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엠티 다음 날 아침이었다. 대성리 펜션 한구석에 모아둔 소주병. 이름이 기억날 듯 말 듯한 동아리 선배들의 코 고는 소리. 검댕 묻은 고기를 먹느라 텁텁해진 입안. 바닥에 빙 둘러앉았을 때 누군가 뜯었던 과자 몇 봉지. 전화 울리는 소리에 깬 나는 그렇게 당신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당신은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가까운 뒷산으로 산보를 나갈 때면 주머니에서 빳빳한 아카시아 껌을 꺼내 내 입에 넣어주곤 했다. 등산 중 껌이나 사탕을 씹으면 단물이 빠질 때까진 목이 마를 리 없다고, 그 때까진 물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준 것도 당신이었다. 토마토는 언제나 도마도였다. 황설탕을 가득 뿌려서. 나와 내 동생은 하교가 이른 토요일마다 당신 집으로 달려가 그릇 바닥에 고인 도마도를 국물까지 들이켰다. 운이 좋으면 양념 치킨을 시켜먹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항상 당신께 양념 묻는 게 싫다고 비닐장갑을 달라고 했고, 당신은 맨손으로 내게 치킨 살을 발라주었다. 입가에 설탕물이든 치킨 양념이든 묻히고 먹는 우리 모습을 보며 당신은 은단을 몇 개 집어 먹었다.

본가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는 산소통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하얀색 페인트로 ‘산소 O2’라 적힌, 가는 회색 산소통. 당신은 투명하지 않은 부분이 없는 산소호흡기를 부착해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산소통은 불청객처럼 갑자기 찾아와선 거실 구석 장판이 움푹 파일 정도로 자리를 틀어잡고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당신이 무서웠다. 무언가에 잡아먹힌 것 같았다. 산소통에 불을 붙이고 창밖으로 던져도 당신은 옛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로, 나사가 빠져 무너져내린 자동기계처럼 숨을 헐떡이는 당신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장례식장에선 차마 크게 울 수 없었다. 친척들과 당신의 생전 친구분들이 오가는 빈소를 담담히 지켰다. 당신은 내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우리 가문에 들어와 주어 고맙다고, 가족끼리 힘을 잘 합쳐 살라고 했다. 우리는 그게 유언임을 직감했다. 나는 당신의 피가 말라버린 앙상한 손을 꽉 쥘 수 없었다. 부서질 것 같았다. 차마 힘을 주어 만지기도 두려운 것. 그것이 폐암이었다. 당신껜 폐결핵이라 말하기로 의사와 가족이 입을 맞췄다. 그래도 당신은 알고 있었으리라. 특히 결핵을 고칠 수 없다 말하는 의사의 뚱한 표정에서 당신이 앓고 있는 것이 결핵이 아니었음을, 더 아픈 병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날부터 당신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내게 좋은 라디오를 하나 구해달라고 전화했다.

당신이 세 번째로 전화했을 때, 나는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 최신 뽕짝이나 유에스비에 담아 그것과 연결되는 라디오를 구해달라 했을 때, 나는 알아보겠다는 말로 전화를 일찍 끊었다. 나는 지겨워져서 말을 쉽게 내뱉었다. 내가 바빠서,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당신이 나를 잊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당신은 내게 겁을 주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보내고 싶었다. 맨소래담 로션을 온몸에 발라가며 그것이 남기는 찬기와 함께 차라리 증발했으면 하는 표정을 짓던 당신이 얼마나 외로울지도 모르고. 그것이 마지막 전화였다.

2.

웹툰 작가 김보통의 『아만자』는 암을 진단받은 ‘나’의 투병기를 그리고 있다. 나는 투병을 시작하며 잠들거나 약물을 투여받을 때 가상의 숲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나는 숲속의 존재들을 만나며 숲을 소멸시키고 넓어지는 사막을 멈추기 위해 사막의 왕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사막의 왕은 다음과 같은 비관적인 노래를 부른다.

