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제들로부터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지금까지 필진이 다뤄 온, 푸코의 의미에서) “비평”에는 진보와 진리가 모두 실재하며, 우리는 진보나 진리를 현대적 방식으로 재이해함에 따라 어떤 비평을 다른 비평보다 진보되었다고 평가할 기반을 얻는다. 한편 우리는 실천적 이유에서 어떤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신화적 상상력인데, 그것의 어떤 특성은 기묘한 인식론적 문제를 일으킨다.” ⎯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 문제가 이후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마지막 <보론>에서 나는 단현의 <불온-되기>의 어떤 한 구절을 지목해 “담론 바깥의 직관이 비평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논한다. 나에게 주어진 지면은 그렇게 넓지 않다. 이에 관한 나의 논의는 아쉽게도 아주 간략하게만 이루어질 것이다.


비평

모든 필진이 한번씩 인용했으니, 마지막으로 내가 이 구절을 인용할 차례인 듯하다. 앞선 글들에 따르면, 푸코가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모양이다. 그에 따르면 비평의 요지는 “어떻게 하면 이런 식으로, 이들에 의해서, 이런 원칙들의 이름으로, 이런 목표들을 위해, 이런 절차를 통해 [···]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단현, <불온-되기>에서 재인용.)에 있다. 아쉽게도 “여정에게 ‘푸코적 지식’은 많이 없다.” 그러나 나는 잘 번역된 모든 문장이 나름의 내용을 갖고 있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의 문장을 표면적으로 파악해 볼 생각이다.

여기에서 “통치성”은 누군가가 우리를 전자 광선으로 통치하거나, 군대가 우리를 감금한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개념의 통치성”이다. 따라서 논의의 주제를 “개념들로부터 통치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축소하자. 이에 답하려면 먼저 “개념으로부터 통치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개념”으로부터 시작하자. 여기에서도 개념의 통치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개념을 갖도록 전자 광선을 쏜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조금 더 복잡한 분석을 필요로 할 것 같다. 다행히도 개념은 상당히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개념이 무엇을 통치하느냐에 대해 간단히 분석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해보자.

개념을 구성하는 것은 이름, 개념적 외연, 개념적 내포이다. 셋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제시된다: “‘여정'(이름)은 “여정”(외연)을 지시체로 갖는다.”(내포) “나는 <저것>(외연)을 볼 때 R(내포)을 표상한다.” 개념의 통치는 어느 사이에 있는가? 이름과 외연 사이에 있는 듯하지는 않다. 모든 이름은 임의로 부여된 것이며, 외연에 할당된 이름은 그 자체로는 언제나 수정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이하의 모든 ‘통치’를 ‘꿸뚫’로 정정한다고 선언한 뒤에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무의미하다. 이름은 자의적으로 개념과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름과 내포 사이의 연관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개념의 내포에는 “토끼는 한국어 표현으로 ‘토끼’를 갖는다”와 같은 것을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장에 포함된 “한국어 표현으로”가 보여주듯, 하나의 개념적 내포는 다양한 언어 체계에서의 단어에 대응될 수 있다. 따라서 이름과 내포는 그 자체로 강력한 연관을 지니지는 않는다.

한편 개념적 내포 자체는 푸코가 지적하는 “개념의 통치성”(그런 것이 있다면,)에 어느정도 기여할 것 같다. 내포는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어떤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행동에 제한을 형성하는 방식을 ‘통치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자면, 내포는 어느 정도의 통치성을 형성한다. 그런데 무슨 통치성을 형성하는가? 방금 드러났듯, 어떤 개념이 올바르게 사용될 방식에 대한 통치성을 형성한다.

그 방식이란 두가지이다. 1) 하나의 이름을 통해 어떤 것이 지시되는 방식 2) 이름들의 연언을 통해 그것이 정합적이 되는 방식. 하지만 엄연히 2를 ‘통치성’의 예시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정합성을 보장하는 이름 사이의 관계란 아주 형식적인 논리의 틀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일율과 모순율이 보장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는 예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는 통치성과 무관한 우리의 내적 한계이다. 이제 남는 것은 1이다. 푸코의 “통치성”은 개념적 내포를 그 대상에게 연결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방식은 공동체에게 있는가 개인에게 있는가?) 그리고 푸코는 그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비평의 핵심임을 주장한다. 문제는 왜 비평이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두 사실로부터 들어온다. 한편에서 비평이 대상으로 하는 개념 체계는 현실을 잘 모사할 때(또는, 그 자체로 현실일 때)에만 유용하다. 다른 편에서, 언어가 대상으로 하는 각 개인의 실존적 자기의식은 스스로와 스스로에게 연결된 내포가 일치하지 않을 때 거부감을 느낀다. (“날 오해하지 마!”) 이 중 전자에 “모든 언어체계는 모종의 유용성을 가져야 한다”라는 원칙이, 후자에 인간의 자유와 민주적 공동체의 의무가 각각 부과될 때 푸코가 말하는 “거부”는 거부 의무가 된다.

