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가 세르주 다네는 (장 루이 셰페르의 표현을 빌려)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응시했던’ 영화들이 있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영화관을 자주 다녔다. 고등학생 때는 교사가 그에게 〈밤과 안개〉(알랭 레네, 1955)와 〈히로시마 내 사랑〉(알랭 레네, 1959)과 같은 영화들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다네는 영화를 오락 이상의 것으로 사유하는 시네필이 되었다. 또한 인지도 없는 대역 배우였던 아버지가 그의 출생 전 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종되었기에, 다네에게 있어 영화는 부재하는 아버지의 흔적과도 같은 무언가였다. 그것은 앙드레 바쟁의 말마따나 방부 처리된 아버지의 세계였다(Serge Daney 1994).

20살 때 영화를 시작한 나에겐 언제나 열등감이 있었다. 나의 유년 시절은 어떤 영화와도 관련이 없었다. 가족, 하다못해 어떤 친족 중에서도 예술(그것을 뭐라고 정의하든) 관련 분야의 종사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결핍이었다. 영화란 보는 관점과 시기에 따라 수많은 삶의 양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거대한 것이어서, 10대에 영화를 접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그 자체로 아쉬움이었다.

처음에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다양한 경험에 대한 욕망으로 여행 다큐멘터리 PD가 되고 싶었던 아이가, 머리가 크고 생각이 많아지자 그 생각들을 영상으로 풀어내고 싶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많이 접해보지도 않은 채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 이내 우스워졌다. 그래서 무작정 여기저기에서 좋다고 하는 ‘예술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첫 해와 그다음 해에는 무작정 학교 도서관에 처박혀 400~500개의 영화를 보았다. 나는 거의 매일 영화 감상의 강박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 무대 예술을 막 접했고, 대학에서 철학을 복수전공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연극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그리고 영화와 사유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비롯된, 순전히 영화를 위한 선택들이었다.

22살에 영화와 연극을 하나씩 만들었지만, 양쪽 모두 완벽하게 나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한 결과물로 돌아왔다. 그것들은 심지어 많은 비용이 들어간 ‘비싼’ 쓰레기이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실천의 영역에서의 절대적인 경험 부족에 의한 것이었겠지만, 그 때는 지적 결핍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영화 감상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영화적 취향이 달라지고 있었다. 두 개의 작품을 여름과 겨울에 각각 마치고, 나는 동면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타르코프스키, 파스빈더, 안토니오니 등의 감독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있는 편이었기에 관련 논문들을 찾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영화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화란 무엇인가?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무엇을 통해 영화는 예술이 되는가? 영화와 다른 예술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현재의 영화는 어떠한가?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묻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질문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영화 이론과 비평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물론 이론과 비평은 전적으로 다른 분야의 것이지만, 앞서 언급한 감독들의 개별 작품에 대한 논문들(이론의 비평적 적용)로 공부를 시작했기에 당시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숱한 책과 영화들을 훑어보며, 내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영미권 영화에 정을 붙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태여 미국이 아닌 ‘영미권’이라고 서술한 것에는 철학적 맥락이 있다. 나는 예전부터 영미권 철학계에서 성행해 온 분석철학의 계보와 거리를 둬 왔다. 논리학과 언어학 등으로 강세를 보이는 분석철학은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명징’한 체계를 구축해왔다. 정확히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할리우드 영화도 기법과 시스템을 구축하고 효율과 확실성의 왕국을 지었다는 점에서 ‘영미권’적으로 다가왔다.

