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을 열다〉에 공유된 밤비의 글,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은 ‘영화 비평’이 갖는 모종의 특이성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지평》에 실린 앞선 논고들을 읽어 온 독자라면 알겠지만 내가 참여한 몇 주제들, 특히 〈셋잇단음〉에서 기획된 몇 주제들에서는 비평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던 바 있다. 그러나 또한 이 주제들은 비문자매체의 비평에 관해서는 상당히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밤비의 논고는 나름의 의미를 가지면서 또 괄목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본고는 밤비의 논고에 대한 비평이다. 밤비는 그의 글에서 이른바 ‘에세이영화’라는, 영화 비평을 위한 또다른 영상 예술 장르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인 영화 비평의 개념은 이미지의 탁월성을 감상자들에게 강조하기 위한 텍스트 활동으로 이해되는데, 이러한 이해는 영화 비평에 대한 일소적(exhaustive) 이해도 아니고, 나름의 실용적 문제 또한 동반되는 이해인 바, (이론과의 결탁을 필함한다고 그가 생각하는 듯한) 텍스트 활동으로서가 아닌 영상으로서의 또다른 비평의 범주를 제안할 가능성이 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얼마나 설득력 있는 것인가? 나는 먼저 앞선 나의 글들에서도 제안된 바 있는, 비평에 관한 나의 이해를 제공한 뒤, 나의 비평 개념으로부터 밤비의 비평에 관한 관점을 고찰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른바 ‘에세이영화’라는 것이 그 자체로 대안적 비평의 중핵이 된다기보다는, 여전히 ‘자전적 서사’가 그 중심에 있으며, 밤비의 비평론의 방향이 이 중심을 향해야 함을 밝힐 것이다.

비평의 개념

비평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먼저, ‘왜 비평을 해야 하는가?’와 그에 이어 ‘어떻게 비평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 두고자 한다. 어떤 개념이 지시하는 것에 있어, 그것의 의의와 그것을 실현하는 요소들을 고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개념을 통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왜’를 묻자. 왜 우리는 비평하는가? 왜 비평을 해야 하는가? 좋은 비평은 응당 비평 대상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겠지만, 그 평가는 비평의 전부가 아닌 단지 비평의 결과물일 뿐이다. 어떤 비평가가 비평 대상에 대한 평가에 늘 중립적이라 하더라도 그를 ‘쓸모 없는 비평가’로 여길 수는 있을지언정 ‘비평을 안 하는 사람’으로 여길 수는 없는 것이며, 내가 어떤 것을 평가함에 있어 그 평가가 나의 비평의 존재를 선제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평과 평가는, 그 개념에 있어서는 독립적이라고 보아야겠다.

