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샐리 해스랭어의 책 Resisting Reality를 읽고 있다. 책을 읽음과 동시에, 강독회 운영을 위해 강독 범위를 한국어로 다시 옮긴다. 전체를 번역하려는 작업으로는 처음 손을 댄 ‘책’이다. 그저 읽을 때와는 달리, 한 문장 한 문장을 옮기며 읽으니 분명 새로움이 있다. 오독하거나 간과한 문장들을 찬찬히 다시 살피게 된다.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한 경험이다. 각설하고, 서론에서의 다음 언급으로 글을 시작해 보자.

[…] 어떤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또는 ‘단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라는 주장은 때로 그것이 허상에 불과하다거나, 적어도 그것이 전적으로 실재하지는 않음을 암시한다. 헌데 우리는 인종과 젠더가 비실재적이라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일까? 피지배적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인종이나 젠더, 나이, 장애 등과 같은 것은 때로 너무나 실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사회적 구성에 있어 허상이란(것이 있다면) 무엇이며, 실재란(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Haslanger 2012, 5, 나의 번역.

이 세계에는 사회적 사실들의 자리가 있다. 이 자리들이 어떻게 위치지어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다. 누군가는 사회적 사실들이 물리적 사실들로 인해 참이 된다고 할 것이다(이를 최근의 철학자들은 조금 유식한 체를 하며 ‘물리적 사실들이 사회적 사실들을 기반짓는다(Physical fact ground social facts)’라고 표현한다). 또 누군가는 오히려 물리적 사실들이 사회적 사실들로 인해 참이 된다고 할 것이다. 여하간 이런 지위는 지금 문제 삼을 것이 아니다. 사회적 사실들이 그 자체로 실체적으로 자리잡기보다는 다른 무언가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대도, 그때 바뀌는 것이 무엇인가? 이 점을 물어 보아야 한다.

‘열정’이 쌓아올리는 것

어떤 열정들에 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이전 글, “그림 그리기”에서 나는 이른바 ‘형이상학적 열망’에 관해 언급했던 적이 있다. 내가 말했기로, 이 열망이라는 것은 세계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그러한 열망이다. 말하자면 ‘실재에 대한 열정’ 따위인 것이다. 왜 우리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가? 나는 당시에 이렇게 말했었다.

왜 우리는 하나의 그림을 그리려 할까? 자연스럽게 누군가 자신과 다른 인간이 있음을 믿으며, 또 그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나뿐이라면 이렇게 나의 의사에 반하는 일들이 한가득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그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적 사실이다. 실존적 경험 속에서 우리는 타자가 존재함을 강하게 믿는다. 다원적인 경험이 절대주의를 좌절시키듯 타자에 대한 경험은 회의주의를 좌절시킨다.

여정 2018.

형이상학적 열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간주하는 세계를 통합되었고 의미 있는 그림으로 완성하려는 그러한 열망이라는 것이다. 이 열망은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가 갖는 자연스러운 열정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의미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욕망이 그러한 열정을 추동한다. 이렇게 추동된 열정은 우리로 하여금 형이상학적 그림을 그리게 한다.

이 그림은 그저 그림이고 마는 것이 아니다. 세계에 대한 그림을 마음에 품은 이들은 그 그림이 함축하는 바들을 기대하며 행위한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그 행위들을 통해 그러한 바들이 성립하게 된다. 가령, 여성 혐오적 그림을 마음에 품은 이들은 여성을 교육으로부터 배제할 것인데, 그 그림이 함축하는 ‘여자는 지적으로 열등하다’라는 점은 이 배제 행위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그림은 세계를 그것과 총체적으로 꼭 닮게 재구성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그것의 부분을 세계의 대응되는 부분과 꼭 닮게 만들 능력을 갖기는 한다.

그런데 ‘그림’의 지지자들이 배척하려는 회의주의자들은 때로 더 높은 층위에서 그림의 가능성 자체를 파훼하려 한다. 이 때 그림의 편에 선 이들은 더 높은 차원의 회의주의자들이 있는 곳에까지 다시 올라간다. 올라간 뒤엔, 회의주의자들에게 ‘세계를 보전하려는 열망은 헛되지 않으며, 그 열망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은 유의미한 것이다!’라며 반박 공세를 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층위가 곧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의 자리가 되겠다. 또는 이를 두고 ‘메타형이상학’적 층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의 열정, 즉 메타형이상학적 열망은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에로 우리들을 되돌려놓으려는 그러한 열정이다. 형이상학적 열망이 세계에 대한 열정이라면, 메타형이상학적 열망은 행위에 대한 열정이다.

