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요한 것은 부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참 어렵지 않냐는 이야기도 같이 하게 됐다. 제대로 부수는 일부터가 어렵고 뭘 만들어내는 일은 더 어렵다.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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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은 어떤 것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비판이 그 대상으로 삼는 어떤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 비판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탈피하는 것 ─ 그것을 그대로 둔 채 피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소용 없도록, 작동하지 않도록, 기호로서 중요하지/의미있지significant 않게끔 하여 우리가 더는 그것에 제약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 이 아니겠는가.

단현,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파레시아, 불온-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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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필명 파상破像은 벤야민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에세이 ‘파괴적 성격Destruktiver Charakter’에서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를 이야기한다. 이 ‘파괴자’는 기존의 인식을 지배하던 이미지(상像)들─환상과 우상과 이데올로기들, 또 그들의 연결(관계) 방식을 파괴(破)하고 파편과 폐허를 만들어낸다.

   다만 그는 파괴에서 멈추지 않는다. 해체는 구성을 위해야 한다. 와장창! 부수고, 다시 짓기. 파상이란(파상력力이란) 그러므로 기존의 성좌Konstellation를 부순 파편들로 새로운 성좌를 그리는, (재)배치Konfiguration 작업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별자리는 절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 폐허가 오고 다음 별자리가 이어질 것이다. 끝은 오지 않지만, 가능성 역시 지속한다.

   덕분에 나는 현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불가능성이 아니라 계속 다음을 꾸릴 수 있는 태도 혹은 삶의 양식이라고 믿게 됐다. 이를테면 ‘빠져 나오는’ 일을 위하여 다음 디딜 땅을 항상 그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구멍으로 빠져버릴 테니까.

   그러나 그런 포즈를 취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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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몇 달, 문학의 정치성은 내 주요 관심사였다. 도대체 시와 소설을 쓰는 일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뭘 갖다 주나. 나는 ‘예술이 무엇인가’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이 이 주제에 앞서 있는 것을 발견했고, 한동안 대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투쟁을 몸소 실천하는 참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작가가 정치적 참여를 해야 하느냐’ 또는 ‘예술의 순수성에  전념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 문학의 정치는 특정한 집단적 실천형태로서의 정치와 글쓰기 기교로 규정된 실천으로서의 문학, 이 양자 간에 어떤 본질적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9p)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이후 “정치”). 인간사랑, 2009

   문학은 애초에 정치적이다. 문학은 정치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많은 물음이 ‘해소’된다. 너무 그럴듯한 것들은 대부분 함정이지만, 속는 셈 치고 따라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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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그는 ‘정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가 정치politique와 치안police 두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통용되는 정치의 의미는 후자다. 기존의 질서를 보호/재생산하는 합의체. 우리의 의회민주주의는 모두가 합의한(그렇다고 여겨지는!) 일치consensus를 유지하는 장치다. 그리고 이 일치는 ‘분배’에 관한 것이란다. 어떤 것이 어떤 이에게 합당한가. 얼마만큼의 권력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가. 이 ‘치안-정치’는 그래서 분배에 관해 어떤 일치를 구성하고 어떻게 그걸 유지할 건지를 주요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정치는 감성의 분할로서의 정치다.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설정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evidences sensibles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13p)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역, “감성의 분할.” (이후 “분할”)도서출판b, 2008

   부연하자면 ‘감성’은 ‘미학’을 칸트적 의미로 감성론Aesthetik이라고 부를 때와 궤를 같이한다.

  우리는 그것을 ─어쩌면 푸코에 의해 다시 검토된─ 칸트적 의미로, 자신에게 느끼게 하는 것을 결정짓는 선험적 형식들의 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경험 형식으로서의 정치의 장소와 쟁점을 동시에 규정하는, 시간들과 공간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말과 소음의 경계설정이다. 정치는 우리가 보는 것과 그것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한 것, 누가 보는 데 있어서의 능력과 말하는 데 있어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것, 공간들의 속성들과 시간의 가능성들에 관한 것이다. (“분할”, 15p)

   감성의 분할, 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sensible의 분배라고 더 명료하게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 노동자들이 밤과 낮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향유하는지, 현대 이전의 여성들(혹은 지금까지도)이 자기만의 방을 경계로 공간을 어떻게 향유했는지, 빈곤층에게 추위나 더위라는 온도가 어떤 의미인지, 그간 어떤 이들의 목소리가 어떻게/얼마나 인정받아왔는지, 어떤 것으로서 드러났는지. 이를테면 말이 아니라 ‘외침’이나 ‘킁킁댐’으로 들렸던 목소리들이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그래서 정치를 ‘몫 없는 자들의 몫’, 또는 ‘셈해지지 않은 것들을 셈하기’라고 불렀다.