그렇다면 다시, 왜 비평하는가? 한편으로, 우리는 평가하기 위해 비평한다. 우리에겐 모종의 평가적 규준들이 있으며, 어떤 대상을 이 규준에 맞추어 일관되게 평가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성향을 만족시키고자 한다면 그 대상을 규준에 대어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비교를 위해서는 대상을 변형하는 것이 당연하다. 서로 다른 도량 단위를 비교하려면 둘을 환원 내지 번역할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비평은 이러한 환원, 또는 번역의 작업이다. 비평의 대상을 보편적인 평가적 규준에 호환 가능하도록 번역하는 것이 비평적 작업이다. 그러한 작업 후에만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오직 이해만을 목적으로 비평한다. 어떻게 보자면 평가를 목적으로 하는 비평 또한 이러한 목적을 수반하고 있다. 평가하기 위해 비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나의 평가적 규준에 맞게 이해한다는 것을 필반하는 바, 곧 그 자체로, 이해를 목적으로 한 비평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 경우 비평이 향하는 곳은 평가를 위한 비평과 달리 ‘규준과의 호환성’이 아닌, ‘이해 가능성’이다. 내가 비평 대상을 인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 대상을 번역하는 작업이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왜’ 질문에 대한 두 답으로부터 곧장 ‘어떻게’에 대한 답도 추릴 수 있다. 어떻게 비평해야 하는가? 우리의 규준에, 우리의 이해력(즉, ‘오성’)에 호환 가능하게 대상을 변형하는 방식으로 비평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비평의 방법은 다시 둘로 나뉘어 생각될 수 있겠다. 우리의 이해력이라는 것, 규준이라는 것은 때로 공유될 수 있는 것이기도, 없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개인들의 독특한 주관적 경험은 공유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반면 공적 언어로 표현된 지적 작업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에게 대부분 공유된다. 나는 그 둘에 각각 관련된 비평을 “사적 비평”, “공적 비평”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물론 주관성과 공공성의 경계는 다소 모호하다. 색채를 통해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때 색채 경험의 공유는 원리상으로는 사적이지만, 어느 정도 공적인 특징을 갖는다. 다만 이 경우에도, 가령 녹색과 적색을 조합하여 어떠한 느낌을 의도할 때, 나와 같은 색각이상자들은 그 의도를 파악하는 데에 실패할 것이다(실제로 나는 유년기에 방글라데시 국기를 단색으로 인지했다). 또 전문적인 논증은 훈련을 받은 지성들에게만 파악되곤 한다. 이 때 언어라는 인지적 도구로 구성되는, 논증의 공유는 원리 상으로는 공적이지만, 어느 정도 제한된 방식으로 공적이다. 물론 이 때에도, 이해에 실패하는 이들을 훈련시킴에 따라 의도를 파악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둘의 양상은 현저히 다르며, 우리는 ‘전적인 공적 비평’과 ‘전적인 사적 비평’이라는 양극단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공적 비평이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알기로, 인간 이성에서 가장 전형적인 공적 요소는 언어적 요소들이다. 공유될 수 있는 사적인 경험들은 하나같이 언어를 통해서 공유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다. 반면 전혀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은, 제아무리 넓은 공감대를 얻는 경우에도, 공유에 실패할 수 있다. 이렇게 공유되는 언어적 요소를 두고 비평의 ‘인지적 요소’라고 하자. 공적 비평이란, 비평의 인지적 요소를 특화한 비평이다.

그렇다면 사적 비평은 자연스럽게, 비인지적 요소를 특화한 것이 되겠다. 때로 어떤 방식으로, 모두에게는 아니지만 몇몇 사람들로 하여금 비평의 대상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 극단적으로는 오직 비평가 한 사람에게만 비평의 대상이 이해되게끔 만드는 비평이 있겠다(적어도 비평은 비평가에게 대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 자체로 비평은 ‘진술 행위’ 또는 ‘표현 행위’인바, 자신도 대상을 이해할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비평으로 표현하는 것은 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비평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대략적인 윤곽을 볼 수 있다. 비평은 대상을 평가하거나 이해하기 위해 이에 걸맞는 형식으로 대상을 변형하는 작업으로, 이 변형은 공적으로 수용 가능할 수도, 사적으로만 수용 가능할 수도 있다.

비평의 본질로서 인지성

나는 사적 비평에 대해서든 공적 비평에 대해서든, ‘오로지 그것이 인지적 요소만을 갖는다’라거나 그 반대를 부과하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 아닌 한, 실제로 우리의 모든 인지적 활동에는 비인지적 요소가, 또한 비인지적 활동에는 인지적 요소가 어느 정도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즉 공유 가능한 활동에서는 늘 비인지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가 뒤섞인다는 말이다.

