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덤R. Brandom은 맥도웰의 인식론적 내재주의가 개인주의적indivisualistic 귀결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맥도웰이 『마음과 세계』(“Mind and world”)에서 보여준 인식론적 구상은 자신의 사회 구성적social-constructive 해법, 다르게 말하면 헤겔적 방법을 통한 수정을 거쳐 완성될 수 있다. 반면, 맥도웰은 자신의 인식론을 브랜덤이 제안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인식론적 정당화의 권리 주체를 개인에게 귀속시키지 않는 브랜덤의 철학은 어떻게 개인이 실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다. 본고는 맥도웰과 브랜덤 사이에 오간 논쟁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정당화에 대한 양자 간의 이해의 차이가 그러한 논쟁을 만든 핵심적인 쟁점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예비적 논의로서 두 철학자가 서 있는 경험주의 논제의 세부적인 흐름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경험주의 논제를 반대되는 두 조류로 나눌 수 있는데, 경험주의적 내재주의와 경험주의적 외재주의가 그것이다(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들을 ‘외재주의’, ‘내재주의’로 부르겠다). 내재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자들은 경험에서 정당화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경험의 주체가 권리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빨간 사과를 보고 그것의 ‘빨간색임’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주체의 몫이다. 주체가 경험의 과정에서 내리는 판단은 주체 외부의 믿음 체계나 언어 공동체에 우선한다. 경험에서 정당화된 믿음을 얻는 것은 경험 주체에 내재된 능력인 것이다. 반면, 외재주의자들은 경험에서 얻은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은 주체 외부의 기준이라고 설명한다. 외재주의의 큰 줄기인 신빙주의에 따르면, 경험적 믿음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것이 참일 확률probability, 혹은 신빙성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신빙성을 판단하는 것은 경험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믿음을 판단하는 외부적 기준들이다.

맥도웰은 경험주의적 내재주의를 옹호한다. 그에 따르면, 주체는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믿음을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한 정당화는 이성적 동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물론, 주체는 경험 일반에서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맥도웰은 주체가 경험 일반에서 지니는 인식론적 권리를 보증하는 데에는 그러한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맥도웰을 내재주의자인 동시에 인식론적 선언주의자disjunctivist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경험의 감성sensation 단계가 이미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의 주장을 통해 구체화된다. 셀라스가 말한 것처럼, 어떤 것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인과적 설명과는 다른 규범적 맥락에서 이루어진다(Sellars,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그리고 그러한 규범성은 이성의 논리적 공간logical space of reason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주체의 감성은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주체는 경험의 가장 원초적인 단계인 지각perception에서부터 이미 자신의 정당화 능력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추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즉각적인 이성의 활동이다.

반면, 브랜덤은 인식론적 내재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를 외재주의자로 정의하는 것 또한 만족스럽지는 않은데, 이는 브랜덤이 외재주의와 내재주의 어디에도 명확히 포착되지 않는 독특한 인식론적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덤이 볼 때에 경험적 믿음은 경험 주체와 그 주체와 같은 언어 공동체에 속한 타인 간의 상호 평가scorekeeping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내가 빨간 사과를 보고 “그 사과는 빨강임”을 판단하고 그것을 규범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주체 혼자만의 실행인 것이 아니라, 주체가 언어 공동체 내에서 다른 언어 사용자들의 언어사용을 추론적으로 고려하는 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주체가 언어 공동체와 맺는 관계가 진리 조건에 구성적임을 의미한다. 물론, 브랜덤은 주체가 실재reality와 관계를 가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이 점에서 브랜덤은 사회 구성주의의 강한 버전과는 구분된다). 브랜덤이 볼 때에 주체는 실재, 혹은 지시체와 인식론적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러한 관계는 변증법적이다. 따라서 주체는 추론을 통해 실재에 더 다가갈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언어 공동체 내에서 타인의 언어 사용을 고려하는 주체의 사유 활동에 다름아니다. 주체는 추론을 통해 유아론적 한계를 벗어나 실재에 더 다가갈 수 있다.