  어떤 의미에서 정치행위는 정치적 능력이 입증되는 감성의 경계를 추적하기 위한, 이를테면 무엇이 말이고 외침인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갈등이다. (“정치”, 10p)
시간들과 공간들, 자리들과 정체성들, 말과 소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을 배분하고 재배분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감성의 분할을 형성한다. 정치행위는 감성의 분할을 새롭게 구성하게 하고 새로운 대상들과 주체들을 공동 무대 위에 오르게 한다. 또한 정치행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 (“정치”, 11p)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감성의 분할로서의 정치는 그러므로 불일치dissensus에 관한 활동이다. 일치consensus를 유지/재생산하는 치안-정치와는 다른 것이다. 정치는 기존에 합의(당연시)했던 분배 양태를 문제시하고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왔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다음 분배 방식을 위해 마찰한다. 합의체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밖에서, 지금 일치의 방식 자체를 질문하면서. 다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이행이 아니라 불일치의 지속이다. 새로운 합의를 구성해냈고 그것으로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자들’이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2. 문학(예술, 미학)

   예컨대 문학은 글쓰기 기교의 새로운 동일화 체제이다. 어떤 기교의 동일화 체제란 실천들, 이 실천들의 가시성 형태들과 이해 가능성 양태들 간의 관계들에 대한 체계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 세계가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되는 방식, 이 가시적인 것이 말해지는 방식, 이를 통해 표명되는 역량과 무능들이다. 바로 이 점에 입각해서 공동 세계를 형성하는 대상들의 구획, 이 세계를 채우는 주체들과 이 세계를 보고 호명하며 이 세계에 대해 행동하는 주체들이 지닌 역능들의 구획 속에 “문학으로서” 문학의 정치를, 그 개입양태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치”, 17p)

   문학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지를 드러내며, 그런 방식이 ‘어떤 이와 어떻게 다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간 합의되어 왔던 감각체계에 개입한다. 지금,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어떻게 감각하는 일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묻는 일이다. 그래서 문학의 기술이란 지금 여기의 감성 분할 양태를 드러내는 정치적 기교다. 문학은 내재적으로 정치적이다!

   이를테면 랑시에르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예로 든다. 플로베르는 영웅이 아니라 보바리의 이야기를 썼다. 농가에서 통속적 삶을 살다가 허영으로 나아가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이야기의 구획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감성과 언어를 독점에서 해방한 것이다.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누구나 이러저러하게 감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평등하게 이야기가 된다! 플로베르는 그런 것을 증명한 셈이다. 랑시에르는 이를 근대 민주주의의 징후로까지 보았다.

   그러므로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사람들의 감각적 일치와 불일치의 구획이 문학에서 드러남을, 그리고 문학이 그 구획과 관계들 속에 정치적으로 개입함을 의미한다. 미학적 실천은 항상 질문하며,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의 관계에 뛰어드는 ‘행동 방식들manieres de faire’이다.

   미학(문학)은 그래서 정치다. 정치 또한 미학이다. 애초에.

3. 두 개의 극과 긴장

   하나의 극에는 ‘숭고’가 있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무한 타자의 세계. 그 앞에서 성급한 재현은 금지된다. 총체성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행위 방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타자, 새로운 존재 양식을 일치 안으로 끌어들이는 미학이다. 그로써 이질적인 감각을 기존의 구획/관계망에 기입하고, 당연시했던 일치들을 파괴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경향을 ‘작품을 통한 저항의 기획’으로 명명했다.