가령 공적 비평의 대표격인 ‘비평문’을 생각해 보자. 이 때 우리는 비평문의 문장들이 표현하는 명제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평문을 구성하는 문장의 수려함과 배치, 그리고 그 문장들을 구성하는 기호들, 그 문장이 쓰인 매체의 질료 등을 함께 만난다. 인지적으로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서로 다른 두 비평문은, 이런 비인지적 특성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이른바 사적 비평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내가 어떤 문학 작품을 읽고 그것을 추상화로 표현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 때 우리는 오로지 내가 보는 캔버스로부터 이해를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캔버스 옆에 적힌, 또는 캔버스와 함께 전달되는, 또는 캔버스에 대해 우리가 부과하는 인지적 연관이 동반되면서만, 사적인 비평적 활동은 ‘이 작품은 그 작품을 이런 식으로 재구성한 비평적 활동이구나’와 같은 식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둘이 늘상 뒤섞인다는 점으로부터 둘이 동등한 지위를 가짐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가령 두피는 매끈한 면과 모발, 둘 중 하나로만 채워지지는 않지만, 풍성모의 개념과 대머리의 개념은 하나같이 두피 그 자체보다는 모발의 개념에 의존하는 듯 보이며, 따라서 인과적으로는 두피와 모발이 함께 풍성모와 대머리를 야기하지만 개념적으로는 모발이 이 둘에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발이 두피의 9할 이상을 채우면 풍성모, 풍성모에 비추어 9할 이상의 모발이 두피에서 탈락할 경우 대머리…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대머리와 풍성모에게 모발이 개념적 중추라면, 비평에서는 어떠한가? 나는 비평에서의 핵심이 인지적인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비평은 비인지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를 모두 갖지만 비평의 비평됨은 그것의 인지적 요소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다음 경우들을 떠올리자면 그렇다. 임의의 비평에 있어, 인지적 요소가 보존된 채 그 비인지적 요소들이 모두 다른 비인지적 요소로 대치된다고 생각해 보자면, 그 비평의 비평으로서의 정체성은 유지될 성싶다. 그러나 임의의 비평에 있어, 비인지적 요소가 보존된 채 그 인지적 요소들이 모두 다른 인지적 요소들로 대치된다고 생각해 보자면, 그 비평의 비평으로서의 정체성은 변화하거나, 심지어는 말소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런 이야기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밤비의 글에 대한 비평이 글이 아니라 영상이나 그림 등을 통해서 그 인지적 의도가 동일한 채 제공된다면, 의도가 거의 유사하게 전달되는 데에 성공을 하기만 하면 비평의 내용은 유지될 것이다. 반면 내가 지금 쓰는 이 글이, 우리 의미 체계의 변화 등으로 인해 그 기호적인 면만 보조할 뿐 의미 작용에 있어 전혀 다른 기능을 한다면, 그 기호들이 말하는 비평적 내용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또는 심지어 이 글이 글 또는 비평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비평의 정체성 또는 비평의 비평으로서의 정체성은 그 비평의 인지적 요소에 의존하며, 비인지적 요소에는 미미하게만 의존하거나,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왜 그럴까? 과학적 증명 없이 확언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인지적 요소가 우리의 이해력을 기반짓는 중대한 요소여서가 아니겠는가? 여하간 비평이란 이해시키는 활동이며, 우리의 이해가 일차적으로는 인지적 경로에서 일어난다면 인지적 요소가 비평의 중핵임은 당연한 일이겠다.

‘에세이영화로서의 영화 비평’ 재고

이제 비로소 밤비의 “제언”이 평가될 수 있겠다. 밤비의 서술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제안하는 ‘에세이영화로서의 영화 비평’이라는 방법론은 상기한 ‘사적 비평’의 한 수단이다. 가령 그가 말하기로,

비평은 원래부터 ‘작품’과 비평가 ‘한 개인’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쨌거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이뤄지는 ‘사적인 만남’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특수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영화는 언제나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개별적인 인물과 관계한다).

밤비 2020.

비평이란 근원적으로 사적이며(이는 내가 부정하는 부분이다), 영화의 비평이란 그러한 사적 특성을 잘 반영할 때에만 성공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화에 대한 사적 비평이 시도될 수 있을까? 밤비가 희망을 찾는 지점은 ‘비평가 자신의 서사’이다. 즉,

비평이 만약 작품에만 종속적이기를 멈추고 비평가에게도 권리를 내어준다면, 작품과 비평가는 비평에서 만나 새로운 창작으로 나아갈 것이다. 비평가가 작품으로부터 파생된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게 흘려보낸다.

밤비 2020.

이러한 과제를 해내는 모범 사례로 그는 ‘에세이영화'(이 이름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라는 장르를 든다. 이 이름 아래에 들어갈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은 〈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의 어떤 하루〉로 제시된다. 밤비에게 있어 이 영화가 갖는 비평론적 의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비록 그 경험이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감독과 관계되어 있지만) 분명 비평가 자신의 사적 경험과 작품들 간의 유기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몽타주되고 덧붙여진 하나의 또 다른 ‘영화’로서 작용하고 있다. (감독은 언제나 자신의 작품에 있어서는 전문가이므로, 발화의 비전문적 분위기 또한 사라진다. 추가로 감독은 아예 전문 배우를 나레이터로 두기까지 하였다.)

