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러시아방주〉(소쿠로프, 2002)를 본 이후로 미술 작품을 볼 때면 카메라가 된 것처럼 움직인다. 서서히 달리-인Dolly-In 했다가, 곧이어 작품을 중심으로 회전 트래킹을 하듯 이동한다. 작품의 질감을 느끼고, 2차원적 표면과 3차원적 깊이를 실감하고, 이내 부유한다.

문득 이 주제에 대해 말하고 싶어졌다. 영화라는 예술은 다른 예술 장르들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19세기 말에 프랑스와 미국에서 영화가 ‘태어났다’. 그 명확한 출생만큼 영화는 예술이라는 권좌에 자리하기 위해 기존의 예술들과 분명하게 관계맺는다. 영화는 안(내용)과 밖(형식)으로 다른 예술들을 종합, 변형하며 수용해 왔다. 요컨대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무엇을 예술이라고 부를 것인지를 일축하고자, 리치오토 카누도가 헤겔 미학으로부터 차용한 ‘n번째 예술’ 개념을 덧붙이겠다. 카누도는 예술의 범주를 분류하면서 건축, 회화, 음악, 문학, 연극, 무용에 영화를 추가한다. 영화는 상기한 예술의 각 분야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단순히 종합인 것만은 아니어서, 그것들과 관계할 때 무수한 양태를 드러내 보인다. 영화는 기존의 예술을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영화와 다른 예술 분야들의 교접 양상을 확인하면서, 그들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아왔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영화는 한 눈에 보아도 다양한 예술들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움직이는 사진이거나 그림이며, 연극의 영상화인 듯하다. 또한 서사를 손에 쥐어 문학과 관계하고, 음악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는 무용 혹은 조각과도 연관성이 보인다. 건축과 미장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더 깊게 이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관계는 단순히 영화가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다’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선 영화의 시간적 변화 양태를 파악해보자. 영화는 그 자체로 사진들의 연속으로부터 나왔다. 마이브리지와 마레가 각각 달리는 말과 새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고속연사로 촬영했을 때, (그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는 도래할 미래 예술의 암시였다. 이후 영화는 연극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가 클로즈업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또한 영화는 연극을 찍는 과정에서 서사를 받아들였고, 이는 자연스레 문학적인 영화를 주류로 자리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이전 글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연극 : 배우 중심의 다큐멘터리 연극 제언”을 참고할 수 있다.)

사진이 발명된 후, 회화는 리얼리즘의 구현을 사진에게 양보하고 그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전 글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나는 영화와 연극의 양상이 이와 유사하다고 본다. 요컨대, 영화가 발명된 후 연극은 내러티브를 영화에게 양보하고 그로부터 해방된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가 연극의 전철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극적인 범주들과의 관계가 다시금 맺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러티브의 문제는 회화, 음악, 무용, 건축 등에서도 분명 논의의 대상이지만, 언제나 주변부에서만 그랬다. 내러티브는 분명하게 문학으로부터 연극과 영화에로 뻗어나갔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연극과 영화와 문학 간의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였고 그들 간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도록 한 것일까?

내러티브는 궁극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장르이다. 소설은 시간을 다룬다. 연극은 (현재라는) 특정한 시간 속에서 운동을 다룬다. 영화는 운동이 속한 시간 자체를 다룬다. 심지어 시-연극-영화라는 연쇄에 있어서도 시간은 어떤 기준이 되는데, 적어도 그들은 모두 앞에서 뒤로의 진행 방향을 통해 감상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행과 연, 러닝 타임 등으로 물리적인 시간성을 갖는다. 이때에는 당연스럽게도 음악, 무용 또한 영화로의 연쇄에 포섭된다.

영화는 연극과의 유사성을 통해 내러티브를 손에 넣었고, 성문화된 시나리오들은 소설과의 유사성으로 인해 소설의 각색으로 눈을 돌렸다. 영화에서의 소설 각색을 옹호하는 수많은 이론가들은 영화가 훌륭한 소설을 망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그저 소설을 하나의 원재료로 사용할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소설은 영화의 내용에 관계하는 것이며, 오히려 영화는 그러한 소설의 내용을 새로운 장소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또 다른 통찰로 이행할 수 있다.