언어철학자의 입장에서, 개념의 내포가 그 개념이 실제로 사용될 때 지시하는 외연에 적합한 연관을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는 부조리하다. 따라서 객관적 실재에 주목하는 비평가들과 과학자들은 이 연관이 어떻게 하면 회복될 수 있을지를 논구한다. 실존철학자의 입장에서는, 개념의 내포가 그 개념으로 지시되는 자의식 있는 존재자들의 자기 의식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 개념을 “부조리함”으로 부른다. 따라서 주관적인 것, 미적 경험, 가치와 같은 것에 주목하는 비평가들과 문학가들은 이 부조리함에 저항한다. 결과적으로는 양쪽 진영은 실재와 개념의 연관이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이 지점이 비평의 본질을 드러낸다. 비평은 기존의 대응되는 개념적 연관이 실재하는 대상(즉, 실체와 속성)들 사이의 연관을 잘 보존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서 “연관”은, 프랑스 식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또는 기표와 기표 사이의 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현이 인용하기로, 푸코는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라는 저항을 비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를 관찰자가 생각했다면, 그 관찰자는 과학에 관여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를 느낀 어떤 사람의 부당한 감정을 해소해주기 위해 제3자가 관여한다면, 그 관찰자는 문학에 관여한다. 두 경우에서 모두 지금 작동하는 어떤 연관의 무용함이 비평에의 요구를 만든다. (그 요구에는 심지어 “오늘날 비평이 무력하다”와 같은 오해도 있을 것이다.) 즉 통치성의 거부는 그 통치에 거부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둘 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와 관련된다. 개념이 내적 연관을 갖지 못할 때, 개념 사용자들은 자기 생각을 표현할 자유를 잃는다. 개념이 실존적 부조리를 낳을 때, 지시되는 개별자들은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잃는다. 저항은 어떤 체계가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기에 발생하는 의지 표명 행위이다. 보았듯 우리는 통치성으로부터 저항한 것이 아니다. 통치성에 대해 반기를 세웠지만, 실제로 우리가 저항한 원인은 그것의 부조리함이다. 비평을 통해 부조리가 극복된다면 그 비평은 성공적이다. 그리고 성공한 비평은 개념 체계의 진보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공한 비평이 제안하는 수정된 체계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덧) 외부로부터의 ‘수학 비평’이나 ‘논리 비평’이 불가능한 이유, 윤리적/형이상학적 논쟁이 항상 동어반복적이 되는 이유를 이 단락에서 흘깃 볼 수 있다. 수학이나 논리학은 순수히 개념적이고 형식적인 체계이다. (그 형식이 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는 일단은 논의 바깥에 있다.) 그것들의 체계는, 그것에 대응시킬 사실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실의 연관 여부에서만 판단되는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윤리적 논쟁이나 형이상학적 논쟁 역시 그것에 대응하는 비자연적 사실이 있든 없든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관찰할 수 없기에 관찰 가능한 것은 개념적, 논리적 연관들 뿐이다. 그런데 윤리적 세계나 형이상학적 세계로 상상될 수 있는 세계의 수는 무한하다. 그런데 자연적 관찰이 가능한 어떤 하나의 사실도 없으므로 그 세계 중 어느 하나를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윤리학이나 형이상학에 대한 비평이 언제나 실천적 비평에만 머무는 것은 이로부터 나온 한계상황이다.

진보

위의 논의에 따라, 비평에서 ‘진보’가 갖는 적어도 하나의 의미가 나온다. 어떤 비평이 성공적이려면 그 부조리함을 지적하고 교정해야 한다. 성공적으로 지적하고 교정해 냈다면 그 이후의 상황은 이전 상황보다 낫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비평이 전제하는 모종의 진보 관계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다른 종류의 진보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두 비평 사이의 진보이다.

이것은 사실 그 비평들이 각각 갖고 있는 개념 연관 체계 사이의 진보관계이다. 그러한 관계는 정말로 있는듯 보인다. 최소한 초등학생의 독후감보다 대학교수의 비평 논문이 더 설득력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그러한 관계가 선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진보 관계란 무엇인가? 이하에서는 이에 대해 논한다.

하나의 체계가 다른 체계에 비해 진보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체계 S1과 S2가 진보관계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S1은 S2에 대해 진보이다. iff S1은 S2의 역할을 더 효율적으로 대체한다.>* 이렇게 정의된 진보는 비추이적이고, 비반사적이고, 비대칭적이다. 비반사적이고 비대칭적인 이유는, 진보의 조건에 두 체계의 대체 가능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 관계에 있는 두 체계가 별개의 것이어야 함을 함축한다. 따라서 진보는 반사적 관계나 대칭적 관계로 이해될 수 없다. 이 점은 상식적이다.