영미권의 영화는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기존에 상업적 성공을 견인했던 형식들을 활용해낸다. 어떤 형식이 어떤 효과를 (손쉽게) 자아낸다는 공식이 정립된 이후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영화를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대한 빠르고 싸게 영화를 찍어내고 절약된 시간과 비용을 광고와 마케팅에 부었다. 빈약한 내용은 상징들로 채워넣었다. 이러한 방식은 마침 부흥하기 시작한 아마추어 온라인 비평의 필요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김지현, 이상길은 “다른 예술에 비해 대중의 접근성이 높고 인터넷을 통한 재매개가 활발하게 이뤄져온 영화 장르에서는 아마추어 비평가들의 증가와 그로 인한 비평 생산 메커니즘의 변화가 빠르게 가시화되는 추세”이며, “영화평론가 집단이 전통적으로 범주가 넓고 경계가 모호하며 공식적인 등단 절차나 자격조건이 없다시피 해 진입장벽이 낮다는 점은 그러한 추세를 촉진하는 주요인으로 여겨진다”고 말한다(김지현, 이상길 2012). 특히 개인적 글쓰기의 공간인 블로그가 부상함에 따라 영화 비평은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영화) 이론과 비평적 작문에 대한 전문적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형식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가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물론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영화가 촬영기와 영사기의 (기계적) 발명을 통해 창조되었으며, 사운드, 컬러, 조명 등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기법들이 도입되어 변형됐기에, 형식적 논의의 필요성은 일정 부분 정당성을 얻는다. 이 속에서 아마추어 블로거들은 영화의 내용을 ‘해석’해 주는 것으로 일반 대중과 다른 전문성을 획득하는데, 바로 여기에 상징주의의 매력이 놓여 있다. 또한 김지현과 이상길은 유명 블로거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블로그 비평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중성’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제가 좋아서 쓴다기보다는 읽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홍상진), ‘깊이는 없지만 재미 있어서 영화마저 재미있어보이게 하는 글'(이준욱)이 ‘좋은 비평’이라는 의견” 속에서 그들은 예의 그 대중성을 위해 극장 개봉 영화를 신속히 리뷰해야 한다(김지현, 이상길 2012). 그들이 비평을 위해 하나의 영화를 재관람하는 횟수는 적어지고 비평은 감상 중심이 된다. 소위 ‘한 줄 평’이 횡행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상징주의 영화에의 반발심. 거기에 덧붙여진 해석 중심 비평에의 거부감. 이러한 심리적 고착은 편집의 윤리학적 문제와 궤를 같이한다. 전통적인 쿨레쇼프 효과가 모주힌의 얼굴을 차례로 기아, 공포, 욕망의 기호로 만들어냈을 때, 그것은 전적으로 영화에서 관객의 사고를 고정시키고 수동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할리우드의 빠른 편집은 관객의 시선이 가서 읽어내야 할 지점들을 일일이 제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화는 인간을 마비시킨다’는 은유가 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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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본질적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던 중 이렇게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비평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좋은 비평이란 무엇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좋은 비평은 기본적으로 좋은 영화와 관계된다. 세르주 다네는 “비평은 다음과 같은 이념에 의해서만 효력을 갖는다. 즉,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그리고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는 사람들)과 이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그리고 이를 볼 필요가 있는 사람들) 사이에 편차(décalage)가 있으며 이 편차가 소중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영화와 관객이 서로서로를 정확하게 대면하지 못할 때마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 약간의 글쓰기를 끼어 넣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비평을 정의한다(이윤영 2007).

(나 또한 영화 비평 블로거로서) 이전에 썼던 〈Faces〉(존 카사베츠, 1968) 비평에서 언급했지만, 영화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에 관한 예술이다. 여기에서 내용이란 단순히 서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형식 또한 촬영 기법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영화가 좋은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많다고 말해야겠다. 결국 영화란 ‘어떤 삶’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지’에 대한 탁월성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은 결국 이 탁월성을 드러내 보이는 작업이다(밤비 2020).