이러한 열정은 과연 공허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때로 형이상학적 열망을 잃어버릴 위치에 놓이는데, 메타형이상학적 열망이 추동하는 추상적인 작업은 그 형이상학적 열망을 되찾고 우리가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지금까지의 대강을 살피자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이들 ‘열정’이라는 것은 세계에 비추어 공허하지 않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열망은 대상 세계에 행위를 부과함으로써 그 세계를 바꾼다. 메타형이상학적 열망은 형이상학에 의미를 부과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작업을 지속시킨다.

세계라는 잔여분

여기까지의 ‘열정’에 대한 옹호만 보자면 즉각적으로 드는 의문이 있다. 아니 그렇다면, 형이상학이 목표하는 그러한 세계가 있기나 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욕망과 메타형이상학적 의미 부여를 통해 지지된, 즉 정신적인 데에만 기초한 것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형이상학적 열망을 따라야 할 것인가? 단지 마음 속에 있는 세계의 그림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것일 뿐인데 말이다.

이는 그림 그리기에 대한 전적인 오해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 적어도 세 측면에서 세계의 잔여분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 세 측면은 진리, 정당화, 의미의 차원에 각각 닿아 있다.

먼저 의미의 측면을 살펴 보자. 가령 우리가 ‘금’에 관해 탐구한다고 할 때, 우리에겐 그 금에 관한 의미의 공유가 요청된다. 그런데 이 의미의 공유라는 것은, “금”이라는 표현에 단지 현상적인 면(“노란색 금속”)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인 면(“79번 원소로 구성된 고체”)과 연관되는 방식으로 의미가 부여될 때에나 잘 일어날 수 있다. 현상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는 정확히 일치함을 확인할 수도, 언제나 옳게 판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탐구 대상이 개체가 아닌 종(kind)일 때, 그 종에 대한 본질이 요청된다.

혹자가 ‘흑인’에 관해 탐구한다고 하자. 이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탐구자는 우리가 “흑인”이라는 종술어의 의미를 잘 공유하고 있다고 간주할 것이며, 이러한 공유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인 종적 본질을 가정하고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탐구자는 흑인의 본질이 단지 우리 정신에 투영된 바에나 말로만 이루어진 정의에 있지 않고, 대상세계에 그 본질이 있음을 선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당화의 측면이다. 위의 인종차별적 탐구자가 이제는 ‘흑인은 백인보다 더 빨리 뛰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이 신념의 정당화 여부는 단지 그 탐구자의 머리 속에서 이 신념이 납득된다는 사실 여하에 있지 않다. 이 신념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외부적 조건들이 성립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가언적 질문이 아닌, 가령 ‘이 사람은 흑인인가?’와 같은 정언적 질문에서도 사정은 같다. 이 때엔 오히려 정당화의 외재성이 더 명백해진다. 탐구자는 이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단지 자신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점을 들 뿐 아니라, 논의되는 그 사람이 흑인의 본질(로 요청되었던 것)을 실현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보여야 한다. 이는 외재적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진리의 측면에서 이 모든 이야기들을 조망해 보자. 진리는 어떤 신념 또는 명제가 갖는 특성이다. 이 특성은 그 명제가 세계와 잘 맞아 떨어지는지의 여부에 따라 참 또는 거짓으로 결정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두 질문은 진리의 차원에서 응답될 수 있다: 왜 의미는 머리 밖에 있는가?, 왜 정당화는 마음의 납득만으로 충분하지 못한가?

머리 속의 현상적 특성들만으로는 어떤 표현이 의미를 갖게 된 대상의 전형적 특성을 지시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실패의 경우, 현상적 특성을 통한 기술은 축자적으로 참이 되는 데에 실패한다. 따라서 의미는 머리 밖에 있다. 마음의 납득은, 어떤 신념이 참이 되는 조건을 오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정당화는 마음의 납득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리고 진리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변증법적 삶

보았듯 세계와 열정은 공히 중요하다. 열정은 세계에 놓인 우리가 갖는 불가피한 욕망의 산물이며, 세계는 우리의 열정에 한계선을 그어준다. 그리고 그 둘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데, 나는 그 지점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다. 우리의 열정은 세계 속에서 살아감에 따라 비로소 의미를 얻는 개념들로 작업을 진행하며, 우리의 세계가 우리를 제약할 장소는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점을 조금만 상세히 풀어 보자.

이야기는 예외적 상황이 발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분명 금과 다른 성질들이 다 같은데 노랗지 않은 금속이 발견되었다거나, 금이었던 것이 갑자기 노랗지 않아졌다고 해 보자. 또는 흑인으로 간주된 어떤 이가 흑인의 본질적 특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실현하지 못한다고 해 보자. 또는, 남자인 내가 남자의 통념적 특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런 경우들에서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의 신념 중 하나를 수정하거나, 우리의 경험을 부정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예외 사례가 쌓일수록 그 부정을 위한 부담은 강해진다.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의 신념을 수정하도록 강제된다.