*

영화와 회화의 관계는 좀 더 특별하다. 우선 앙드레 바쟁이 제시한 연쇄에 따르면 미라-회화-사진-영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그들은 인간의 보존 욕구, 즉 리얼리즘에의 욕망으로 묶인다. 그러나 영화가 등장했을 때 회화는 이미 사진에 의해 그 욕망을 잃어버리게 된 상태였다. 오히려 회화와 영화의 관계는 발터 벤야민의 그 유명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더 잘 드러난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의 가치를 ‘제의 가치’와 ‘전시 가치’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다. 기존의 예술 작품은 소수의 고위 귀족들만 향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찬양, 숭배의 결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가치는 작품의 단순 복제(회화 작품의 모작 등)가 횡행할 때에도 여전히 가려지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원본이 여전히 원본으로서 ‘아우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진이 등장함에 따라 예술 작품은 그 가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진이란 것은 카메라에 맺힌 상을 필름에 감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필름은 무수히 많은 사진으로 인화된다. 즉, (마치 판화와 같은 방식으로) 사진은 그 자체가 원본이면서도 유일하지 않다는 모순이 생긴다. 이는 디지털 방식의 사진이 보편화되면서 더욱 심화된다. 적어도 원본이라고 주장해봄 직했던 ‘물리적인 유일체’, 필름이 사라지고 최초의 상이 태생적으로 복제물의 모습을 띤다. 특히 직접적으로 영화가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렇듯 기술복제의 ‘아우라 상실’은 명백해진다. 영화는 애초에 동시다발적인 상영을 목적을 띄고 제작되기에 그 자체가 복제의 산물이다.

비록 (기술 복제적이지 않은) 회화를 비롯한 예술 작품 전반이 여전히 원본으로서의 ‘제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사진으로 담은 작품과 미술관에서 원본을 경험한 차이를 떠올려보라), 분명 사진과 영상에 의해 그러한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더욱 보여지기 시작했고, 예술 작품에 있어서의 ‘전시 가치’가 중요성을 띠기 시작했다. 사진과 영화에 이르러서 아우라는 소멸되어버린다.

이 속에서 현대의 (기술 복제적이지 않은) 예술 작품은 독특한 실험을 행한다. 20세기 초 뒤샹에 의해 전시된 일련의 ‘레디메이드’ 작품들과 그 이후의 팝아트 경향은 복제 가능성과 예술의 가치에 대한 관계를 새롭게 전도시킨다. 기술 복제의 시대에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지속적으로 손상되면서 미술계는 예술가(의 재능)로부터 작품으로 주입되는 원본성에 의문을 품는다. 다다이스트들과 팝아티스트들은 예술에 있어서의 창조를 유보하고, 그 자체로 복제의 산물인 공산품을 전시한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각종 광고와 선전에 의해 다시금 ‘제의 가치’를 획득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그 결과 예술 작품은 특정 작가가 무언가를 ‘전시함’에 ‘아우라’를 부여하기로 ‘합의’하는 것이 된다. 예술은 광고와, 작가의 권위와, 미술관이라는 합의적 장소에 의해 제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다큐멘터리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2010)는 이러한 현대 예술의 경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영화가 활개 치기 시작한 1910년대부터 뚜렷해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90년대, 디지털 영화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때에, 데미안 허스트는 마침내 생명(상어)을 방부처리하여 전시하기에 이른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1991), 사진에게 자리를 내준 미술이 다시금 최초의 리얼리즘(방부된 시체, 미라)으로 돌아간다.)