문제가 되는 가정은 진보가 추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S1에 대해 S2가 진보했는데, S2에 대한 진보인 S3는 진보가 아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괴상하지만 말이 된다. 고대 재판 제도와 현대 재판 제도는 계보적으로 볼 때 진보관계로 이어져 있지만, 그 둘 사이에는 엄밀히 말해 진보의 관계가 있다고 하기 어렵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생물종의 계보를 그릴 때, 하나로 이어진 선 안에도 현생종이 둘 이상 있는 경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둘은 진보의 관계로 이어져 있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동시대에 남아있다는 점에서 직접적 진보관계를 구성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진보 관계란 두 체계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고유한 관계이다. 이는 아주 괴상한 조건이다. 이상의 진보 정의에 따르면 여러가지 형태의 진보들을 대체 하나의 “진보”라는 유개념 안에 둘 수나 있는 것인가? 이렇게 괴상한 관계로 진보가 제시되는 까닭은 진보 여부를 결정짓는 “효율성”이 통시간적으로 동일한 기준을 갖고 있지 않은 탓이다. 효율성의 기준을 아무리 보편화하더라도 <S1이 S2에 대해 더 효율적이다. iff 정해진 문제들에 있어 S1이 S2가 해결하는 문제들을 포함한 더 많은 수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상의 보편화는 불가능해보인다. “정해진 문제”란 결국 효율성을 판단하는 시점의 정치적 공동체에 따라 정해질 텐데, 그 외연이란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결정되므로 그렇다.

대체를 결정하는 바로 그 시점, 대체를 결정하는 주체, 그 주체들의 믿음 상태나 욕구 상태 등과 같이 매우 주관적이고 비인지적인 데에서 효율성이 판단된다. 진보를 고유한 관계로 만드는 것이 이러한 이유이다. 이상을 고려하여  가장 보편화할 때 진보의 정의는 이런 형태일 것 같다: <S1은 S2에 대해 진보이다. iff S1은 S2의 역할을, 대체 당시의 정치적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여긴 문제들에 있어 S2가 해결하는 문제들을 포함한 더 많은 수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대체한다.> 이렇게 정의한다면 어떻게든 진보를 하나의 유개념으로 볼 수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진보를 정의해볼 때 1167년 개경의 여정은 맥북프로 2017년 모델이 주판보다 진보했다고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정말로 그렇지 않을까?)

누군가는 내가 “효율적이다”라는 표현을 도입하여 결국 진보가 “권력”에 의존함을 보인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진보는 권력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존관계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상기했듯 새로운 체계로 옮겨가는 것은 언제나 권력의 실현을 동반해야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실현 자체를 두려워한다면 어떤 것도 실현할 수 없다. 심지어 다양성조차도 다양성을 허용하는 권력이 작동해야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현상이 세계에 일어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항의 원인은 권력 자체가 아닌 부조리에 있다. 만일 자신이 형성한 어떤 체계가 실현되는 것이 권력의 실현을 동반한다는 이유로 그 체계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어떤 체계로 실현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현재의 체계를 부조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체계로부터 저항할 것이다. 모든 저항은 다음 시대의 체계를 포함한다. 즉 권력 자체에 대한 저항에도 일종의 권력욕이 전제되어야 하며, 저항은 그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다. 무질서에 의거한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무질서성을 긍정하는 체계가 요구된다. 그렇지 않다면 엄격한 질서와 그로부터 나오는 부조리를 막을 근거를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는 이른바 “권력”이라는 것을 근거로 비판될 수 없다.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공허하다. 그의 주장이 일관되려면 그는 어떤 저항도 긍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신이 몸을 사용하면 죄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염세주의자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염세주의자는 자신이 몸을 사용해도 죄를 짓지 않을 세계를 만들 힘도 없다. 마찬가지로 진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어떤 부조리도 해결할 수 없다. 어떤 부조리를 해결하고 싶다면, 최소한의 진보 개념은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진보’라는 언어적 표현을 통해 제시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리고 만일 그 개념이 수용된다면, 진보의 정의로부터, ‘문제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그 조건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진리가 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과학 체계가 다른 체계에 비해 효율적인 것은 그것이 다른 체계보다 많은 진리를 설명해 내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적 흐름이 다른 사상적 흐름에 대해 진보인 것은 그것이 다른 흐름보다 더 많은 진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비평이 다른 비평보다 진보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전의 비평들보다 더 많은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독후감보다 대학 교수의 비평 논문이 더 훌륭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진보에 대한 이런 방식의 정의는 앞서 내가 <진보에 대한 옹호>에서 지지한 바 있다. 해당 글에서의 표현으로는, “어떤 체계에 대한 다른 체계의 진보는 동일한 문제들에 대한 더 큰 효율성이다.” 나는 우리가 어떤 문제 사건을 겪은 뒤 얻는 변화가 반드시 체계에 대한 진보를 만든다고 확신한다. 예컨대 윤리적 문제 사건을 겪은 뒤에는 윤리적 논의와 숙고를 통해 변화된 윤리적 기준을 얻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어떤 윤리 체계가 다른 체계에 비해 효율적이라는 것을, 현재의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 따라서 현재 체계과 직전과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면 언제나 현재 체계는 직전 체계에 진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과적 연관이 아주 멀거나 존재하지 않는 두 체계 사이에서 진보 관계가 잘 성립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상기했듯, 진보는 추이적 관계가 아니다.

