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René Magritte, ‘Empire of Light’, Oil on canvas, 1950. (www.renemagritte.org)

1

반성 없는 비판, 자신의 옳음에 대한 확신 또는 자신이 정의의 편에 있다는 확신에 차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는 비판은 그야말로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재확인하고 있다. 실상 그것은 비판이 아니며, 사유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거칠고 투박한 의미의 틀을 정당화하여 지켜내려는 아집에 불과할 것이다. 예시? 예시라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하게 길어낼 수 있다. ‘우리’에 속한다고 여겼던 이들의 고꾸라짐을 이렇게 빈번히 보고 이렇게 자주 실망하게 되는 나날들이 또 없을 테니. 적어도 어떤 의제에 관장 주장의 핵심은 공유한다고 믿었던 이들이 독단의 좀비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이렇게 흔해진 시절이 또 없을 테니. 자신이 성전에 참여하고 있다는 들뜬 기분, 흥겨운 분노 속에서 흡족스럽게 (혹은 불만스럽게) 살아가는 자아들은 그야말로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들에 따르면 적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고, 적들은 오직 척결되어야 할 뿐인데, 만일 적을 알아보고도 맹공을 퍼붓기를 주저하는 자가 아군 속에 있다면, 혹은 아군의 신성한 강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군이 아니라 곧 적이다. 그들은 누가 그 어떤 오염도 없는 순수한 아군인지를 가려내는 일에 몰두하느라, 적이 적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니 그에 비해 까다로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몰두하느라, 적을 물리치려는 원래의 목표를 잊게 되기마저 한다. 오직 자기만족적인 격노와 비난들.

물론 우리는 이보다 훨씬 세련된 언어와 논리로 포장된 자기애적 자아를 목격하게 되기도 한다. 혹은, 그러한 포장이 너무나 미묘해서 그 안에 담긴 자기 위안의 뉘앙스를 눈치채지 못하거나 뒤늦게야 눈치채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글을 만난다고 해서 — 적어도 지각 있는 독자라면, 건전한 논쟁을 하고자 한다면  — 저자에 대한 ‘정신분석’을 글에 대한 반론이랍시고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겠다. 결국 심리가 아니라 논리를, 숨겨진 전제들을, 개념의 오남용을 공격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 비판이 비판 자신을 ‘근본적으로’ 갱신하기 위해서는 비판 자신의 뒷면과도 같은 반성이 필요하다. ‘다른 비판’이 비판으로 하여금 깊이 자문(自問)해보도록 유도할 때가 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그 ‘다른 비판’이 반성을 촉발했기 때문이고, 결국 비판을 갱신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반성의 작용이겠다. 비판은 끊임없는 반성에 의해 재련되어야 하고, 갱신되어야 한다.

비판은 필연적으로 그 대상을 호출하며, 반성은 비판 자체를 다시 그 대상으로 호출한다. 그러므로 반성은 비판이 여전히 비판일 수 있게 하는 지점, 비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을 지탱한다. 비판의 다른 한 쪽 면인 반성이, 비판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갱신하며 나아가게 하고, 그것이 고착화된 교조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도록 한다. […] 비판은 방향성을 가진, 즉 대상을 갖는 내용이며, 반성은 비판에게 있어 토대적인 것인 동시에 비판 자신의 갱신, 변화, 재생성이다.

단현 2019

(이상은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얘기했던 것이고, 이 글에서는 다만 전제해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반성 없는 비판이 맹목적인 만큼이나 반성을 위한 반성, 강박에 가까운, 반성뿐인 반성은 공허하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2

실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 혹은 의미를 만들어내어 실재에 투영하는 것은 실재 자체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집착하는 것에 불과하며, 나아가 의미를 만들고 보존하는 자아 자신에 대한 욕망에 불과한가? 이런 물음은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를 제기하면서도(그러한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답을 전제하면서도) 이를 주체 또는 의도의 순수성의 문제로 둔갑해놓는다. 순수하지 않은 사유 주체는 의미를 과잉 생산하는 주체, 그러한 자신을 사랑하는 주체인 것이다.