…라고 생각하고 비평문을 써왔다. 그러나 근래 들어, 비평이 막히기 시작했다. 꽤나 만족스러웠던 마지막 한두 비평을 끝으로, 타자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분명 영화 작품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아직도 좋은 영화들이 도처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문제는 이론과 비평 사이에 놓여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별 작품에 대한 논문들로 영화학에 입문한 나는 분명 이론과 비평을 혼동하고 있었다. 나 자신의 비평들을 차례로 훑어보면, 영화 내적 탐구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것이 점차 이론 공부가 거듭될수록 작품 바깥으로 빠져나와 이론 전반과 연결되어갔다. 물론 이것이 근원적 오류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이윤영은 영화의 이론과 비평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영상미학과 영화 비평은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되는 대상과 영역을 갖지만, 서로 건널 수 없는 관계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상미학과 영화 비평이라는 두 가지 담론은 서로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이 점에서 일정한 긴장관계가 불가피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 비평을 밑으로부터의 미학으로 규정하고 영상미학을 위로부터의 미학으로 규정한다면, 어쨌거나 이 두 흐름은 한곳에서 만나며, 진정으로 구체적인 성찰과 진정으로 추상적인 성찰은 이런 점에서 일정한 접점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역동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사유가 시작되는 곳도 이렇게 이 두 담론이 활발하게 소통하는 지점이다.

이윤영 2007

이렇듯 영화 비평은 이론과 관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개별 영화작품들에 대한 담론인 영화 비평이 전체로서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영상미학을 대신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거꾸로 전체로서의 영화를 대상으로 한 담론은 수많은 우회와 매개를 통해서만, 결과적으로 지극히 포괄적이면서도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개별 영화작품의 비평에 적용될 수 있음”(이윤영 2007)에도 나는 언제나 비평이 이론과 결탁해야 한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 이론은 대부분의 학문적 성취가 그렇듯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방대한 학습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다수의 학술적 저서들은 그 안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해 나가므로 그것들을 읽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진도가 더디다. 반복해서 동일한 학술지와 논문들을 인용하는 것에서 지적 한계를 절감하고 글쓰기를 멈추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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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비평은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평을 위한 새로운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위적인 방법론이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비평이 가진 고유의 특질을 복원하여 드러내보고자 한다. 비평은 원래부터 ‘작품’과 비평가 ‘한 개인’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쨌거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이뤄지는 ‘사적인 만남’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특수성과 연결되는 지점이다(영화는 언제나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개별적인 인물과 관계한다). 비평이 만약 작품에만 종속적이기를 멈추고 비평가에게도 권리를 내어준다면, 작품과 비평가는 비평에서 만나 새로운 창작으로 나아갈 것이다. 비평가가 작품으로부터 파생된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게 흘려보낸다. 이것은 현대 영화가 나아가고 있는 진행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을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반다의 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친밀한 밀폐성’에 감탄하면서 “영화의 21세기가 틀림없이 페드로 코스타와 함께 시작한다”고 말했다. 소형 디지털 카메라의 편의성을 통해 진행된 작업에서, “영화는 일종의 다큐픽션으로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이에 존재하는 관습화된 경계를 허물고 실재와 허구, 재현에 관한 문제제기와 성찰적 실험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지평을 확장한다.”(이선주 2018) 감독은 마치 문화인류학자가 친밀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참여관찰하듯이, 배우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그들 자신으로 살아있도록 카메라에 담아낸다. 이것은 이전에 내가 제기했던 연극의 포스트드라마적인 특성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여전히 그것은 드라마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이 ‘네오드라마’라고 칭하고 싶다.

비평에서도 비평가가 자기 자신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비평이 영화를 통한 2차 창작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후자는 창작과 비평 사이에서 비평을 창작의 예비 과정으로 겪어온 나의 당위적 비약임을 명시한다.)