진리

이전 단락에서 나는 하나의 체계가 다른 체계에 대해 진보했다는 것은 하나의 체계가 다른 체계보다 더 많은 진리를 담고 있음을 통해 보장된다고 주장했다. 더 많은 진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진보의 정의가 될 수는 없다. 단순히 진리의 목록이 더 많다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소유한 체계가 더 적은 진리의 목록을 가진 체계를 대체한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율성 조건은 ‘더 많은 진리 소유 조건’과 사실상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효율성 조건을 보편화하여 “정해진 문제들 중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를 진보의 한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더 많은 진리 소유 조건과 다르지 않다. 공동체에게 유의미한 진리를 더 많이 소유할 때, 그 체계는 “~는 ~인가?”의 형식으로 제시된 문제를 더 많이 풀 수 있다. 또한 정해진 문제들 중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 문제들과 관련된 진리 목록에 있어 진보된 체계는 더 많은 진리를 갖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에 제시한 비평의 진보 조건에서 “진리”를 “공동체가 유의미하게 여기는 진리”의 생략으로 본다면, 그 조건은 타당하게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는 질문은 무엇이 진리의 목록을 결정하냐는 것이다.

각각의 시대는 다른 진리를 갖는다. 대표적인 이유는 서로 다른 체계는 다른 진리 목록을 갖는다는 데에 있다. (나는 서로 다른 “실재”를 갖는다고 하지 않았다.) 콰인W. O. Quine은 <말과 대상Word and Object>에서 이른바 “번역 불확정성 논제”를 제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든다. 당신은 당신네 나라에서 어떤 섬에 최초로 닿은 탐험가이다. 그곳에서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는데, 토착민 한 사람이 “가바가이!”라고 외친다. 당신은 이제 ‘가바가이’가 〈토끼임〉과 같은 속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가바가이’가 〈하얀색임〉이나 〈동물임〉의 속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관찰하는 사태만을 두고 보았을 때 셋 중 어떤 해석이 ‘가바가이’의 번역으로 옳은지는 확정될 수 없다. 공교롭게도 그 섬의 주민들이 토끼를 볼 때에만 ‘가바가이’라고 외치고 다른 동물이나 다른 흰 것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바가이’는 여전히 토끼가 갖고 있는 어떤 다른 속성을 표현한다고 의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그 섬의 주민들이 ‘가바가이’를 <토끼의 앞 3/4만을 자른 부분>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하고 그것의 사용이 우리의 ‘토끼’를 대체한다면, 그 섬의 진리 목록과 우리의 목록은 다를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번역이 정말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보론” 단락에서 나는 데이빗슨의 이론을 통해 번역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을 소개할 것이다. 미리 소개하자면, 나는 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내용은 번역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내용은 그 자체로 개념적, 논리적이기 때문에 모든 내용은 번역 가능하다. 번역할 수 없는 내용은 실재를 공유하지 않는 한 발생할 수 없는데, 다른 두 언어 사이의 공유되는 실재가 다르다면 하나의 언어 내부에서도 실재는 공유된다고 단언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언어 내부에서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려면 번역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이로부터 나는 번역의 가능성을 옹호한다.)

한편 진리의 상대성은 오로지 체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근래의 발견에 따르면 어떤 지식의 진리 여부는 오로지 머리 속이 아니라, 외부 세계에 의해 상대적일 수 있다. 퍼트남H. Putnam의 다음 논변(“쌍둥이 지구 논변”)이 결정적인 발견을 제공했다. 그가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1919년 지구별 경성에 거주하는 여정이 어느날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모든 대상들의 생김새가 동일한 1919년의 쌍둥이지구별 겅성으로 이동했다. 여정은 자신의 이동의 의식하지 못했다. 이 행성의 물은 XYZ라는 원소로 이루어져있는데(이제 우리는 그것을 ‘뮬’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성질 등이 외부에서 볼 때 동일하다. 여정은 컵에 담긴 을 보고 생각한다. “저기에 시원한 이 한 잔 있군.” 그의 뇌는 물리적으로 지구의 물을 볼 때와 동일하게 배열되어 있을 것이지만, 경성에서 물을 보는 여정과 겅성에서 뮬을 보는 여정은 실제로 다른 진리값을 갖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가 물이라고 생각한 채 보는 것은 뮬=XYZ이지, 물=H2O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진리 목록의 차이는 단순히 개념적 내포의 체계가 달라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후험적으로 얻은 개념 연관에 대해서는, 실재하는 대상이 기존의 연관과 대응되거나 대응되지 않기 때문에 진리가 발생한다. 개념 체계가 완전히 동일하고 내적으로 인식적 정당화가 충분히 수행된 경우에도 진리 목록은 바뀔 수 있다.

