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10진법 수 567을 생각해 보자. 이 수의 내용은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는 그것이 연속된 세 수로 차례대로 구성된 숫자라는 특성을 567의 내용 중 하나로 여기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내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567”이 2진법으로 표현된 1000110111, 11진법으로 표현된 476, 9진법으로 표현된 700 등과 다른 내용을 갖는다고, 다시 말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뻔한 소리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된다. 최소한 내용에 주목할 때,  567(10)과 1000110111(2)과 476(11)과 700(9)는 전부 같은 내용을 갖는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냐고? 모든 투명한 문맥에서 같은 내용을 갖는 글은 상호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내용이 다른 명제 안에 들어 있는 불투명한 문맥에서나, 따옴표 안에 그 글자 또는 문장의 기호를 적어서 어떤 기호를 지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같은 내용을 갖는 표현은 모두 교체 가능하다. 이것이 우리가 ‘내용’이라는 말을 통해 생각하는 일상적인 의미이다.

물론 (10진법 수) 567이 아닌 ‘567’이라는 기호에만 주목한다면 사정은 조금 다를 수 있다. 5와 6과 7로 구성된 이 기호는 연속된 아라비아 숫자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어떤 이름을 가진 활자체로 쓰여 있고, 또 자간은 얼마쯤 되며… 하지만 이것들은 567이라는 글자를 읽을 때 우리가 이해하는 내용과는 별개이다. 전혀 다른 자간, 전혀 다른 활자, 전혀 다른 기수법을 이용해서도 우리는 “567”과 동일한 개념적 표상을 일으키는 경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확인하는 방법은, 만약 독자의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와 함께 종이 위에 567을 써 보는 것이다. 글자체도 다르며 자간도 다르다. 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서로 다른 언어로 567을 두 번 써 보자(오백 예순일곱, five hundred sixty seven, 五百六十七, fünf hundert sieben und sechzig…). 이제 둘은 숫자 기호마저 다른 567을 쓴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내용을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567이라는 숫자 자체에서 얻는 내용이 그것의 내용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 기호로부터 얻는 내용은 앞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삼인칭적으로 그것의 기호를 기술할 때 발견되는 내용이다. <이러저러한 곡선을 갖고 있음>, <자간은 __mm 평균임>, <이러저러한 글자체로 쓰임>, <한국어 화자가 읽었을 때 567로 이해함>, … 우리는 때로 이 두가지 내용을 혼동한다. 특히 그것의 기호들이 <한국어 화자가 읽었을 때 p로 이해함>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는 이유에서 둘을 혼동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것을 읽었을 때 어떤 내용을 가질 것이라는 조건적 명제와, 실제로 누군가가 그것을 읽고 어떤 내용을 표상하는 사건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쪽은 순수히 조건적 명제를 구성한다면 한쪽은 사실에 관한 기술을 구성한다.

‘일상적 우상숭배’라는 사뭇 진지한 표현으로 우스꽝스러운 우리의 습관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떤 숫자나 기호 자체에 집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은 내가 그렇다.) 100주년 기념 행사는 다른 행사보다 독특한 행사인 것처럼 느껴지고, 글에서 각 문단의 길이나 문장의 길이, 시를 쓸 때 각 행의 길이를 정확히 맞추는 것이 매우 훌륭한 글의 내용, 시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착각을 한다. 동음이의어(동형이의어?) 관계에 있는 두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그 의미에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어원의 의미를 존중하여 오늘의 어떤 단어 표현의 의미를 ‘밝혀 내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번역될 수 없는 기호를 번역될 수 있는 내용으로 착각하는 우상숭배를 저지르곤 한다.