나는 사막의 왕
아무도 사막에선 살 수 없지
나는 사막의 왕
아무도 사막에선 살 수 없지
나는 사막의 왕
가슴에도 단 한 가지의 꽃이 피었는데
나는 사막의 왕
아무도 볼 수 없는 꽃이 되어 버렸네
아, 나는 사막의 왕

오소영, 김보통. 2013. 〈사막의 왕〉.
https://soundcloud.com/osoyoung/20130808-song

어쩌면 사막의 왕이 위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나의 방문을 기다리는 이유는 숲이 아닌 밖에, 즉, 현실에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청년의 가족과 애인, 그리고 의사는 나의 병을 두고 희망을 강요하거나, 진료비를 걱정, 치료 가능성을 판단하는 모습을 보인다.

숨쉬기가 힘들어 검사를 하니, 심장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도 담담하고, 일상적이며, 감흥 없는 의사의 말에 나는 놀랄 수도 없었다. 의사는 침몰하는 배에 구멍이 하나 더 생긴 것을 보고받은 선장 같았다. “놀랄 것 없다. 구멍이 하나 더 생기건, 덜 생기건 침몰하는 과정일 뿐이다. 결말은 똑같다.”

52화: 황톳길

나를 하나의 오작동하는 기계처럼 진단 내려버리는 의사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생명으로 축소되어버린 존재였을 테다. 존재 가치가 단편적인 “生” 하나로 규제되어 “생명은 소중하니까” 식의 가치관으로 살아있음 당하는 자(단현, 2019). 내가 내 몸의 상태를 타인보다 더 잘 알 수 없고, 심지어 움직이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고통을 완화하는 모르핀 주사도 타인의 허락하에 이뤄진다면, 나는 ‘병에 대한 해결’만으로서의 클리닉clinic(Foucault 1973)에 내던져진 헐벗은 자다. 심지어 나는 “통증관리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49화), 완화의학과와 협진을 진행하는 환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환자분을 위해서”(86화)다. 결국 나는 내 몸을 구조할 수도 침몰시킬 수도 없는 존재, 육체의 자기결정권에서조차 완전히 배제된 존재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나를 관찰하고, 나는 침상에 누워 땀이 나면 나는 대로 두려움에 떨며 있다.

그래. 나는 침몰하는 중이다. 나는 침몰하는 배의 선장이고, 침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승객들을 모두 대피시켜야겠지.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 나의 침몰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게 해야 하나. 하지만 두렵다. 홀로 침몰하는 것이 두렵다.

52화: 황톳길

따라서 나는 “암 환자 코스프레”(25화)를 하는 것이라 스스로 속여보려고 하기도 하고, 병원 성당의 십자가 앞에 서서 신에게 “내가 죽는게 무슨 의미가 있”(84화)냐고 삶의 의미를 따져 묻기도 한다. 다가오는 완전한 몸의 침몰, 죽음으로부터 최대한 도피하다가 체념하고 용기 내어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죽을 거야”(78화) 말하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간 사막에서는 “모조리 메말라 버리는 것”이 차라리 “덜 슬픈”(94화) 감정을 느끼는 방법일 것이라 흔들리기도 한다. 내가 이 병을 이겨낸다는 희망, 그 뒤에 숨겨진 불가능의 비극. 나무와 풀의 뿌리가 흙을 마구 뒤집고 파고들 때, 어쩌면 사막이 덜 아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는 어떠한 답도 내리지 못하고 다시 사막을 헤맨다. 조금씩 부서지는 몸을 끌고 앞으로 나아간다. 사막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막의 왕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외로이 갈 뿐이다.

3.

숲에서 만난 존재 중 하나인 비커리는 사막의 왕을 막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마음을 찾기 위해서 밖의 기억이 필요”하며 기억을 가지고 “다시 잃어버린 마음을 찾으러 떠나”(65화) 사막으로 가라고 나에게 말한다. 사막으로 향하는 길이 외로운 길이라 생각한 나에게 ‘기억’이라는 요소가 던져진다. 옛 사진을 통해 어머니를 떠올리며 필름 위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나의 비탄이 일치”(Barthes 1980, p.70)함을 느꼈던 롤랑 바르트의 순간, 과거와 현재, 미래가 접히는 순간처럼 ‘기억’은 시간과 공간을 한데 접는다. 다만 『아만자』에서 기억하는 주체는 죽음을 향해 가는 자다. 통상의 감각으로 보았을 때, 죽고 나서 기억되어야 할 사람이 죽기 전에 타인을 통해 자신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편적인 기억으로 그치지 않는다.