비평의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앞서 비평이란 기존의 대응되는 개념적 연관이 실재하는 대상들 사이의 연관을 잘 보존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일임을 전제했다. 한편 진리를 결정하는 데에는 최소한 두가지 중요한 요소가 관여하는데, 하나는 체계 자체이며 하나는 체계와 세계의 정합성이다. 비평의 진리란 둘 모두에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비평의 진리는 체계 자체가 아닌 체계와 세계 간 정합성을 통해서만 규정된다.

우리는 어떤 체계 밖에서 비평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체계 밖에 있는 것 – 푸코와 단현이 “파레시아”로부터 찾아내려는 것 – 은 무엇인가? 다음 단락에서 이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어떤 존재론적 체계를 선택했느냐 자체는 매우 실용적이고, 자연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그 체계 자체를 비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행적인 존재론 밖의 새로운 체계를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체계에서 가정되는 존재자들을 이미 부정하고 있지 않은 이상 해당 존재자들은 부정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존재자들을 배제하는 존재론을 긍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개념적 내포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지 묻는 데에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연관시키는 관념이 그 대상을 표현하는 데에 적절한가? 이 질문이 비평의 진리를 구성하는 전부이다. 적절하다면, 그것은 진리이다. 적절하지 않다면, 허위이다.

실제로 비평가들이 하는 일은 여정이 보는 대상에 연관시키고 있는 “물”의 내포가 쌍둥이 지구의 “뮬”의 내포로 바뀌어야 함을 관찰하는 데에 있다. 물론 이 예시는 문학 비평의 사례는 아니다. 그러나 문학 비평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어떤 문학 작품을 비평할 때 우리는 문학에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문학에 새로운 문장을 긋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문학 작품이 어떤 이름들에 대해 제공하는 의미를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이름들에 대해 제공하는 의미에 대응시켜 보고, 이 대응이 과연 적절한지 평가한다.

전자는 해석의 과정이고, 후자는 해석된 텍스트를 비판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비평이라고 불리며, 나는 이를 해석적 비평이라고 부르겠다. 다른 편에서는, 그러한 대응 행위자(“비평가”)들을 관찰한 뒤 그들의 대응 방식이 적절했는지 평가한다. 이는 수용사적 비평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 작품과 세계가 대응된다는 가정 하에, 어떤 개념에 대한 우리의 내포와 문학 작품이 그것에 대응하는 개념에 대해 부과하는 내포를 비교하여 우리의 개념 연관이 적절한 것인지 평가한다. 이는 실천적 비평이다.

앞의 둘은 순수한 의미에서 문학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마지막 것은 정치적 귀결을 제공하는 비평으로, 순수히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실존적 문제를 자성하는 방식의 비평으로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는 세 방식의 비평이 뚜렷한 경계를 갖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하나의 비평에서 여러 비평이 제시되는 것을 혼란하게 이해한 결과이다.

(“이것은 아름다운가?”, “이것은 범주 c에 들어갈 수 있는가?”와 같은 것은 순수한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범주화는 오히려 사회학적 탐구와 유사하며, 미적 진술은 비평이라기보다는 어떤 한 사람의 현재 기분에 대한 진술에 불과하다. 비평의 물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나 “어떤 범주 c”의 성격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어떤 경우에도 비평의 진리는 지시의 효력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문학 비평에 있어서는 이렇다. 해석적 비평은 작품의 내용이 이런저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드러내며, 해석된 텍스트로서 작품이 실재에 대해 얼마나 참된 주장을 하고 있는지 판단한다. 수용사적 비평은 텍스트 해석 과정이 얼마나 정당하게 실재와 텍스트를 대응시켰는지 묻는다. 즉, 해석으로부터 드러난 작품과 세계의 지시관계가 타당하게 설정된 것인지 묻는다. 실천적 비평은 우리의 통속적 사고가 실재 세계와 개념적 연관을 잘 맺고 있는지를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조사한다. 이로부터 우리가 개념을 통해 행하는 지시 행위가 여전히 유효한지 여부를 드러낸다.

경험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과학이 그러한 비평을 수행한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통속적 세계 인식이 더 확고한 자연적 사실들 및 실험을 통해 확증된 사실들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지 관찰하고, 잘 반영되지 않았다면 통속적 개념에 수정을 가한다. 철학은 선험적 사실에 대한 인식을 비평한다. 철학은 우리의 통속적 언어 사용이 얼마나 타당한 존재론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존재론이 경험적 믿음 목록과 모순 없이 조화될 수 있는지 따진다. 만일 우리의 통속적 존재론이 권위 있는 다른 믿음(오늘날에는, 물리적 사건들에 관한 지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존재론에 수정을 가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비평에 관한 몇가지 사항이 나온다. 하나. 푸코적 의미에서, 비평은 개념적 연관이 실재 세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지 관찰하는 작업이다. 둘. 진보란 어떤 체계에 대해 다른 체계가 더 많은 진리 목록을 갖고 있을 때 생기는 관계이다. 셋. 비평적 진보는 다른 비평에 비해 더 많은 진리를 담고 있는 비평이 등장할 때 발생한다. 넷. 비평적 진리란 지시의 효력이 있느냐는 질문에 부여되는 값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하는 사실로, 기존의 비평보다 진보한 비평은 기존의 비평을 또한 비평할 것이다. 이는 사실 그 비평 작업 자체의 과제는 아니다. 그러나 “나의 연구주제를 연구하는 저 비평은 정말로 좋은 비평인가?”라는 질문 하에 진행되는 비평 작업이 비평 작업 자체와 관심을 공유하기 때문에(이전 비평이 아닌 새로운 비평을 채택하려면 이에 상응하는 이유인 ‘진리’가 제공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비평은 이전의 비평을 비평하는 형식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 비평을 성공적으로 비평했는가”를 비평적 진보를 규명하는 어떤 종류의 질문으로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여기까지 분석된 “비평”은 단현이 소개하기로 푸코의 전기 사상에서 제안된 “비판”에 해당할 것 같다. 이제는 그의 후기 사상으로 소개된, “파레시아”에 해당하는 면을 고려할 차례이다.


