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은 내게 꽤나 흥미로운 평론이다. 12년 전에 두 분의 굵직한 선생님께서 같이 쓰신, 미래파 시에 관한 글이다.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하다 보면 열정에 대한 열정에 대한 열정에 대한… 하고 재미를 붙이게 된다. 나는 최근 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내가 좀 싫은 마음이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나를 싫어하는 나를 좀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 그러다 보면 또 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나를 싫어하는 나를 좀 좋아하는 거 같은 나를 싫어하는 나를 좀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한데, 정말이지 약이 오른다. 이 평론을 읽으면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재밌는 건 ‘미래파’라는 단어가 시인이 아니라 평론가의 단어였다는 점이다.

미래파가 하나의 담론적 사건이라면, 그 사건의 질료는 미래파의 시이지만, 그 형식은 비평의 언술이다. 즉, 미래파의 시는 그들이 미래파로 ‘인지’되고 ‘호명’되는 과정 속에서 담론적 실체로 부각되었으며, 따라서 미래파 담론에 대한 두 번째의 접근은 미래파의 시가 아닌 그들에 대한 비평적 언술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신형철, 진은영 2008, 131

정작 미래파라고 호명된 시인들은 심드렁했다는 이야기겠다. 서로 신경쓰지 않고 그냥 시나 썼는데, 눈 떠 보니 같은 이름 아래 묶여 있는 셈이다. 아무것도 없이 억지로 그랬든 실제로 뭐가 있었든, 이름을 붙이고 담론으로 만든 건 시인이 아니라 평론가들인 셈이다. 난 이게 참 묘하다고 생각한다.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은 그런 상황을 요약한 말이다. ‘실재에 대한 열정’은 원래 알랭 바디우가 서양의 20세기를 정리한 말이란다. 20세기는 그에 따르면 정치적으로는 혁명, 예술적으로는 실험과 전복이라는 방법으로 상징계를 파괴하고 틈을 열어 실재를 보고 싶어한 사람들의 시대였다고 한다. 그들의 열정을 ‘실재에 대한 열정’이라고 부른 거고. 바디우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유통기한이 끝났다고도 진단한다. 신자유주의가 강해지면서 실재에 대한 열정조차 코드화하고 상품화해버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IMF가 21세기를 열게 되면서, 20세기 후반 민주화 운동의 뜨거움(실재에 대한 열정)이 IMF를 지나 소진됐다고 볼 수 있다. 실재(혹은 실재에의 열정)의 유통기한이 끝난 자리에 새로운 시인들이 나타났고 평론가들은 이 경향을 가만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미래파는 너무 물렁물렁하고 자유로웠던 나머지 일종의 빈 자리가 돼 버렸다. 실재고 서정이고 평론이고 뭐고 별 신경도 쓰지 않는 시들이어서 되려 강한 이름짓기가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다.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은 그래서 재밌고 적절한 말인 거 같다. 내가 좋아하는 건 실재에 대한 열정인데, 이게 더는 먹히지 않아서 어쩔 줄 모르다가 뭔가 모호하고 새로운 게 나타났으니 이거야말로 다음에 올 실재에 대한 열정 아니겠습니까, 하는 열정 아닐까. 대상이 ‘실제로’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더 재밌는 건,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이 그걸 지적하면서도 평론가들 편에 서는 듯한 모호하고 유보적인 입장을 보여 준다는 거다. 실재 그 자체를 좋아하는 철 지난 열정도 아니고, 실재를 포기한 회의주의도 아니기 때문에,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새로운 힘이라는 거다.

실재의 열정이 더 이상 유효한 미학적, 정치적 전략이 되기 힘든 시대에, 실재의 열정을 읽고 구성하고 활성화하려는 이러한 역설적인 열정을 우리는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이라 부르고자 한다.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은, 실재의 열정이 잦아들어간 환멸의 시대를 사는 지식인이 냉소와 허무에 빠지지 않고,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진정한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것은 실재 그 자체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열정’을 열망하는 것이며, 실재의 열정이 아직 존재함을 그리고 실재의 열정이 아직 유효함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세기적 전환 속에서, 모든 가치들의 종언 속에서,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은 실재를 폐기하지도 않고, 실재를 순수하고 순진하게 ‘열망’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실재의 폐기와 실재의 열망 사이에서, 실재와의 ‘가능한’ 그리고 ‘잠재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파토스이다. 실재와의 관계는 끊어지지도 않고 밀착되지도 않는다. 그 관계는 계류된다. 계류를 통하여 사유는 사유의 시간을 벌 수 있다.