   다른 하나는 그 다음을 구성하려는 힘이다. 예술은 새로운 공동 공간을 창출하고 세계에 개입하여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다. 파편들로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는 미래파의 콜라주 기법이나 현대의 생활건축 양식을 구성해낸 바우하우스 운동 등을 랑시에르는 예로 든다. 새로운 일치를 구축해내는 예술. 그는 이 반대쪽 극을 ‘미적 혁명의 기획’으로 명명했다.’

   (참조 :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의 정치’. “시대와 철학”, 2009 제 20권 3호, pp.403-437)

   랑시에르는 예술이 저항과 혁명 기획 사이의 긴장 관계라고 봤다. 그렇다, 파괴 없는 구성은 권력을 재생산하며 구성 없는 파괴는 공허하다. 이 둘의 긴장은 또한 미학-정치의 본질이다. 미학-정치는 불일치에서 시작하지만 불일치에 정박하지 않으며, 일치를 향해 나아가지만 일치에서 멈추지 않는다. 단지 진자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

   그러나 불일치는 구성을 위한 힘을 잃기도 한다. 그 발목을 잡는 것, 혹은 구성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의 이름을 물으려 한다. 불일치가 불일치로 남게 되는 사연에 관한 이야기다. 생각건대 많은 불행이 여기서 난다.

   이를테면 폐허의 파편들을 가지고 다음에 올 것의 설계도를 그리는 일은 어떤 조심스런 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폐허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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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정 작가의 근작 “세실, 주희”를 가져왔다. 올해의 9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다. (박민정.”세실, 주희.” 문학동네, (2017): 1-17)

   ‘주희’는 뉴올리언스 여행 중, ‘마르디 그라’ 축제에서 친구를 놓치고 홀로 길을 걷다 성희롱을 겪는다.

   주희는 왜 남자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남자들이 주희를 가운데 세운 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주희를 에워싼 행렬의 밀도가 높아지며 그들이 외치는 구호가 더욱 또렷하게 주희의 귀에 박혔다. […] 외치는 사람들의 구호는 같았다. show your tits! show your tits! (2)

   심지어 그 순간의 영상이 포르노 사이트에 업로드된 것을 알게 된다. ‘주희’는 영상을 본 화요일을 ‘참회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주희’는 축제에 그녀를 데려간 친구를 한 번도 탓하지 못한다. 영상이 있는 사이트 운영자에게 메일을 쓰기도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주희’는 ‘그저 잊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이 사건은 작품의 끝까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뉴올리언스에서 돌아온 ‘주희’는 명동의 대규모 뷰티 편집숍에 매니저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 직원 ‘세실’과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주희’는 ‘세실’의 삶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세실’이 ‘주희’에게 주말에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제안한다. ‘세실’의 선물과 작문 숙제를 통해 소설에는 일본 우익 기업의 화장품 등 전범 문제가 겹쳐진다.

   주희에게 ‘가네보’라는 이름이야 여느 유명 화장품 브랜드만큼이나 익숙했지만 ‘가네가후치 방적’이란 말은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 주희는 파우더룸에 접속해 ‘전범기업’이나 ‘우익단체 지원’과 같은 단어로 검색해 나오는 글들을 읽어봤다. […] / 나는 왜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주희는 생각했다. (8)
소학교 삼학년 때 오키나와에 평화학습 수학여행을 가서 ‘히메유리의 탑’을 처음 보았어요. 그게 우리 曾祖母를 기억하는 탑이었습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공격을 받기 전에 여학생들을 인솔해서 명예롭게 자결하신 우리 할머니, 사쿠라코 할머니의 군대 ‘히메유리 학도대’를 기억하는 탑 말입니다. […] 사쿠라코 할머니는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있습니다. (11)

   결말에서 둘은 크리스마스날 명동에서 만나 팔짱을 끼고 걷는다. 그리고 명동 반전 집회의 행렬에 섞여들게 된다.

   그때 세실이 주희의 팔짱을 조금 더 힘주어 꼈다. 지금 무슨 시위중인가요? 나는 시위대의 주변에 있으면 안 되는데 …… 외국인은 좀 민감해서요…… 세실은 주희의 어깨에 얼굴을 갖다 댔다. 주희는 세실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세실 상. 이건 평화로운 집회예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예요.”
   세실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나도 중학교 때부터 반전 집회에 참여했어요, 일본에서.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주희는 기분이 이상해져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은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듯 발돋움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희는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 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 (16-17)

(밑줄은 인용자)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 팔짱을 낀 ‘세실’과 ‘주희’는 언뜻 생각하기에 좋은 우정을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집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명동의 한복판에서 불일치로 드러나는 ‘세실’ 뿐이다. 이어지는 결말은 이렇다.