**이런 경우가 가능한가?: 모든 지시 관계가 완전히 효력을 드러내는 중에 비평을 시작하는 것. 어쩌면 가능하다. 아마도 이 때 비평가는 순수히 주석적인 비평만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름의 진리를 제공한다. 그 비평은 아마도 ‘우리는 이 체계에 불만족스럽다’라는 생각을 계기로 시작되었을 텐데 비평가의 분석은 그 생각을 오늘의 체계에 연관시킨 것이 잘못되었다는 진리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비평은 믿음의 토대를 놓는 역할을 한다. 이 또한 나름의 개념적 연관의 발견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개념적 연관의 재발견”으로서 비평의 진리는 비평의 귀결이다.

극복: 비평이후의/탈-비평적post-critical 과제

폭력적 개념을 극복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라는 은유는 어떤 개념이 부당한 방식으로 적용되길 강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듯 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 어떤 개념의 연관에 관한 것이라면 ‘폭력’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폭력이라는 은유 대신 직설적으로 ‘오인’이나 ‘착각’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어떤 개념이 폭력적이라고 할 때, 우리는 대부분 실존적 문제와 그것을 연관시킨다.일상적 의미에서 ‘폭력’은 자신의 자유와 같은 실존적인 권리가 침해될 때 사용된다는 점에서, 두 표현에는 유사성이 있다. 비유적 표현의 대부분은 실제로 어떤 유사한 속성을 가질 때 유효하게 사용된다. 따라서 이러한 “폭력”의 이해는 전자의 것보다 타당한 듯 보인다.즉, 나의 자기의식과 나를 범주화하는 개념의 내포가 일치하지 않을 때(또는, 나의 이름에 귀속되는 속성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개념의 폭력을 경험한다.

위의 의미에서의 “비평”을 통해서 폭력은 극복되지 않는 것 같다. 합리적 과정으로서 비평은 실존적 문제를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평은 개념적 연관만을 조사하는 것이지, 개인의 미적 느낌이나 실존적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진리를 따지는 문제들은 자기의식이 아닌 대상들과 그 대상에 할당되는 관념만을 조사한다. 이는 당연하다. 진리란 언어 표현에 부과되는 것이고, 언어는 늘상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매우 주관적인 것은 객관화된 방식으로만(예컨대, “파상이 색소포니스트에 대한 통속적 이해에 불편함을 느낀다”) 언어에 들어온다. 이렇게 들어온 자기의식에 관한 진술은 의미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파상이 색소포니스트에 대한 규정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규정이 잘못된 개념적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색소포니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개념화하여 사용하는 공동체가 개념 적용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면, 파상의 목소리는 “잘못된 방식으로 색소포니스트를 이해함”과 같이 여겨질 뿐이다. 파상의 감정에 대한 객관적 진술은 그것을 보고받는 공동체에게 주관적인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색소포니스트에 대해 전혀 다른 개념적 연관을 상정하고, 정말로 그 연관이 유효한 것마냥 개념의 유희행위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지시의 효력을 갖고 있는 어떤 개념에 대해, 그것이 없는 양 행동하는 것은 엄연히 말해 비평행위 또는 통치성의 거부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예술 행위에 가깝다. 이 행위는 특정한 허구적 가능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 안에서 상상 가능한 어떤 상황을 가상적으로 예화한다. (허구 세계에로의 자발적 피통치 행위라고 하면 어떨까?)

이 행위는 어떤 존재자가 실존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개념이 존재론에서 폐기된 상황을 상정하고, 그 상황에서 구성되는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게 하는 신화적 행위이다. 신화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주고, 어떤 류의 행위를 추동한다. 신화를 거친 뒤의 우리 세계는 신화와 동일하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진보된 공간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쓰까”, 탈코르셋 논쟁 등이 갖고 있던 문제는 이러한 전위적 행동을 진지한 존재론의 틀 안에서 갖고 있던 데에 있었다. 포스트모던적 사고가 이럴 때엔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어떤 종류의 예술이나 미적 경험은 다음과 같은 본질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공동체 구성원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대안적 세계관을 경험하게 하여 그들의 개념적 내포에 혼선을 준다. 그리고 다시 그 개념연관의 타당성을 묻는다. 여기에서 실천적 결과를 낳는 예술 비평이 시작된다. 변화의 결과가 어떤 것이 되리라고 예측하기란 어렵다.