김홍중, 심보선 2008, 138-139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이쯤 되면 이 논문은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에 대한 열정 아닌가. 라고 말하면 너무 삐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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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내가 생각하기에 동형이질적인 이야기다:

최근에 ‘1일 1페이지’라는 콘텐츠가 도서 단행본 시장에서 눈에 띄고 있다.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나 『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한국사 365』같은 책들, 혹은 『1일 1클래식 1기쁨』 등등. 제목만 그런게 아니라 실제로 내용도 그렇다.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을 한 페이지에 채워 둔 형식이 전부다. 깊이도 내용도 별 거 없다. 책이라고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당장 인터넷 서점 독자평만 봐도 말이 많다. 쓰레기통에 넣었다며 배신감에 치를 떠는 분들도 있고, 뭐 어떠냐며 자긴 재밌게 읽었다는 분들도 있다. 출판계에서도 칼럼이 나왔다. 얕은 콘텐츠의 한계를 꼬집는 좋은(!) 글이다. 그러나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책의 앞뒷표지나 띠지, 혹은 온라인 서점의 출판사 제공 책소개와 같이, 책을 펼치기 전에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 있다. 이 정보들을 살펴보면 대충 셀링 포인트가 어떤 건지를 알 수 있다. 타깃 독자는 누군지, 이 책의 콘셉팅은 무엇을 중점으로 하는지, 이 책을 뭐라고 생각하고 파는지 등등등. 특히 어떤 독자를 ‘부르고 있는지’는 기획서의 전략을 파악하는 데 직결된다.

‘1일 1페이지’ 콘텐츠들을 살펴보면 ‘어려운 인문교양서가 두려운'(『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표4 띠지) 독자, ‘처음 배우는 사람, 다시 배우는 사람'(『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한국사 365』 표1 띠지) 등등, 아무래도 원래 책을 많이 읽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책은 아니다. 헤비 리더들보다는 1년에 책 1권을 읽을까 말까 하는 사람들이 타깃이다.

책을 펼치면 앞부속(머릿말, 목차, 제사, 백면 등등)이 놀랄 만큼 짧은 걸 확인할 수 있다. 뒷부속(나가는 말, 역자 후기, 색인 등등)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한국사 365』에는 ‘사용설명서'(라고 쓰여 있진 않지만 그와 다를 바 없는)가 들어가 있다. 진도를 체크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와 함께.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알라딘 미리보기.

본문으로 들어가면 텍스트에 숨이 막힌다. 판면이 너무 넓어 여백이 없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내가 넘기는 게 책장인지 먹장인지 잘 모르겠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읽기에는 먹이 너무 빽빽하고 집중력이 금방 흐트러진다. 한 페이지에 정보가 빼곡하다. 정확한 정보인지도 가늠할 수 없다. 각주도 미주도 정보 출처도 구체적이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낯설다. 이거 책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여기저기서 정보 주워다가 짜깁기한 거 아닌가. 이런 걸 돈 주고 어떻게 사지. 이런 걸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런 책이 늘어나면 좋은 책이 더 줄어들 텐데. 이게 인문 베스트셀러라니, 묵직하고 단단한 인문서들은 다 어디로 갔담, …

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거 같다. 나는 사실 이 콘텐츠들이 꽤나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이게 나쁜 책이라고 말하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고 생각한다(함정 참 좋아하지).

「1」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 ≒서권.

「2」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

“책”, “표준국어대사전” 2020.9.8.

살면서 사전에서 ‘책’을 찾아본 건 처음인 거 같다. 찾아봐도 별 거 없지만.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이라는 정의는 형식적이기만 하다.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춘 ‘사상, 감정, 지식 따위’가 내용에 해당하는 걸 터인데, 딱히 1일 1페이지 콘텐츠들을 책이라고 부르지 않을 기준까지는 못 된다.

책이 뭐냐는 물음이 쉬운 게 아니란 얘기다. ‘이게 책이냐?’라고 불평하는 일은 쉽지만, ‘책이 뭔데?’ 라고 되물으면 ‘모름지기 책이란’으로 시작하는 답을 내놔야 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 물음이 필요 없게 느껴진다면 각자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되고. 단지 ‘이게 책이냐?’라고 묻는 순간 어떤 질문들의 연쇄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불평을 진지하게 계속하기는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이 콘텐츠가 대충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애초에 헤비 리더를 위한 책이 아닌 걸 감안하면, 앞뒷부속의 실종이나 빽빽한 판면 같은 건 최적의 선택이다.