   그런 말을 세실에게는 결코 할 수 없었고 주희는 조금 참담해졌다. 세실 상, 다른 길로 갈까요? 주희는 세실에게 진지하게 물었고,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가요. 주희는 순간 뉴올리언스의 펍에 앉아 있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나도 너처럼, 주희가 여행 내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J처럼 무람없이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보고 싶었고,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 끝이 고작 포르노 영상이 되리라고는 주희는 예상하지 못했다. J는 미국인 남자애들과 우르르 일어서며 주희에게 피곤하면 안 가도 돼, 여기서 좀더 마시고 있어, 라고 말했고, 주희는 아니, 따라가고 싶어, 대답했다. 따라가고 싶어. 그 말을 했던 자신을 생각해내자 비참해진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르디 그라, 참회의 화요일이 육박해오는 순간이었다. 행렬은 어느덧 소녀상 근처에 도착했고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몰랐다. (17)

   그러니까 여전히 ‘세실’은 동상(집회의 ‘할머니’)의 의미를 모르는 채로 명동을 걷고, ‘주희’는 여전히 뉴올리언스에서의 소외와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녀의 화요일은 앞으로도 ‘참회의 화요일’일 것이다. ‘주희’는 ‘세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것은 ‘만남’이나 ‘연대’가 아닌 다른 무엇이다.

   최근에 이 소설에 관한 이견을 많이 접했다. 이견은 주로 (소급하자면) 여기 결말에서 발생했다. 여전히 참회하는 ‘주희’는 페미니즘 소설의 또다른 클리셰인가. ‘세실’과 ‘주희’는 만난 것인가 만나지 못한 것인가. 또 하나의 실패, 공허한 증언인가. 결국 젊은작가상 심사는 시의성 하나에 매달린 것인가. 자극적인 인트로(show me your tits!)는 자극적일 뿐이었나.

*

   나는 왜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주희는 생각했다. […] 고등학생 시절부터 주희는 파우더룸에 붙어살았다. […] 수없이 많은 화장품 회사와 연락을 했지만 그중 어느 곳이 ‘전범기업’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었다. […] 주희에게 제품의 퀄리티 외에 다른 것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쥬쥬하우스의 매니저였다. 만약 쥬쥬하우스가 어떤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단체나 사람과 연루되어 있다면 그건 자신뿐 아니라 세실에게도 매우 곤란한 문제일 것 같았다. (8-9)

   ‘주희’에게 ‘전범기업’이라는 정치적 문제는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전범기업의 제품을 쓰는 것이 무엇 때문에 옳지 않은지에 대한 고민이 있나. 잘 모르겠다. 별 생각을 하지 않다가, ‘쥬쥬하우스의 매니저’가 되고 보니, 곤란한 문제가 됐다. 그것도 ‘쥬쥬하우스’에 해가 되는 것이 문제다.

   죽지 말고 살아남자고 말하는 사람을 비겁자라고 꾸짖으며 학생들을 독려해 자살하는 선생이라니. 세실이 아주 어릴 적부터 그녀에게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세이젠  할머니는 자신을 남겨두고 죽음을 택한 어머니를 전쟁 영웅으로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긴…… 전쟁 영웅의 후손들은 전부 그런 식이겠지…… 주희는 그런 생각을 하다 다시 잠에 들었다. (12-13)

   이렇게 ‘세실’에 관하여, 생각하려다 말기도 한다. ‘그런 식이겠지’. 옳고 그름은 없다. ‘그런 식’이라는 말에는 정말이지 편리한 판단이 들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주희’는 ‘세실’을 환대하고 있던 것이 맞긴 한가.