그런데, 의미의 ‘과잉’이라는 사태란 과연 있는가. 의미가 정확하고 적확하지 못한 것(그 판단이 실재에 비추어 이뤄지든, 실천적 효용에 비추어 이루어지든 간에)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미가 뜬금없고 어뚱한 곳에 부여되어 있고 배치되어 있다면 그것은 의미가 과잉한 것이 아니라 그저 부적절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의미가 삶을 살아지게 만들 때, 그리하여 삶이 상투적이고 진부한 것이 될 때, 다른 삶의 가능성이 희박해질 때, 우리는 의미를 무화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갱신하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의미를 재의미화하기. 이른바 ‘인문학적 사유’가 하고자 하는 작업이 결국 말에 관해 — 말해진 바, 말해지는 방식, 말들의 관계에 관해 —  다시 말하는 것 외에 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온갖 분과학문은 제 나름의 방식대로 실재에 관해 탐구하고, 앎의 목록을 추가한다. 실재에 새겨진 구분, 질서, 원리를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의미로 번역한다.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뭉뜽그려진 활동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는가? 그렇게 답할 수는 없다. 인간에 대한 탐구는 실재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 혹은 인간에 관한 것이라지만 결국 실재인 것에 대한 탐구 — 사회학, 심리학, (인간)해부학, 병리학 등이 하는 것과 같이 — 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지식도 사유도 산출해내지 못한다. ‘인간과학science humaine’의 기획이 낳은 대표적인 탕자 —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 — 를 보노라면, 이 묘한 말은 인간의humain라는 형용사를 떼어내도 여전히 말이 성립되든가(가장 성공하여 재빠르게 분가한 맏이인 언어학이 그러하듯이), 아니면 애초에 학學science이 아니든가 둘 중 하나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욱 더 확신하게 된다. 결국 남은 것, 세계에 대한 앎을 늘려가는 것과는 다른 지적 작업 즉 사유가 해야 할 일은 의미, 의미화 작용, 의미화의 틀에 대한 검토, 비판, 갱신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오직 의미뿐인 것은 아니지만, 사유가 그것을 회피하면서도 성립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인간이 하는 활동 중에 사유가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 나는 인간에게 육체로서 세계와 맞닿아 있고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폭발하는 감각의 체험이 필수불가결하다고 믿는다 — 사유가 희박해진 사회에서 폭력 역시 희박해져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의미에 대한 강박이랄 것이 있고 그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이제는 적확하지 않게 된, 낡은 의미(화의 틀)에 대한 아집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또는 실재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의미화라는 점에서 기각될 만한 것이지 욕망의 문제나 과잉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유가 자신이 스스로 실재에 직접 닿는다고 착각함으로써 실재에 대한 의미(화)를 자연화 또는 독단화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유하는 자아가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과 애정을 느끼는 것, 사유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것은 마냥 아름답고 바람직한 장면은 아니지 않은가? 사유를 추동하는 힘에 자기애라는 불순물이 끼어들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유가 요구되었던 지점을 가로막고 결국 사유를 정체에 이르게 할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타자와 폭력에 관해 이야기하는 ‘나’는, 그러한 사유를 전개함으로써 ‘보다 윤리적으로 보이는 나 자신’에 대한 뿌듯함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분명 가능하며, 이 지점에서 반성이 시작된다.

그런데 다음은 위의 것과 동질이형이다. 비판하는 ‘나’는 과연 내가 사유하고 비판하려는 바로부터 결백한가? 나는 그런 것을 이야기할 자격이 되는가? 혹은, 결국 나는 그러한 비판을 감행함으로써 나를 비판 대상의 영역으로부터 구분지어 건져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나 자신을 보고 안도하고, 선을 그은 나 자신을 보고 뿌듯해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문제 제기 또한 분명 가능하며, 이 지점에서 역시 반성이 촉발된다.

그런데 과연 사유하는 주체가 자기애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 가능한가? 결코 사유하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일 없이 오직 사유의 대상만을 응시하는 것이 가능한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일말의 확신도 갖지 않은 채, 끊임없이 자신의 의도를 검열하고 그 때문에 불안에 떠는 주체는 과연 사유할 수 있는가? 또, 완벽하게 자격을 갖춘 비판자라는 것이 가능한가? 비판하려는 것과 조금이라도 연루되어 있다면, 완벽하게 결백하지 않다면 침묵을 지키는 주체는 과연 비판할 수 있는가? 그러한 침묵은 윤리적인가? 이 물음들에 대해서는 아마도 긍정의 답을 내리기 어려울 터이다. 왜 그런가. 반성은 비판에 불가결한데, 지극한 반성은 왜 이렇게 곤경에 빠지고 마는가.

그 어떤 지적 위선도 범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반성은, 반성 그 자체는, 오직 반성만 있는 그 무엇은, 결코 비판을 수행해낼 수 없다. 반성이라는 행위는 비판에 스며들어 있는 위선을 솎아내고 반성을 다시금 갱신하는 일이지만, 그리고 비판이 나아가기 위해서, 변혁이 가능하기 위해서 비판뿐만 아니라 반성 역시도 필수불가결하지만, 철저성을 추구해야하는 것은 비판이지 반성 자체가 아니다. 철저한 반성은 자기가 충분히, 끝까지, 궁극적으로 반성하고 있는 것인지를 반성한다. 그렇다면 반성은 자기에 끝없이 매몰되어 있다. 반성은 그것을 또 반성한다. 시쳇말처럼 반성은 “자신이 충분히 반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성”하고, 그렇기에 그것은 또 반성 자신을 반성하기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성한다…… 반성은 그렇게 곤경에 처한다. 숨을 고르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뛰어나가는 순간에는 숨을 고르지 않는다. 노를 수면 위로 빼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늘 노를 수면 위로 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노를 젓는 순간에는 노를 물 위로 빼지 않는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

비판에게 반성이 필요한 이유는, 비판에게 순결하고 순수한 위치와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다만, 비판하는 자가 이미 연루되어 있는 조건들, 상황들,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비판하는 자아의 서투름에도 불구하고 비판 자체가 부정되어 버리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비판에 스며든 자기 만족을 감지하고 그것을 솎아내는 일, 그럼으로써 비판을 다시금 벼려내는 일은 분명 긴요하지만, 자기 만족의 완전한 제거가 반성의 궁극적인 목표 그 자체일 수는 없다.

3

사유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낮과 밤이 모두 필요하다. 비판의 시간과 반성의 시간이, 외침의 시간과 뉘우침의 시간이, 고함(高喊)의 시간과 자문(自問)의 시간이 둘 다 필요하다. 오직 낮만이 계속될 때 그것은 낮이 아니며, 오직 밤만이 계속될 때 그것은 밤이 아니다.


참고한 텍스트
─ 단현. 2019. “텍스트하기와 정치하기, 정치적 상상력”. 지평. 링크(2020.9.16. 확인)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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