앞뒷부속은 책의 인트로, 아웃트로 연출이다. 책의 호흡을 만드는 일이다. 앞부속은 상승곡선을, 뒷부속은 하강곡선을 그린다. 잘 만든 앞뒷부속은 독자가 등반(몰입)할 수 있는 멋진 고원에다가 본문을 올려놓는다. 근데 그건 긴 호흡으로 읽으라고 만든 책 얘기지, 이 콘텐츠들은 해당 사항 없다. 책 한 권을 읽는 게 아니라 하루에 한 페이지를 읽는 게 목적이면 앞뒤 연출이 무슨 소용이람. 이 책에서 효용을 누릴 만한 독자들은 책의 호흡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되고.

판면도 마찬가지다. 좌우 여백과 행간은 읽기의 지속가능성과 관련한다. 너무 빽빽하면 읽는 데 부담이 된다. 너무 헐거우면 독서감이 생기지 않는다. 이 책은 뭐, 하루에 한 페이지만 읽으라고 만든 책이니까, 빽빽해도 괜찮다. 한 페이지에 내용을 충실히 담으려면 빽빽해야 할 것도 같다.

뭐, 원래 염두에 뒀던 독자를 위해 최적의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이게 책이냐?’고 묻는 일은(이렇게 묻는 사람은 책 깨나 읽은 사람일 텐데) 길을 가다가 다른 사람들 대화에 끼어 들어 훼방을 놓는 거나 마찬가지다. 원래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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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걸 이렇게 정리해도 되나. ‘이게 책이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당신 읽으라고 만든 책 아니에요’라고 답하는 건 건전한 문답인가. 이게 책이냐고 묻는 것에는 분명히 ‘책이란 모름지기’라고 시작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당신 읽으라고 만든 책 아니에요’라는 답도 그렇게 투명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당신 읽으라고 만든 책 아니에요’는 굉장히 탈맥락적인 발화다. 이 대답은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합의의 필요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때의 책은 전적으로 상품이며, 목적한 효용을 그 효용의 기대자에게 얼마나 잘 구현해 주는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여기에 책의 정의는 필요 없다. 좋음에 대한 합의도 필요 없다. 좋으면 좋은 거다,라는 말 정도면 충분하다.

‘이게 책이냐’는 질문과 ‘당신 읽으라고 만든 책 아니에요’라는 답 사이의 통약가능성은 그렇다면 희박하다는 거다. 서로 물음도 답도 되지 않는 평행선이다. 그리고 ‘당신 읽으라고 만든 책 아니에요’는 내게는 어쩐지 어쩐지 미래파의 스타일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게 책이냐’는 질문은 10년 전 평론가들의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비슷하게 느껴지고. 생각건대 ‘이게 책이냐’와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시다’에는 방향만 다를 뿐 같은 종류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읽기를 수동적 소비로 만드는 깊이의 실종이 문제다. 약간의 깊이라도 기대한 독자는 모두 실망한다. 벼락치기, 수박 겉핥기라는 반응이 선명하다. 책의 내용은 확인하고 덧붙이기에 가깝다. 한쪽에 지식을 압축한 잘 조직된 편집 기술은 멋진 일이나, 독자의 산만한 머릿속에 또다시 정보를 밀어 넣은 것에 불과하다. 불행히도 ‘한쪽 지식’은 정보 과잉을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집중력 자체를 생성하는 독서, 즉 필터 자체가 생겨나는 독서가 필요하다. 『다시 책으로』에서 매리언 울프는 몰입을 통해서 인간을 책 자체로 변화시키는 독서만이 산만한 뇌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고 말한다. 우리한테는 ‘깊이 읽기’가 필요하다.

[…] ‘한 입 콘텐트’ 시대의 독자에 맞추어 책은 진화 중이다.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방식으로. 서사를 잃으면 몰입도 없고, 몰입이 없으면 책과 독자가 하나가 되는 일도 없다. 이것은 혹시 책의 자살이 아닐까.