나는 셋잇단음에 실린 다수의 글에서, 이러한 예외적 상황에 필요한 것이 비평임을 암시했다. 비평이 대상으로 삼는 신념들이 문제를 갖는 지점은 우리의 개념에 관련된다. 어떤 것이 금이고, 흑인이고, 남자인 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수정되어야만, 이 문제와 관련된 우리의 신념들이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정을 위한 논구는 내가 이해하기로 비평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즉, 지금 요구되는 것은 개념 비평이다.

그렇다면 이 개념 비평은 어디에서 그 정당성을 얻는 것일까? 바로, 어떤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 개념의 사용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있냐는 것이다. 가령, 금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 개념을 무의미하게 사용하도록 이끈다면, 우리는 더 나은 방식으로 이해를 수정해야 한다. 또 가령 흑인에 대한 어떠한 개념적 이해도 유의미할 수 없다면, 흑인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우리의 개념이 세계의 어떠한 부분을 지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지목된 것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있도록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지를 볼 때 가능하다. 직접적으로 볼 수 없을 때에는, 우리의 개념적 활동이 자꾸만 실패함을 통해서 우리의 개념적 이해가 그릇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정된 이해는 누적되는 성공과 무해한 실패만의 존재를 통해 옹호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판단의 과정은 세계와의 직접적 대면에서만 가능하다. 이로부터, 세계의 구성을 살펴보려면 그 세계가 존재할 것이 요청된다. 그 세계를 직접적으로 못 보는 경우에도, 우리 개념의 실패는 세계로부터의 입력으로만 발생할 수 있다. 상기했던 예외적 상황들은, 개념적 반성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개념적 실패를 증명하는 셈이다.

예외적 상황과 이를 위한 비평, 그리고 그 비평의 근거를 조망하며 우리의 시선은 세계에서 열정에로, 그리고 다시 세계에로 나아간다. 이러한 조망이 보여주는 바는 다름 아닌 ‘변증법적 삶’ 내지 ‘삶의 변증법’이다. 우리는 세계를 그려내고, 그 그려진 세계에 행위하고, 행위는 반작용을 받아 그렸던 세계를 수정한다. 그리고 이 반작용은 세계 자체로부터 온다. 이렇게 세계와 열정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 대화가 이어진다는 점만으로도 우리는 열정이 무용하지 않음을, 그리고 그것이 단지 고립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점을 간과하게 되는 것은 차라리, 이미 우리의 열정을 고립된 것으로 보고 있는 우리의 습관으로 인한 것은 아닌가? 세계와 마음의 대화를 선취적으로 봉쇄하지 않는 한 열정은 무용하거나 고립된 것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대화를 드러내는 것은 ‘열정에 대한 열정’을 옹호하는 작업에 있어 핵심적인 일일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늘상 데카르트를 비난한다. 그는 부적절한 이원주의적 세계관을 버리지 못한 ‘근대인’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잘 이원주의를 극복하고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중 다수는 여전히 이원주의자이다. 사회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기반해 있다면, 사회적인 것은 비실재적이다. 또는 허구이다. 아니면, 모든 것이 사회적인 것 내지 인간 정신의 구성 하에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것 또한 허구이다.

하나의 시선은 우리가 생생하게 경험하는 삶의 절반을 소멸시키려 하는 일로, 다른 시선은 우리가 굳건히 믿는 세계를 그 기초가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두 귀결 중 어떤 것도 따를 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차라리 마음과 몸이 하나의 세계, 실재적인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마음과 사물들이 끝없는 대화를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거리낄 이유는 전혀 없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 ‘열정에 대한 열정’을 미심쩍게 보려는 우리의 경향성은 잘못된 이분법의 산물에 불과하다. 열정에 대한 열정이 구축한 ‘열정의 의의’는 열정에로의 길을 닦는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실재에의 열정과 조우한다. 실재에의 열정은 이제 우리 실재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로부터 우리는 ‘더 잘 파악된’ 실재에로 나아갈 기틀을 얻는다. 이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는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며, 차라리 가장 자연스러운 그림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그림을 수용한 채 우리가 하고 있는, 또한 할 수 있는 작업들을 그대로 해 나갈 수 있다. 여전히.

참고 문헌

  • Haslanger, Sally. 2012. Resisting Reality: Social Construction and Social Critique. NY: Oxford University Press.
  • 여정. 2018. “그림 그리기”, 지평 L’Horizon, http://www.lhorizonsociety.com/583/ (2020. 9. 4. 확인)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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