브랜덤은 경험에서 추론이 이미 실행되고 있으며, 그러한 실행이 경험 주체에 내재된 능력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추론을 경험에 구성적이라고 보는 브랜덤의 입장을 추론주의inferentialism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 맥도웰은 추론 이전에 선험적으로 주체가 정당화의 권리를 감각에서 이미 행사하고 있으며, 이것이 지각 경험과 지식을 가능케 하는 토대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양자의 경험주의 논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을 때에, 브랜덤이 맥도웰의 인식론을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 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맥도웰과 브랜덤은 모두 경험주의 논제, 즉 경험으로부터 지식의 획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브랜덤의 입장에서 주체의 내재적 능력이 오롯이 경험주의의 요구를 만족할 수 있다는 맥도웰의 주장은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경험적 정당화는 주체 외의 다른 개인을 필요로 한다. 언어 공동체에 속하는 다른 사용자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실재를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맥도웰 또한 언어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세계』에서 맥도웰은 공동체가 주체의 인식론적 능력을 함양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는 전통을 통해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육성하는 교육Bildung을 수행한다. 다만, 맥도웰은 경험 내용의 정당화에서 가장 우선되는 권리를 가지는 정당화자justifier가 바로 주체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리의 행사는 추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즉각적인 것이다. 반면, 브랜덤에게 있어 주체는 실재를 사유하는 데 ‘우선적인’ 권리를 가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재와 주체가 지니는 관계는 수평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체는 변증법을 통해 실재에 가까워지도록 인식론적으로 지양되어야만 한다.

맥도웰은 브랜덤의 인식론적 입장이 과연 경험의 “주체”가 어떻게 경험 내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브랜덤의 철학에서 주체의 인식론적 정당화란 언어 공동체와의 연관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맥도웰이 볼 때에, 이는 경험 내용에서 직접적인 정당화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를 설명하지 못하는, 간접적인 경험주의 논제에 그칠 뿐이다. 맥도웰은 경험이 경험 주체 자신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대 철학에 내재된 철학적 불안, 즉 세계가 어떻게 경험을 통해 주체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브랜덤은 경험 주체에 정당화의 역할을 내재화하는 대신, 해석자interpreter와 피해석자interpretee의 상호작용에 의존하여 경험적 지식을 설명한다.

브랜덤은 맥도웰이 경험적 지식의 구성에 있어서 공동체의 사회적 역할을 경시했다고 비판한다. 그는 『마음과 세계』에서 맥도웰이 보여준 철학적 기획이 자신이 제안하는 수정을 거침으로서 완성될 수 있다고 제언한다. 그러한 수정은 “Making It Explicit”(1994)에서 브랜덤 자신이 보여준, 언어의 사회 구성적 측면을 경험의 토대로서 고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에서 주체는 경험의 정당화 권리를 오로지 변증법적으로, 다시 말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브랜덤은 이러한 그림에서도 경험주의 논제에서 주체의 권리 행사가 제한되지는 않는 동시에 맥도웰의 개인주의가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여전히 주체는 추론을 통해서라도 실재에 대한 지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도웰이 보기에 경험의 토대를 주체에서 언어 공동체로 이관하는 브랜덤의 시도는 『마음과 세계』의 주요한 목표인 “근대 철학에 내재된 불안”을 해결하는 데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주체와 실재 간에 직접적이지 않고 변증법적인 관계, 특히 추론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간격을 설정함으로써 실재에 대해 주체가 지니는 특권적 권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브랜덤이 개인주의라고 비판하는 바로 그 지점이 맥도웰에게는 경험주의 논제를 불안 없이 도입하는 핵심적인 부분인 것이다.

맥도웰과 브랜덤은 경험주의 논제에서 경험적 지식의 획득을 성공적으로 설명하려는,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두 철학자가 각자의 인식론을 전개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 차이는 관찰 보고observational report를 정당화하는 우선적인 권리가 언어 공동체에 있느냐, 혹은 주체 개인에게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단순히 개념의 명료화와 같은 기본적인 작업으로는 판가름날 수 없는 근본적인 철학적 견해의 차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물을 수 있다. 브랜덤이 말하는 것처럼, 언어 공동체에서 타인의 언어 사용에 대한 고려가 경험적 W지식의 형성에 구성적이라면, 과연 주체 자신이 경험에서 실재와 직접적 관련을, 혹은 브랜덤의 설명에 의하면, 데 레de re 양상적인 지향성을 지닐 수 있는가? 이러한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고 부정적이지 않은가?


참고한 텍스트
─ John McDowell. 1996. Mind and World.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 Wilfrid Sellars. 1997.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 Robert Brandom. 1998. Making it Explicit.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하니
marks97@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