 놓쳤다. 그러나 이 일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그런 일이다.


다시 요한의 복음서를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며 동시에 범죄자로 사로잡혀 죽은 구세주에게 바치는 제문을 읊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것은 다 의미가 있다. 우리가 구세주 탄생을 기념한다는 것은 단지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이 한 번 일어나고 말 일이 아니라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그리고 다시 일어나고 말 그러한 일임을 믿으며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이는 죽은 이의 전기를 통해 그의 삶을 기념하는 것과 꼭 같은 일이다. 마치 어떤 이의 가장 큰 업적을 기념할 때 그의 삶을 읊듯, ‘신의 현현’은 예수의 탄생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기에,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며 그의 삶을 읊는다.

왜 이른바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가? 그의 탄생 자체가 우리의 현재적 행복을 확언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의 가르침이 위대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이루었다는 위대함이 지금 우리의 곁에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탄생이 열어준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과 그리움 속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탄생이 정말로 일어났었음을 믿으며, 그가 열어준 기회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리고 다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 속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


이제 내가 이해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이미 왔었지도 모를 행복의 기회를 놓친 우리의 과거를 후회하고 뉘우치는 것. 그리고, 다시 그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믿으며 우리의 미래를 희망하고, 준비하는 것. 요한의 복음서가 알리는 구세주 탄생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런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후회와 그리움, 그리고 희망의 멋진 조화가 있는 성탄절이 되시길.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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