예컨대 젠더 이론의 비평을 기초로 성에 대한 모든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의 행위가 일어난다고 해 보자. 행위 참여자들은 현재의 성관념이 폐기된 신화적 세계가 어떤 형태를 지닐 것인지 상상하게 하는 촉매가 될 것이고, 이는 참여자를 관찰하는 이들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줄 것이다. 이제 그 시기가 지나간 뒤에는, 우리가 나누는 성차 개념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고, 기호는 남은 채 그것의 의미가 완전히 변해 있을 수도 있다. 또는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각 기호가 할당된 개체들의 삶의 양식이 전복되어 있을 수도 있다.

세계는 변화할 것이다. 다만 어떻게 변화할는지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술은 그 자체로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명시적인 진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리를 형성하게끔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허구가 구성한 가능세계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변화를 줄 수 있으리라는 추측이다. 이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허구의 세계는 순전히 개념적인 영역이지 않은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대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그것이 순전히 개념적이라면 실천적 역량이 없을 것이고, 그것이 실천적 역량을 가진다면 상상된 세계와 우리의 실존적 체험이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두 연결이 어떻게 가능한가? 철학사에 등장한 이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했고, 이 문제에 어떻게 답했는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설득력있는 응답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 이후의 논의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이 문제에 답한 뒤에야, 비로소 파상과 단현의 질문이 발견될 수 있다.)


보론: 스피노자적 세계관

나는 단현이 <불온-되기>에서 제기했던 “때로는 어떤 담론 바깥에 있는 사람의 최초 직관이 정답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 불만을 갖고 있다. 나는 반대로 이렇게 말했다: “참된 방식으로 포착되고 나면 내가 잡아낸 그 믿음의 내용은 참되다.” 여기에서 ‘참된 방식’이라는 그 담론 내부에서 결정된다. 만일 담론의 외부인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믿음을 포착하여 우리에게 답을 준다면, 그 답은 최소한 두가지의 불확정성에 놓인다. 그는 과연 이 담론에서 제기되는 문제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또, 그의 정당화 방식을 우리 공동체는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란 토론을 통한 체계 구성 행위이다. 체계의 구성은 공동체원이 발견한 문제상황으로부터, 공동체원이 합의한 정당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통치성의 거부란 다른 체계의 통치성을 수용하는 데에 있지도, 현 체계에서 ‘탈출’하는 데에 있지도 않다. 저항이란, 비판이란, 철학이란 체계 안에서 문제되는 상황을 숙고와 토론으로 해소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 과정은 순전히 담론 속에서 벌어진다. (또한 나는 단현이 나의 이러한 주장이 그릇되었다고 보지 않을 것을 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미 어떤 직관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직관의 주체는 담론 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 바깥에 있는 사람의 최초 직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이 반론이 정당한가? 어떤 하나의 개념에 대해 번역 가능성***을 갖는다면 그 개념과의 논리적 관계등을 통해 모든 개념의 번역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번역이 가능하다면, 담론에는 바깥이 없다. 어떤 담론으로부터 멀거나 가까운 주체들이 있을 뿐이다.

담론에 가까운 주체는 담론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먼 주체는 적은 정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주체에게 담론에 관한 직관을 요구하려면 그 담론에 관련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판단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번역 등의 방식으로 담론의 내용이 공유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담론으로부터 멀리 있던 그 주체 역시 담론 참여자와 유사한 정도의 정보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주체를 “담론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부를 수 없다. 담론에 대한 직관을 표현하는 순간, 그는 담론 안에 있다. 어떤 한 담론의 언어를 다른 담론(그 “사람”이 속해 있던 담론장)의 언어로 번역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번역의 불확정성이 우리의 발을 걸고 넘어진다. 어떤 존재론에서 분절한 특정한 존재자가 다른 존재론의 존재자와 동일시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최근의 답변은, 존재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문장(어떤 사건에 대한 표현으로서)에 대한 것으로 번역을 간주할 때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데이빗슨D. Davidson의 <원초적 해석Radical Interpretation>이 세련된 방식을 제공한다. 그는 타르스키A. Tarski가 제안한 의미론적 진리 정의를 대상언어와 메타언어 간 번역의 문제로 변환한다.