심오한 철학자

누군가가 어떤 철학자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의 글은 너무나 심오해서, 번역하지 않고 원문으로 읽어야만 그 뜻을 알 수 있다. 한 번 훑고 넘기지 말고 자꾸 읽어보며 뜻을 곱씹어라.> 그러면서 그는 “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이 수학을 공부하는 것처럼 어떤 언어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끝에, “그 사람”의 글을 깨닫는 달콤한 결과가 얻어질 것이다. 깨달음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다. 깨달음은 다른 말로 번역될 수 없다. 공적인 철학 개념으로 함부로 번역하는 것은 그의 철학을 토막내는 일이다. 아주 고유하고 심오한 그의 “철학”으로부터만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글은 번역되지 않은 원문으로 읽혀져야만 하는 것인가? 수학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이 주장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수학자 여정이 전혀 다른 기호와 기수법을 사용하는 세계 W로 갑자기 순간이동한 경우를 상상해 보자. 여정은 수학자이기 때문에 10진법을 사용하고(때로는 다양한 기수법을 사용하기도 하겠지만) 지구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초적인 수학 지식을 알고 있다. 여정은 공부만 하고 살아 온 샌님이라 수학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W에서 여정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수학적 지식은 선험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여정은 그 세계의 기수법만 배우고 나면 다시 수학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철학자 여정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여정은 12세기 동양의 현인으로, 與子라고 불릴 만큼 전설로 남은 사람이다. 그런데 1167년 10월 9일, 파란색 전화 부스를 탄 외계인이 여정을 납치해서 1929년 10월 9일의 비트겐슈타인 앞에 그를 갖다 놓았다. 다행히도 그 전화 부스에는 자동으로 상대의 말을 통역하는 마법이 걸려있어서 여정과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이 서로 하는 내용을 전적으로 이해하며 대화했다. 여정과 비트겐슈타인이 사기꾼이 아닌 참 지식을 전하는 ‘진짜 철학자’라고 가정하자. 그 둘의 대화는 과연 서로의 생각을 다 전하지도 못한 반쪽짜리 대화였을까? 또 여정이 캠브릿지의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후 박사”라는 사람의 전화 부스를 타고 1167년의 개경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고 생각해 보자. 여정은 과연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캠브릿지의 철학자가 되는 데에 실패했을까? 그의 사상을 전적으로 제시하는 데에 실패한 채 ‘공적인 언어’를 경유해서만 사고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앞에 심오한 철학자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표현을 오로지 그들의 문체에 의해서만, 그들의 언어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반쪽짜리 이해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주장은 ‘필연적으로 참되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번역은 안되고, 그들을 직접 이해하려 할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한 번 읽은 뒤 그의 주장을 명제 단위로 분석해 냈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같다: ‘그 글을 다시 꼼꼼히 읽어 보아라. 그 글에서는 수많은 내용이 흘러 나온다. 거장의 주장을 어떻게 그렇게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자꾸 읽어서 그 주장을 네 것처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심오한 철학자에 대한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식과 번역되지 않는 것

어떤 것의 형태나 형식에 관한 앎(즉 면식에 의한 앎이나 능력지)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식은 명제적이어야 할 것 같다. 믿음과 지식의 관계를 어떤 것으로 두든 간에 지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믿음으로 표현될 수도 있어야 할 텐데, 모든 믿음은 어떤 명제에 대한 믿음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를 생각하면 조금 더 명확하다. 내가 어떤 독특한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며 ‘넌 이 사실을 알 수는 있지만, 그 사실을 믿을 수는 없을 거야’라는 것은 “믿다”가 수사적 강조를 위해 사용되는 용례가 아닌 한 부조리하다. 최소한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이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한 믿음도 함께 획득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존재론적으로 제거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는 제거로 환원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p가 참이다’를 믿으면서 ‘p이다’를 믿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전제인 ‘a가 참이라면 a이다’에 위배된다.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비개념적인 지식이 존재하기에 이 주장이 독단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일전에 언급했듯, 비개념적인 내용이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공허하고, 기묘한가? 도저히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개념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고, 외연을 설정할 수도 없다. 전혀 그것에 대한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체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할 수나 있을까? 그것에 전혀 의미가 없고 그것을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그런 류의 “지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어떤 종류의 비개념적인 지각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이데거가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지시한 그런 실존적 감정이 일종의 비개념적 지각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매우 3인칭적인 방식으로, “나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느끼는데 일단은 그것을 ‘불안’이라고 하겠다”라며 어떤 명제를 그 개념에 축약시키면서만 공유할 수 있다. 이 공유의 과정 자체에는 어떤 ‘불안’도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는, 그것은 실존론적이지 실존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유의미한 모든 지식이 명제적이라는 전제로 돌아오자. 그런데 명제적인 것은 어떤 언어로든 번역 가능해야 한다. 최소한 그 언어 사용자가 이해 가능한 방식의 새로운 기호 배열을 도입하는 한에서라도,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합리성이 매우 우연한 이유에서 특정한 언어 사회에 태어난 이들에 따라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다르게 고정된다라는 괴상한 전제를 하지 않는 한 그렇다. 물론 번역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교체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a priori’를 적당히 번역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을 “‘a priori’는 ~에 앞선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험에 의한 지각에 앞서는 지식을 지칭할 때 그 표현을 사용한다”라는 식으로 번역할 수는 있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번역되었다면 우리는 a priori가 함축하는 내용을 번역해 낸 것이다. 한 번 이 번역을 접했다면 그 이후 한국인 화자는 ‘a priori’를 상기한 번역에 따르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개념의 난해함으로 인해 시간은 걸릴 수 있어도, 그것은 번역이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잘 번역되었다면 라틴어 책을 보지 않아도 아프리오리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해야 했던 것은 어떤 철학자가 전하려는 말을 그의 원어 책을 읽고 문체를 곱씹어야만 이해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위의 논증에서 나오는 것은, 최소한 그의 철학이 전하려는 ‘내용’에 있어서만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원초적 상황을 가정한다면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의 원어 책을 읽고 문체를 곱씹으면 그의 내용이 이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면, 어떤 내용을 이해한 사람이 최소한 하나는 있다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이해한 명제적 내용을 한국어 표현으로 번역하면 된다. 한국인은 그가 잘 구사한 한국어 표현으로부터 그 표현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기에, 번역자가 독특한 고유 개념을 올바르게 번역하지 않거나 번역자가 특수한 문체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어떤 한국인 화자도 어떤 서양 철학자(헤겔을 가정해 보자)를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축하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처음으로 헤겔을 이해한 한국 철학자’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경우에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원어 책을 읽고 문체를 곱씹으면 그의 내용이 이해 가능하다”라는 누군가의 증언이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해한 사람이 아직 없는데 내가 원서로 그것을 읽는다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너무나 큰 불확실성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경제적인지는 스스로의 결단이 필요한 문제이다.