리타 샤론Rita Charon은 현대의 클리닉이 환자들을 그들이 앓는 병으로만 자주 간과함을 짚어낸다. 환자는 병약한 세포와 증상으로만 이뤄진 육체일 뿐만 아니라 기억으로 구축된 개인적 서사 또한 가진 존재다. 그녀는 현대에 있어 “자서전”을 적는다는 일은 내 삶의 의미에 대한 근거를 단순 반복하는 쓰기가 아니며, 나의 기억만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나와 가까웠던 이들에게서도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Rita Charon 2006, 74-75). 따라서 클리닉이 진정한 치료healing가 되기 위해선 환자가 자신의 삶에 제시하는 서사에 초점을 둔 서사 의학Narrative Medicine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쩌면 만져지는 암세포를 달고 죽음이라는 확실한 끝을 향해 걷는 자들을 치료하는 방법은 전혀 ‘화학적chemo’이지만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독자적이고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또 그 안엔 얼마나 많은 관계와 서사들이 얽혀있는지 느낄 때, 살아 남겨진 몸은 어떻게 변해갈까.

사막은 한 개라네. 숲에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지. 하지만 밖에서 온 자네 같은 이들이 사막에 발을 들여놓으면, 거기서부터 자네가 겪게 될 사막은 ‘자네의 사막’이라네. […] 사막은 ‘하나의 사막’이지만, 동시에 ‘자네의 사막’이라는 얘길세. 겉으로 볼 땐 같은 사막이지만, 사막을 여행하는 이가 마주할 사막은 저마다 다른 사막이라는 얘기지. […] 잃어버린 마음을 찾으려면 그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네. 자네의 사막이라는 것을. 마음이 없는 자는 사막의 왕을 막을 수 없거든.

69화: 도사리

하지만 개인의 서사 구축이 치료로 마술처럼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수많은 관계 속에서 구축한 서사는 외롭다. 누구도 완전히는 공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한순간도 너일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비극이다. 따라서 때로는 사막의 왕이 ‘잊혀질 거야’ 말하는 것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외로움이 운명과 같다 하는 것이 진실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사막에 피어난 꽃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허공을 맴돌다 우연히 떨어진 사막에 뿌리를 내리게 된 잘못으로 사막의 꽃이 된 마음을 네가 알아? 아무도 봐주는 이 없고, 비 한방 울 내리지 않는 탓에 머지않아 바짝 말라버릴 꽃을 생각해 봤어? 사막의 뜻이 죽음이라고? 아니. 너는 사막을 몰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 어떤 구원도 바랄 수 없는 곳에서 피어난 꽃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자신의 사라짐을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지. 모든 것이 모래바람에 바스러져 가는 폐허 속에서 ‘아직’ 살아있음의 끔찍함을 네가 알아?

106화: 사막의 꽃

그렇다. 우리는 사라지는 존재다. 각자의 사막을 걷고 있으며, 언젠가는 몸이 바스러질 필멸의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기억 속에서 내 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만자』의 주인공에게도 현실의 주변인들이 현실/숲 차원을 넘어, 온전한 신체로까지는 아니더라도, 희미한 숲의 존재로 나의 사막에 잠시나마 모습을 비춘다. 그랬던 것처럼 나도 어느 정도는 타인의 마음속으로 차원을 넘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으리라. 물론 이것은 나의 상상이 아니라 그 다른 존재들과의 담론 속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 다음은 『아만자』 중 나의 옆에서 여자친구가 울음을 터트리며 말하는 장면이다.

내가 더 무서워. […] 나는 살아야 하잖아.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또 꾸역꾸역 살아야 하잖아. 그렇게 그렇게 혼자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잖아. 끈 떨어진 풍선처럼, 돛 없는 배처럼, 어디로 가는지,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계속 떠돌면서 살아야 하잖아…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89화: 내리다

무엇보다 고마운 건, 나를 사랑해준 거, 그 기억을 남겨준 거. 그래서 아무리 무섭고 외로운 날들이 와도 견딜 수 있게 해준 거. 고마워.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오빠. 나는 이제 무섭지 않아.