타르스키의 그림은 이랬다. 우리는 대상언어 L의 문장 s와 메타언어 문장 p에 있어, <“s”는 L에 의하면 p일 때, 그리고 바로 그 경우에만 참이다.>와 같은 식으로 ‘~가 참이다’로 표현되는 진리 술어의 외연을 결정할 수 있다. (한편 진리술어의 엄밀한 정의를 위해 s와 p는 모두 형식적으로 변환된 문장이어야 한다.) 반면 데이빗슨은 진리 술어를 원초적 개념으로 두어 분석 불가능하다고 넘긴 뒤에 타르스키의 도식을 대상언어와 메타언어 간의 번역 문제로 바꾼다. 그의 그림에 따르면, L의 문장 s가 p일 때, 그리고 바로 그 경우에만 참이라면, p는 s에 대한 메타언어로의 번역이다.

(지표성과 관련된 표현들은 배제되거나, 객관화되어야 한다. 지표성이 주관적으로 번역될 수 있다면 콰인의 문제제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표적 표현은 번역되는 경우에도, 아주 형식적인 방식으로만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저것’으로 어떤 대상을 지칭할 때 전달되는 사고는 “저것”에 대한 나의 느낌이 아닌, 그 이름으로 지시되는 대상에의 지시관계이다. 따라서 지표적 표현의 번역은 언제나 3인칭적이다. 실제로 데이빗슨의 그림은 지표적 표현이 의도하는 어떤 현상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지표적 표현으로 고정되는 객관화된 시점을 번역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초에 그것을 지표적인 것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단현은 아마도 ‘외부 사람’을 이런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오염된 내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점이 꽤나 크다!)

결국 내가 갖는 확신은 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문장은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측하기로는, 논리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비개념적이거나 내포적인 지각은 객관화, 형식화되어 메타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객관화된 사실들로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 상자” 논증이 이를 보여준다. 주관적인 의미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우리가 닫힌 상자를 하나씩 갖고 있고, 모두가 그 안에 “딱정벌레”가 있다고 주장할 때,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고는 그것이 정말 동일한 딱정벌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관찰 가능하다면 “닫힌 상자”라는 전제가 거짓이다. 애초에 딱정벌레는 내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주 내밀한 현상은 동일한 언어 또는 담론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공유될 수 없고, 공유된다 한들 그것은 다른 체계로의 번역과 마찬가지로 객관화된 표현으로만 공유된다. (객관화되지 않은 표현으로 공유되는 것은 차라리 일종의 발화행위speech-act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예컨대, “이건 정말 아름다워!”는 사실 <나는 <아름다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와 같은 사고 내용의 전달을 발화의 효과로 갖는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것이 문제되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나의 주장은 상기한 것들로부터 지지된다. 그 이유를 부연하자면 이렇다. 먼저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그 문제에 포함되는 존재자들을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존재론을 이해해야 하는데, 순수히 공동체 밖에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존재론을 이해하는 순간, 그는 공동체 밖에 있다고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모든 문장은 번역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번역의 불완전함은 공동체 안에서의 소통에서든 공동체 밖으로의 소통이든 동일한 정도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공동체 밖에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공동체 밖”이라고 부른 그곳을 대체 ‘밖’이라고 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번역될 수 있다면 담론이나 공동체나 체계의 안과 밖이 구분된다는 가정이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구분이란 체계 내의 담론에 종속되냐 아니냐의 구분일 것인데, 최소한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에 한마디라도 제대로 진술할 수 있으려면 그는 이미 종속되어 있거나, 또는 애초에 “종속”이란 환상이었어야 한다. 다시말해, “빠져나가기”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단현은 이렇게 답할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말하는 ‘상상력’이 곧 체계 밖의 사람이 소유하는 능력이다. 체계 밖의 사람은 체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라도 새로운 체계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상상된 새로운 체계는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설사 그가 제기한 어떤 상상력이 공동체 구성원들을 감동시킨대도 말이다. 무지로부터 비롯된, 얻어걸린 진리는 정당화된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답은 체계 밖의 사람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하는 체계 내부의 구성원들이 소유하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정답은 세계 밖으로부터 온 상상력으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의 세계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렇게 나오지 않은 모든 답은, 누구에게도 하나의 “정답”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번역 가능성에 관한 나의 생각은 최근의 글 <“번역될 수 없는 심오함”>에 소개되어 있다. 어떤 합리적 존재자 개체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개체에게 명제적 믿음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언어 대한 철학적 직관이다. (그에 대한 이유는 위에 쓴 것과 같다.) 물론 어떤 담론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은 그 담론에서 어떤 개념이 갖는 함의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번역 불가능성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 함의란 지극히 주관적인 미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만일 체계로부터 가까이 있는 그룹과 멀리 있는 그룹이 서로 다른 개념적 내포를 소유한다면, 가까이 있는 그룹의 개체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체계 가까이에서든 멀리에서든 합리적 존재자들은 동일한 조건을 갖고 어떤 진술을 대한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적어도 어떤 두 그룹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은 매우 우연적이며, 관찰을 통해서만 확증될 수 있는 사실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두 사람도 전적으로 다른 두 체계에 있지 않다. 어떤 체계로부터 각각 다른 거리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체계는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공유해야 한다. (이는 스피노자적 세계관이다. 소제목은 그러한 이유에서 결정되었다.)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One thought on “비평적 진보, 또는 비평적 진리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