   “주희씨도 성형을 좀 했겠죠? 한국 여자분들은 성형을 많이 하니까요. 보편적으로.”
   주희는 그녀가 ‘보편적으로’라는 단어를 안다는 사실과, 그렇게 무례한 말을 웃는 얼굴로 한다는 사실에 모두 놀랐다. 주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세실 상,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에요. 일본에선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요?”
   “왜요? 미인이라서 그런 건데요. 또 한국 여자는 성형을 많이 하기도 하고요.”
   “한국 여자가 성형을 많이 한다고요? 그러면 일본 여자 대부분은 AV를 찍나요? […] 그런 말이나 다름없는 거예요. 알겠어요?” (7)

   ‘세실’의 발언은 말마따나 ‘정치적으로 바르지’ 않다. 나 같아도 ‘주희’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물감이 남는다. 이를테면 ‘한국 여자는 성형을 많이 한다’는 오해는, 윤리적인 문제인가? 여기서 드러나는 것 역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세실’의 불일치가 튕겨져 나가는 순간이다. (참 조심스러워지는 대목─’세실’이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실’의 잘못(!)은 윤리적인 문제라기보다 오해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항상 윤리가 정확한 옳고 그름의 문제인 것은 아니며, 어떨 때는 편리한 방식으로 불일치를─정작 중요한!─튕겨내기도 한다. 그렇게 불일치가 튕겨나가는  순간 ‘이방인’이 탄생한다. 또 문제적인 일치들이 유지된다. 이것은 ‘주희’의 사연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불행들의 사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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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습속ethos으로서의 윤리와 모럴moral

   랑시에르로 돌아오자. 그는 ‘윤리’라는 말을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습속ethos로서의 윤리에 ‘그치는 것’을 싫어했다.

   “윤리의 지배는 예술의 활동들이나 정치의 활동들에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의 지배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구분되지 않는 영역의 구성을 의미한다. 윤리는 규범이 사실 속에서 해체되는 것이다.” (재인용: 진은영, 2009)

   정치나 예술이 ‘윤리화’할 때, 진짜 옳고 그름의 판단은 기존의 습속, 사실들, 혹은 합의되어 있던 질서 속으로 녹아버린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문학은 정치적이어야지 윤리적이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윤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견고한 일치를 구성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이미 거기에 있는 기준으로서의 습속! 불일치가 끼어들고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윤리들마저도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정치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실험하는 기술이다.

   (무조건적으로 기존의 합의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라는 변명, 을 굳이 해야 할까. 요점은 ‘정작 필요할 때,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 세대는 그런 특이점 한가운데에 있다.)

   그는 습속ethos으로서의 윤리에 대비하여 ‘모럴moral’을 이야기한다. “모럴이란 선과 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감각적 분배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활동을 의미한다.” (진은영. ‘시와 정치: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 “비평문학”, 2011 (39), 470-502. 477p) 기존의 방식에 편리하게 안주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끊임없이 묻는 일이다. 그리고 불일치의 ‘다음’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모럴’은 체계나 기준이라기보다 태도다. 예술의 태도이며 정치의 태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정치가 모럴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나. 기존의 일치를 당연시하고 어떤 불일치도 상상하지 못하는 공동체를 랑시에르는 “윤리적 공동체”라고 부른다. (진은영, 2009) 여기서 불일치를 가져오는 자는 우연한 이방인으로 취급받는다. 거기서 튕겨져나간다. 그는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다. 목소리는 언어가 아니라 뜻모를 외침이 된다.

   마르디 그라스! 나는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윤리적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여야겠다. ‘주희’는 거기서 튕겨난 불일치, 이방인이었다. ‘세실’도 마찬가지. “전 세계 여성을 잠재 고객으로. […] 여성을 환대하는 공간”(박민정, 3)인 명동에서 ‘세실’은 우연히 거기 있는 일본인 전쟁 영웅 후손이다. 끝까지 동상의 의미를 모를 수밖에. 그렇다면 이 소설은 불일치가 불일치로 남게 된 사연, 그 모든 실패와 불행의 사연에 관한 이야기다.

*

   그러니까 ‘주희’와 ‘세실’의 관계는, 만남이나 연대가 아니다. ‘주희’는 ‘세실’을 통해 어떤 ‘실패의 원리’를 목격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화요일을 참회하고 있게 된 원리이며 ‘주희’와 명동이 ‘세실’을 튕겨낸 원리를.