장은수 2020

시는 시가 더 이상 불필요한 역사적 시간을 기점으로 창조되고 있는 반면에, 비평은 시의 완성을 예감하는, 미래를 예지하는 시간을 딛고 있다. 시인들은 이미 오타쿠-동물이 되었지만, 비평가들은 인텔리겐챠의 형상을 품고 있다. 미래파 시학은 만화적인데 반하여, 미래파 비평론은 중후하고 고전적이다. […] 그런데 문제는 이제 지식인들의 ‘정신적 삶’인 것이다. 그들은 대중처럼 시대의 흐름에 완전히 스스로를 방기하지 못하고, 나름의 정신적 지표를 설정해야 하는 존재이다. 여기에 포스트 IMF 체제를 사는 지식인들의 궁지가 존재한다. 해답은 매우 모호한 것이다. 실재의 열정에 대한 열정이 그 가능성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또 다른 논의와 고민이 요구된다. 미래파 현상은, 한국 사회의 바로 이런 정신적 흐름과 지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김홍중, 심보선 2008, 141

책에는 몰입과 호흡과 깊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은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책이란 무엇인가’를 덜 사유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몰입과 호흡과 깊이에 대한 열정, 혹은 그 열정에 대한 열정일 뿐이다. ‘이게 책이냐’라는 물음이 책과는 상관없는 부정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시다’는 시와는 상관없는 긍정이다. 새롭게 도래한 시에서 어떻게든 ‘실재를 드러내는 새로운 법’을 찾아내는 일은 실재에 대한 열정에 대한 열정이지 실제와는 상관이 적다.

두 경우 모두 책이나 시가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다. 책이나 시는 그 미심쩍은 욕망을 투영하는 공간이 된다. 그 욕망을 무어라 부르나. 아마도 무의미에 대한 알러지 혹은 의미화에 대한 강박일 거다(이것도 너무 편한 명명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세계는 충분히 가벼워지고 있다. 혹은 중요하다고 지켜왔던 것들 중 사실 별 거 아닌 게 더 많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우리를 지키는 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와는 상관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계속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를 지키는 걸지도 모르겠다.

까다롭고 성가신 나르시시즘이다. 이를테면 “책의 자살”을 염려하는 일은 ‘책’에 대한 애도라기보다는 깊이에의 열정을 애도하는 일이다. 책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그 열정의 주인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나르시시즘을 깨닫는 일은 다음은 무엇이어야 하나.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을 발견해 놓고도 그걸 ‘실재를 좇지도 폐기하지도 않으므로 소진되지 않는 힘’이라고 포장하는 일은 나르시시즘의 반복 아닌가. 여기에 정작 실재는 없다. 실재를 ‘상상’하는 엘리트적 자의식밖에 없다. 그 발견 이후에 와야 했던 것은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좀비 같은 말이 아니라 그간의 자의식 과잉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혹은 책이라고 다 깊고 단단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다음엔 무엇이 와야 하나. 다른 독자를 위한 거니까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려도, ‘책이 이래도 되나’와 ‘당신 읽으라고 만든 책 아니다’ 사이의 통약 불가능성을 발견해도, 미심쩍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유의 매개로서의 책과 상품으로서의 책을 구분하는 일에는 아무리 건조하게 말하더라도 전자를 성역화해서 보존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게 아닌가. 여전히 엘리트적 자의식의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무의미함에 과민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완전히 건조한 중립은 가능한가. 묻고 답할 수 있는 문젠가. 또 그럴 필요는 있는 문제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나의 욕망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생각하다 보면 정말이지 찜찜해진다. 이런 생각과 말을 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를 생각하다 보면 그런 생각과 말을 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싶어지고, 마주보는 거울 속에 선 것처럼 ‘묻고 있는 나’가 끊임없이 증식한다. 이 고리를 나는 끊을 수 있는가. 열정에 대한 열정에 대하여 말하는 일은 또다른 열정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모든 의뭉스러움은 정확히 무엇을 향하고 있나.


참고한 텍스트
─ 김홍중, 심보선. (2008). 「실재에의 열정에 대한 열정」. 『문화와 사회』, 4: 114-146.
─ 장은수. 2020. “‘한 입 콘텐트’는 산만한 뇌를 진정시키지 못한다”, 링크(2020.9.8. 확인)
─ “책”.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링크(2020.9.8.)
─ David S. Kidder. 2019.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허성심 역. 위즈덤하우스.
─ 심용환. 2020. 『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한국사 365』. 비에이블.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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