둘째로, 헤겔을 이해한 한국인은 있지만 그가 번역에 의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겨우 번역을 했지만 아주 볼품없는 작품이 나왔을 수 있다. 이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원서를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번역된 책이 아직 없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원서를 읽어야 하는 것이지 “그의 원어 책을 읽고 문체를 곱씹으면 그의 내용이 이해 가능하다”라는 이유로 원서를 읽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의 주장이 여전히 건재하다.


眞과 美를 잘라내기

그래도 누가 말한다. “여전히 우리에겐 번역되지 않는 미적 경험들이 있다!” 그렇다. 번역되지 않는 것은 문체와 은유 등의 순수하게 문학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문체과 은유는 그 자체로는 철학의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다. 심지어 문학 작품에 있어서도, 문체나 은유, 미적 경험은 그것의 형식을 형성할 뿐 내용을 형성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그 미적 경험을 두고 ‘아우라’라는 독특한 실존적인 개념으로 표현했다. (‘아우라’의 개념 또한 여실히 번역 가능한 ‘실존론적 표현’임에 주목하자.) 아우라는 번역되지 않는 매우 미학적이고 독특한, 사적인 느낌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그 경험이 어떤 아우라를 갖고 있음만을 말할 수 있지, 그 아우라 자체에 어떤 내용을 부과할 수는 없다. 심지어 아우라는 그 대상의 내용도 아니다. 아우라로 지시되는 경험의 방식은 그 경험의 모든 배경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문학 경험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그러한 문체, 은유, 미적 경험이 있다는 사실과 문학 작품에 기입된 명제적 내용이다. 그 내용들만이 공유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만이 공유 가능하며, 유의미하다.

다시 말해 문학의 은유나 문체 등은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사실이기에, 3인칭적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우리는 형식을 번역하지 않고도 어떤 글의 모든 요소를 내용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p라는 내용을 갖고 있는 387번째 문장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의 언어유희가 쓰였다”라거나, “<이방인> 제n장의 62번째 문장부터 99번째 문장까지는 이러한 문체를 잘 드러낸다”라는 식의 분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의미한 분석이다. “난 이 책의 이 쪽 언저리에서 이런저런 느낌을 느껴! 그리고 그건 아주 세련된 것 같은데.. 그게 뭔진 모르겠어”라는 것은 책에 대한 어떤 내용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느낌을 느끼고, 그것이 세련됨인데 그가 그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적 내용만이 제공된다. 다행히 우리는 여기에서 개인의 미적 감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과정이 적용됨을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은 아름답다’라는 사적인 감상을 ‘나는 이 글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라는 3인칭적 기술로 환원할 수 있다. 또는 조금 더 명료하게 ‘나는 <이것이 아름답다>를 느낀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순수히 미적인 것이 아니라면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순수한 형식이 아니라면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그 형식에 대해서도 우리는 여러가지 기술을 통해 3인칭적인 번역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도 번역되지 않는 어떤 사실이 있는 것 같다면, 그것은 당신의 ‘아주 내밀하고 사적이고 비밀스럽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쩌구저쩌구’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인지 당신의 뇌내망상인지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런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확신을 가질 것이지, 정말로 그 느낌이 어떤 사실을 표상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여전히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들로부터 비평과 주석, 해석을 구성할 수 있다. 굳이 번역될 수 없는 것을 따라 원서를 읽어야 한다면, 이런 종류의 ‘형식에 관한 사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많은 분석철학자들은 문학적 논증을 꺼린다.)


“번역될 수 없는 심오함”을 다시 생각해 본다. 어떤 것을 번역할 수 없다는 확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둘 중 하나의 경우일 터이다. 그 “어떤 것”을 접한 사람은 그것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만의 독단에 빠져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내용과 형식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 개념적 오류에 빠져 있다. 그런데 애초에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지 못했다면 그 글을 잘 이해한 것이 맞기는 한가? 결국 그는 아직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텍스트는 애초에 이해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대상이었거나, 수많은 노력을 통해서만 분석할 수 있는 문학적 텍스트였을 것이다. (“그”의 지성이 심각하게 부족한 경우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누군가가 어떤 것을 잘 이해했다면 그것의 내용을 잘 번역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이 순수히 문학적이지 않고, 정보를 전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텍스트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왜 굳이 그 수고를 들여서 그 텍스트에 집착해야만 했을 것인가. 번역할 수 없음만을 앵무새같이 되뇌이는 이들의 “이 책을 읽으라!”라는 명령에 왜 순응해야 했을 것인가?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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