   뉴올리언스에서, 마르디 그라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은 ‘주희’의 불일치가 튕겨져나가는 사건이었다. 뉴올리언스의 펍에서 ‘주희’는 언어의 문제라기보다 공통감각의 부재로 소외되고 있었다. 친구인 ‘J’에게서마저도. 그들은 아마 마르디 그라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뉴올리언스와 마르디 그라스는 먼저 어떤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주희’는 그것을 몰랐다. 그 공간에서 그 공간에 대한, 감각적 불일치. 이는 권력의 비대칭이다.

   아니나다를까 마르디 그라스는 불일치로서의 ‘주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show your tits!’라는 구호는 그곳의 습속-윤리였다. 그것이 원리이며 권력이다. 도대체 어떻게 “남자들에게는 최고의 축제”라거나 “마르디 그라는 자유와 해방의 축제”라는 말이 가능한지(박민정, 5). 도대체 왜 포르노 사이트의 운영자는 ‘주희’의 메일에 답하지 않는지. 도대체 어떻게 그 가해자들이 되려 옷을 벗지 않은 ‘주희’에게 “우린 네 얼굴을 알고 있어, 썅년아.”(박민정, 3) 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건지.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불행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주희’는 그 원리를, ‘세실’의 불일치가 ‘주희’에게도 명동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로 그 순간, 문득 깨달은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결말은 그런 틈새에 해당한다. 마르디 그라스와 명동이라는 윤리적 공동체는 너무나도 견고했다. ‘따라가고 싶다’고 말한 자신을 떠올리면 눈을 질끈 감아야 할 만큼.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앞으로도 모를 테고, ‘주희’ 또한 화요일마다 참회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들의 불일치는 불일치 이외에 아무 것도 되지 못했다. 불행은 그런 식으로 발생한다. 내가 소설에서 찾은 것은 정치의 실종과 습속의 과잉이다. 다음 발을 딛기도 전에 거부당한 불일치이며 시작도 하지 못한 비판이다.

   (이 소설이 정치적이지 않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이 정치의 실종을 말하고 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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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모를 첨언 : ‘주희’가 보여준 태도들로 인해 ‘주희’는 화요일마다 참회해도 싼 인물이다, 라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이 소설을 변호하는 것은 ‘주희’가 스스로를 탓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 마르디 그라스와 명동은 다른 공간이다. 단지 닮은꼴이 드러나는 틈이 있을 뿐, 그것이 서로에게 이런저런 구실을 줄 수는 없다. 세상에, 그것이야말로 ‘대단히 습속─윤리적인’ 오해다.

   (또다른 첨언 : ‘윤리’라는 단어의 비판적 사용에 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경우 ‘습속-윤리’라고 표기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있다─나는 반윤리주의자가 아니며, 랑시에르도 아마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제 페미니즘 소설은 증언에서 끝나는 일을 그만해야 한다, 라고, 이 글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한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조심스레 생각건대, ‘증언’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페미니즘 소설이 징벌 서사를 구현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는 섣불리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놓친 층위가 있을지 모르고, 사실 나 또한 서너 번은 판단을 번복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단순히 피해 서사를 소비하는 또 하나의 흔한 페미니즘 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그렇지 않기를 시도한 소설이다. 증언이라도 이런 증언이라면 괜찮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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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이 지난한 비평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습속’이라는 이름이며 어떤 불행의 원리다. 폐허에 도착했다고 여기는 순간 습속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진정한 파괴자’로 거듭나는 일은 습속에서 벗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다. 랑시에르처럼 말하자면 ‘모럴’이라는 태도,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다음 올 것들을 위한 ‘파레시아’다.

   그래야 비평이고 비판일 테다. 균열과 파편에서 멈추지 않는 일, 다음 성좌를 구축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 많은 함정과 환상, 기만이 도사리고 있다. 문학이라는 일 혹은 정치라는 일에는 불편함이 필요하다. 편리하게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다음을 위한 파편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파편을 얻고 나서도 습속에 기댄다면 폐허 이전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행을 낳으며.

   나는 그런 쳇바퀴를 돌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직 모르겠다. 필명의 값을 해낼 수 있을지. 고작 이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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