밤비 2020.

여기까지의 인용문을 통해 보건대 밤비의 희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비평을 비인지적 수단인 ‘에세이영화’로 수행하는 것은, 인지적 특성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말하자면 ‘실존적인’) 파악을 공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잠깐, 이러한 식으로 대상에 대한 파악을 공유하는 것은 어떤 의의가 있는가? 종래의 ‘이론적 비평’에 대한 밤비의 거부감은 다음과 같은 것임을 기억하자.

문제는 이론과 비평 사이에 놓여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별 작품에 대한 논문들로 영화학에 입문한 나는 분명 이론과 비평을 혼동하고 있었다. 나 자신의 비평들을 차례로 훑어보면, 영화 내적 탐구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것이 점차 이론 공부가 거듭될수록 작품 바깥으로 빠져나와 이론 전반과 연결되어갔다.

그리고 영화 이론은 대부분의 학문적 성취가 그렇듯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방대한 학습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밤비 2020.

즉 밤비는, 이론에 근거한 비평이 (1) 비평을 비평 대상이 아닌 배경 이론에 종속되게 하며, (2) 비평을 위해 낭비적일 만큼의 에너지가 투입되게 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지 비평가가 ‘자기 감상’을 늘어놓으면 어떤가? 밤비는 그의 글에서 이 ‘감상문적 비평’의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최소한 비평적 작업은 유아적인 주절거림이 아니라는 공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세이영화’는 감상의 주절거림이 아닌가? 아니다.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는 감상문과 달리, 에세이영화는 “비평이 영화를 통한 2차 창작으로까지 나아갈”(밤비 2020) 가능성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대이다. 왜 그럴까? 에세이를 구성하는, 자전적 기술이라는 것은 단지 자기 감정의 개념화된 재현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제시하여 공감 또는 감정 이입을 유도하는 활동이기 때문이겠다.

밤비의 이러한 제안은 야심찬 것이다. 또 단순한 주석적 활동으로서의 비평을 기피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 의도로부터 곧장 ‘에세이영화’에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는 못하겠다. 여전히 그 영화는 나레이션과 장면들의 구성에 있어 비평의 인지적 요소들을 우선해야 하는 한편, 이 인지적 요소들은 영화의 일부가 아니고서도, 가령 ‘자전적 수필’에서 역할하면서도 그 비평적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는, 주제를 응집시키고 명시적 표현을 제공하고자 할 때에는 문자적 수필이 ‘에세이영화’보다 더 잘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세이영화’ 특유의 비인지적 요소가 필요할 때엔 이 역시 좋은 선택이겠지만, 그의 고찰이 ‘에세이영화’를 ‘늘 최선의 선택’으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차라리 중요한 것은 둘 모두를 포괄하는 ‘자전적 서사’이다. 이 자전적 서사라는 것에서 중대한 과제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그 수용자들을 비평 대상에로 집중시킬 수 있겠냐는 데에 있다.

나는 이 ‘진짜 문제’를 강조하며 밤비에 구상에 대한 논평을 닫도록 하겠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그는 ‘자전적 영화’에 앞서 ‘비평에 적합한 자전적 서사’가 어떠한 것인지를 고찰해야 한다. 그리고 과연 ‘자전적 서사’여야만 하는지, 오마쥬나 패러디와 같은 도구들은 그의 과제에 동참할 수 없는지 등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기초로 수행한 그의 고찰이 다른 예술 장르에서는 어떻게 변용할 것인지를 논구할 수 있겠다. 이 세 문제에 순차적으로 접근하며, 그가 다소간 모호하게, 지엽적인 형태로 갖고 있는 비평론적 구상은 더 명료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발전하리라고 기대한다.


인용 문헌
─밤비. 2020. “(나에게)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으로서의 에세이영화 제언”, 〈문을 열다〉, 《지평》, http://www.lhorizonsociety.com/5160/ (2020. 9. 9. 확인)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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