90화: 빛

어떻게 함께 서사를 만들 것인가. 나와 여자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 관계 속에서 각자의 위치를 가감 없고 솔직하게 파악하는 것, 그 속에서 현재의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생겼는지 공유하는 것이 서사를 쌓아가는 방법이다. 여기에 섣부른 공감은 없다. 오히려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접점에는 서로가 있다. 내 기억의 숲과 사막을 걷는 것은 나이지만, 혼자서 걷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이 있다. 나와 마주한 수많은 당신들의 접점에서 하나 이상의 이야기, 바로 서로의 이야기가 형성된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으로 타인 속의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 서로 속에 나의 파편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탈 육체적이면서 살아있을 수 있다.

4.

사막을 좀 더 빨리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끝으로 향하는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들의 사멸을 목격하는 우리는 그 싸움을 병을 이겨내길 응원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을까? 사막을 걷는 그들은 아픈 몸을 내세워 말한다. 아픈 몸을 내세우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자신의 변화하는 몸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을 때, 더는 이야기할 몸이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야 할까.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더 많은 사람을 용서했을 거야! 더 많은 기쁨과 슬픔을! 더 더 많은 환희와 절망과! 그보다 더 많은 두려움과 두근거림을 느끼며 살았을 거야! 그래. 정말 살았을 거야.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그저 살았을 거야. 물론 숱하게 상처받고, 많은 시간을 후회하겠지. 때로는 삶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괴로운 순간도 있을 거야. 하지만, 망설이는 걸로 삶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게 살아있다는 거니까. 산다는 거니까. […] 나를 지켜봐 준, 나를 사랑해준, 항상 내 곁에 있어 준 사람들에게 의미가 되었으니까.

108화: 인사

서사로 구축된 주체성을 존중해주기. 그것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살아있음의 모습 아닐까. 내가 사라지고 죽어간다,가 아닌, 내가 잘 살아남았고 사후에도 곳곳에 기억의 모습으로 살아있을 것임을 기억하게 해주는 대화. 병의 치료와 생의 연장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서도 관계의 역사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좋은 인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억 속 당신의 이야기를 허투루 흘려보냈던 순간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그 순간을 바꿀 수 없다. 당신 꿈을 가끔씩 꾼다. 한 달 전 꿈속에서, 당신은 아끼던 회색과 파란색 목도리를 내 양손에 쥐어 주며 “가거래이” 했다. 아침에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다. 옆에 누운 애인이 무슨 일이냐고 놀라며 물었을 때,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해줬다. 내 애인은 당신이 나를 많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라며 나를 꼭 안아줬다. 그날 점심으로는 도마도를 먹었다. 장례식 후 당신의 서랍에서 가져온 체크무늬 손수건을 오랜만에 꺼냈다. 이제 이 손수건에 당신의 살냄새는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냄새를 기억한다. 아카시아 껌과 도마도 건너 당신의 미소도 기억한다. 당신이 외롭지 않도록 당신과 더 많은 대화를 할걸.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영원할 것이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은 누군가와 계속해서 나눌 것이라고 미리 말할걸. 하지만 할아버지, 당신이 그걸 지금은 알 수 없을 테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나의 숲에 있단 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기억할 것이다. 당신과 내가 접힌 기억들을 치료할 것이다.


참고문헌

─ 김보통. 2014. 『아만자』. 서울: 예담.
─ 단현. 2019. “생존을 넘어서 살아있기, 애도하기/기억하기”. 지평L’Horizon. http://www.lhorizonsociety.com/2361/ (2020.8.12. 확인)
─ Rita Charon. 2006. Narrative Medicine: Honoring the Stories of Illnes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 Roland Barthes. 1980. Camera Lucida. New York: Hill and Wang.
─ Michel Foucault. 1973. The Birth of the Clinic. Abingdon: Routledge.

박필
blueyunsung@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