선전이니 합의니 하는 것들은 꽤나 자극적인 워딩으로서, 마치 거대한 산업 시장에 의해 호도되는 예술의 패배를 주장하는 것처럼 만들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경향은 제의 가치를 일상적인 것들로 뻗어나가게 한다. 따라서 나는 예술 작품에서의 아우라 상실을 기술 복제적인 것들에 있어서 만으로 한정하고, 이외의 것들에서는 그 소재를 달리한 채 아우라가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상황이 이렇다면, 과연 기술 복제 작품은 영영 아우라를 담지하지 못한 채, 전시 가치만을 가진 채 (벤야민이 말하길) 예술이 아닌 상태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24프레임〉(2017)을 통해 나는 영화(그리고 사진)에서 드러나는 아우라를 제시하고자 한다. 초기의 카메라는 긴 노출 시간이 필요했고, 사람은 그 앞에서 오랜 시간 부동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 벤야민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진이 인간의 영혼을 담아냄으로써 아우라의 흔적을 지닐 수 있었다고 말한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그리고 외젠 아제가 마침내 인간의 형상을 자신의 사진에서 밀어냈을 때, 아우라는 사라졌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는 이를 정면돌파하며 영화에서의 아우라를 복원시킨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24프레임〉은 수 십년간의 영화 경력의 마침표이면서, 영화에 대한 그의 사유의 집대성이다. 그것은 기존의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과는 다른 냄새를 풍기며, 제목마저 직접적으로 그의 영화적 사유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다. 영화는 긴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I always wonder to what extent the artist aims to depict the reality of a scene. Painters capture only one frame of reality and nothing before or after it. For “24 Frames” I started with famous paintings but then switched to photos I had taken through the years. Included about four and half minutes of what I imagined might have taken place before or after each image that I had captured.

영화는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1565)을 Frame 1[1]로 시작한다. 그리고 브뤼겔의 그림은 현대의 기술에 힘입어, 눈 내리고 강아지가 뛰어다니는, 운동하는 이미지로 변한다.

이후의 영화 속 4분 30초의 프레임들은 이렇듯 사진에 편집 기술을 가미해 앞과 뒤를, 즉 시간을 주입시킨다. 영상으로 찍지 않고 굳이 그림과 사진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작품들 속에 숨어있는 영혼을 시간 속에서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입의) 과정을 담은 24번째 프레임이 있다. 한 편집자가 영화 편집물을 렌더링한 채 책상에서 선잠을 자고 있다. 창밖의 어둠이 잦아들고, 그녀 어깨 너머의 모니터에서 연인들의 사랑이 프레임 바이 프레임Frame by Frame으로 힘겹게 ‘탄생하고 있다.’ 요컨대 회화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영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하나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아우라는 여전히 상실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고 키아로스타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영화는 내용적으로도 다양한 예술들과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피상적인 수준에 그친다. 우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차용된다. 연극 또한 〈맥베스〉, 〈헨리 5세〉 등의 고전작품에 사실성을 덧대어 영화로 재탄생한다. 그러나 영화가 다른 예술을 다룰 때에는 그것은 언제나 예술가와 관계되어 버린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피터 웨버, 2003)와 같이 특정한 작품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도 그 안에 얽힌 예술가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내러티브로 소비한다. 물론 예술가의 일생이란 통상적인 삶과 달리 드라마틱한 경우가 많으므로 언제든 영화의 소재로 쓰일 수 있으며, 그것이 문제시될 필요는 없다. 허나, 이러한 영화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작품으로까지 다가가고자 할 때는, 즉 교육적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는 문제가 된다. 클림트(〈클림트〉), 고야(〈고야의 유령〉) 등의 화가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맹 가리(〈새벽의 약속〉), 제인 오스틴(〈비커밍 제인〉) 등의 소설가, 랭보(〈토탈 이클립스〉) 등의 시인, 모차르트(〈아마데우스〉), 이브 생 로랑(〈이브 생 로랑〉), 코코 샤넬(〈코코 샤넬〉)… 수 많은 전기 영화들이 있고, 그들을 다룬 전문적인 다큐멘터리들도 많다. 특히, 에곤 쉴레(〈에곤 쉴레 : 욕망이 그린 그림〉), 게르하르트 리히터(〈작가 미상〉) 등을 다룬 영화들은 종국에 그 예술가들의 작품으로까지 나아감으로써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목적’이 짙어진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피카소의 비밀〉(1956)은 분명 피카소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그것은 피카소를 다룬 영화라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순전히 피카소의 작품만을 다룬 영화다. 바쟁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종래의 주요한 미술영화들은 주로 이러한 개체발생학적 관심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이런 관심은 정당하다해도 진부하며, 그 성질은 미적인 것이 아니고 교육적인 것이 되고 만다. 〈피카소의 비밀〉 가운데에는 중간적인 각 단계가 최종적인 완전성(충족성)에로 향해 나아가는 길이 그렇듯이, 종속적이며 좀 열등한 현실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미 작품 그 자체, 그렇지만 화가가 멈추어 서고 싶을 순간까지 회한으로 가슴이 에어진다거나, 오히려 계속 변신이 되어간다거나 하게 운명 지워진 작품 그 자체인 것이다.