비평가는 개별 작품과의 사적 만남에서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기존의 비평들은 고전적인 일련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작품들을 규정하는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이 비평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비평가들은 각자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스타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와 작품의 교차점을 발견해 내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영화 비평에 유리한 판은 짜여졌다. 그것은 앞서 문제시되었던 온라인 비평인데, 그러한 방식은 영화 비평의 고질적인 문제 하나를 해결해내었다. 그것은 영화텍스트의 인용가능성에 대한 문제였다. 레이몽 벨루는 영상의 작문적 인용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이점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는 엄밀하게 말해서 인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글로 쓴 텍스트는 영사기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즉 운동―리얼리티를 보장해주는 것은 이 운동의 환영이다―을 재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수많은 장면사진들이 영화의 텍스트성을 보장하는데 일종의 극단적인 무기력증을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윤영 2007

하지만 온라인상의 비평은 말 그대로 영상의 ‘인용’을 가능하게 했다. 비평가들은 필요한 부분을 클립으로 잘라내 붙이기만 하면 된다. 나아가 영화 비평가 조너선 로젠바움은 아예 플랫폼을 활용하여, 영화 자체에 자신의 발화를 통한 비평을 덧붙이는 방식의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링크). 그러나 이것은 ‘구어가 텍스트보다 비전문적으로 들린다’는 문제점에 의해 다소 조악하게 느껴진다. 물론 비평문이 전문적이어야 하는가와 같은 파생적 질문은 충분히 제기될 만하다. 실제로 유튜브를 통해 전달되는 아마추어적 영화 리뷰잉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특유의 가벼움을 통해 분명 대중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문제는 결국 영상과 영화 사운드에 의해 사고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사유를 필요로 하는) 영화 비평의 음성적 텍스트까지 동시에 추가 개입되었을 때 발생한다.

우리는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에서 새로운 비평의 가능성을 본다. 크리스 마르케는 러시아의 위대한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비평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 〈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의 어떤 하루〉를 1999년에 발표한다. 사적으로도 친했던 타르코프스키 사후 십여 년이 지난 후 발표된 이 비평 영화는 그의 작품 세계들이 잠든 묘지이자 집이다. 마르케는 이 영화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집을 짓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너선 로젠바움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영화 앞부분에서 우리는 마르케가 타르코프스키와 그 가족의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고 80년대 중반 그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타르코프스키 가족과 자신을 위해 이 홈 비디오 영상을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비디오는 전기적인 사항과 자전적인 사항을 시적이고 정치적인 통찰과 함께 아주 성공적으로 엮어내고 있는데 개인적인 친근감과 시적인 분석이 이렇게 마르케가 하듯이 잘 양립하는 경우는 참으로 희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Rosenbaum 2004

이 영화는 (비록 그 경험이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의 감독과 관계되어 있지만) 분명 비평가 자신의 사적 경험과 작품들 간의 유기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몽타주되고 덧붙여진 하나의 또 다른 ‘영화’로서 작용하고 있다. (감독은 언제나 자신의 작품에 있어서는 전문가이므로, 발화의 비전문적 분위기 또한 사라진다. 추가로 감독은 아예 전문 배우를 나레이터로 두기까지 하였다.) 장 뤽 고다르가 1996년에 로젠바움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주장, 즉 “비평이야말로 비디오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는 지극히 정당하다.


참고문헌
─ Serge Daney. 1994. 『영화가 보낸 그림 엽서』. 정락길 역. 서울:이모션북스.
─ 김지현. 이상길. (2012). 「문화매개자로서 아마추어 영화비평 블로거 연구」, 『미디어, 젠더&문화』 21: 5-40. 
─ 이윤영. (2007). 「영화비평과 영상미학-영화비평의 문제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58(0): 205-227.
─ 밤비. 2020. “Pathos In Faces”, 지평L’Horizon, 링크 (2020.8.15. 확인)
 ─ 이선주. (2018). 「디지털 슬로우 시네마」, 『한국예술연구』 19: 51-72.
 ─ “Jonathan Rosenbaum on The Sun Shines Bright and Gertrud”, Youtube, 링크 (2020.8.15. 확인)
─ Jonathan Rosenbaum. 2004. Essential Cinema: On the Necessity of Film Canons. Baltimore and London: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밤비
tpdyd83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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