바쟁 1958

예술가는 예술 작품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리고 영화는 작품(결과)에 있어서 숨겨져 왔던 ‘과정’ 자체를 예술로 만들기에 이른다. 피카소는 이 영화를 통해 ‘그림 위 그림’과 같은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얘기한 소설-연극-영화의 시간성을 회화라는 차원에까지 불어넣는 독창적인 시도이다. 바쟁은 이렇게 말한다. “영화만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불연속적인 것의 조잡한 근사성을 연속적인 시상의 시간적인 리얼리즘에로 이전시킴으로써 마침내 지속 그 자체를 눈에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바쟁 1958)

다니엘 위예와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1968) 또한 이와 유사하다. 영화는 바흐라는 예술가에 대한 전기적 설명을 최소로 하여 나레이팅하며, 대부분의 분량을 그의 작품 연주에 할애한다. 음악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시각이 중요하지 않기에, 음악은 (교육적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영화에서 대부분 그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지 않아왔다. 음악은 언제나 배경으로 영화에 스며있었기에 구태여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을뿐더러, 굳이 영상 속에서 악기를 연주한다는게 도무지 정당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들이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연대기〉에서 이러한 방식을 고집한 이유는, ‘예술가는 예술 작품으로 말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위예와 스트라우브가 배우를 선정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흐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고 연주할 수 있는가였다. 바흐 전문가였던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바흐가 직접 연주했던 그 공간에서 바흐의 작품을 연주한다. 사실상 영화는 ‘굳이’ 영화라는 합의 속에서 바흐의 작품이 흐르는 과정을 보여줌에 다름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귀로 음악을 들을 때와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보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영화들을 ‘큐레이팅 필름’이라고 칭하고자 한다.

알랭 레네의 영화는 아예 문자 그대로 회화 작품 속으로 뛰어든다. 〈반 고흐〉(1948), 〈폴 고갱〉(1949), 〈게르니카〉(1950)는 각각 고흐, 고갱, 피카소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각자의 작품 이미지들만을 몽타주하고 그 위에 나레이션을 입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회화 작품은 프레임에 갇히는 대신 스크린에 영사되면서 세계의 일부로 확장된다. ‘프레임은 구심적이요, 스크린은 원심적이다.’라는 바쟁의 그 유명한 말에 따라, 회화 작품은 스크린에 영사됨을 통해 프레임 바깥의 세계를 획득한다. 〈반 고흐〉에서 카메라는 닫힌 창문으로 줌인한다. 이어지는 몽타주는 〈고흐의 방〉에서의 창문으로부터 줌아웃되어 방 전체를 드러낸다. 회화 작품 내에서의 이러한 카메라 무빙은 예술가의 작품을 그의 안식처로 만들며, 그 속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다.

〈러빙 빈센트〉(2017)의 실험은 이제 예술가의 세계에 후배 예술가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만들기에 이른다.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러빙 빈센트〉는 107명의 화가들이 총 6만 장 이상의 그림을 프레임 단위로 직접 그려 제작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예술가의 족적을 찾기 위해 직접 작품 속으로 뛰어들어 작품이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

마지막으로 소쿠로프의 〈어머니와 아들〉(1997)의 엔딩을 이 글의 엔딩에 제시한다. 부디 여러분도 영화가 이제 우리의 현실이 예술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음을 느끼길 바란다.


각주
[1] 〈24프레임〉은 각각의 4분 30초의 분절된 사진-영상물을 Frame 1, 2, 3…로 제시하고 있다.

참고한 텍스트
─앙드레 바쟁. 2013.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서울: 사문난적.

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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