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 안의 ‘연극’이란 무엇인가?

역시나 이런 것들은 우리를 공허한 싸움으로 이끌며, 결국 지치게 만든다. 이를 좀 더 실제적인 문제로 만들어 보자. 연극은 무엇이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연극은 무엇이었는가? 최초의 연극은 제의였다고 추정된다(이는 또다시 무엇을 연극이라고 부를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불러일으키지만). 19세기 말에 ‘발명’된 영화의 역사가 기존의 예술 발전사를 답습해간 것을 통해 소급 추론해 보자면, 연극 또한 영화처럼 초기에는 ‘서사’를 통한 재현보다는 그 자체로 ‘보여냄’과 다 함께 ‘바라봄’의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사성이 연극에 녹아들었다. 그가 예술을 미메시스(모방)의 차원에서 정의함에 따라 연극 미학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재현’ 중심의 드라마였다. 내용적으로 연극은 (희곡의 투입으로 인해) 문학적인 ‘서사극’이었고, 형식적으로는 고정된 위치의 무대, 배우, 관객을 필요로 하는 ‘무대극’이었다. 하나의 배우는 하나 이상의 배역을 맡아 특정하게 꾸며진 무대에 올랐고, 관객들은 그들이 ‘사건’을 진행해가는 것을 보았다.

배우는 허구의 인물을 연기했지만, 삶을 재현해야 했으므로 실재적 인물과 배경에 봉사했다. 그들은 비극의 목적으로 규정된 카타르시스를 유발하기 위하여 감정이입을 통해 연기했다. 감정이입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연극적 환영을 바탕으로 무대 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연극’이 아니라 마치 ‘현실’인 것처럼 보여야 했다(나경민 2013).

하지만 연극은 구체적인 형식(배우, 무대, 관객, 그리고 희곡)을 지녔기에, 현실적이지 않은 지점들이 생겨났다. 배우는 멀리 떨어진 관객에게 닿기 위해 인위적으로 발성해야 했으며, 마찬가지로 과장된 몸짓을 활용해야 했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독백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무대는 최대한 실제적이고자 했지만, 실내에서 만들어진 세트장은 그 자체로 한계를 내재하고 있었다. 또한 무대는 관객에게 보여지기 위해 한 면의 벽을 통째로 포기했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연극적 환영이 부분적일 뿐이라고 말한다. 관객들은 리얼리즘에 따라 하인이 하인처럼 말하기를, 시대극에서 휴대폰과 노트북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실제로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무대 위의 방에 벽이 세 개밖에 없다는 사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일탈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무대 기술이 이를 요구하기 때문이고, 관객들은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한다(Arnheim 1935/1957).

허물어진 벽은 관객이 채웠다. 이에 따라 배우들은 이 거짓된 벽에 열려 있는 자세로 행동하였다. 벨라 발라즈는 연극에서 고정된 관객석에 의해 생기는 문제를 정리했다.

연극의 기본적 형식상의 원칙은 무엇인가?

1. 연극에서는 관객이 언제나 공간 전체를 보면서 그 공간 속에서 전체적으로 연출된 장면을 본다. 가끔 무대에서 한 코너만을 제시할 때도 있지만 그 코너는 장면 내내 완전히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모든 일은 하나의 단일 프레임 속에서 보여진다.

2. 연극에서는 관객이 언제나 고정된 불변의 거리에서 무대를 본다. 영화화된 연극이 다양한 거리에서 다른 장면을 찍기 시작했지만 같은 장면 내에서의 거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3. 연극에서는 관객의 시선의 각도가 변하지 않는다. 영화화된 연극은 가끔 장면이 바뀌면서 시점이 바뀌었지만 단일 장면 내에서의 시점은 거리가 변하지 않았듯이 바뀌지 않았다.

(Balázs 2003)

연극은 본질적으로 허구 내러티브를 통한 현실의 재현을 소유할 수 없는 몸이다. 그리고 이것은 회화가 사진을 만나 리얼리즘에의 좌절을 겪었던 것처럼, 영화를 만나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피스가 클로즈업을 사용한 이후, 그리고 영화에 소리와 컬러가 도입되어 더욱 현실적이게 된 이후, 연극적 연기는 포기되었고 영화적으로 변형되었다. 자크 오몽은 영화 연기는 연극의 그것에 비해 발성과 표정 모두에서 ‘완화’된다고 말한다. 관객에게 편안하고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보여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극 연기의 본질은 영화 연기로 이행된다(Aumont 2006).

사진을 만난 이후 회화는 어떤 노선을 취했는가? 일대일 대응의 완벽한 인과관계로 묶여있지는 않더라도, 카메라 옵스큐라, 다게로타입 등의 초기 사진적 기술체들이 회화를 인상주의에서 시작하는 소위 ‘모던 아트’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회화는 재현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원근법에 기댈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자연주의가 포기되었고, 시각적 인상, 질감, 구도, 빛 등의 회화 고유의 특징들을 살려나가기 시작했다. 이 속에서 하이퍼리얼리즘이 갖는 위상은 그저 개인의 노력에 다름 아니다.

연극이 영화를 마주했을 때는 양상이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문학과 함께 오래도록 내러티브를 소유해 왔던 연극은 그 소유권을 양도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문제점을 수정해 나갔다. 물론 그 한계는 애초에 내러티브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원적인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었는데, 당시 연극은 고집스레 이를 무시하였다(안타깝지만, 영화의 상업적 파급력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연극은 회화가 그러했던 것보다도 더욱 빠르게 사람들의 흥미에서 떨어져 나왔고, 그렇기에 누구도 이러한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연극은 관객과 무대, 배우, 아울러 희곡 사이의 관계를 차차 조정해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단면적인 객석이 사라졌다. 관객석은 양면 객석, 사면 객석, 원형 객석 등으로 다양해졌다. 또한 억지스러운 발성, 몸짓을 완화하기 위해 객석이 무대와 가까워졌다. 혹은 무대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 연극 무대는 스크린을 차용해 환영을 소비했으나, 이는 연극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무대는 야외, 거리로 확장되었으며, 많은 것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소위 ‘상호능동성’에의 지향으로 관객을 참여시키는 방식의 연극들이 생겨난 것도 이 시기이다. 또한 희곡에 의해 생겨난 문제도 있었는데, 연극에서의 문학적 양식화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대본 없는 연극, 즉흥 연극 등으로 극복되었다.

그러나 영화가 내러티브를 포기하지 않았던바, 본질적인 문제는 ‘배우’의 측면에 있었다. 허구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배우는 등장 인물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하는 내재적인 요소가 연극에 있었다.

현대에 연극을 특징 짓는 것은 무엇인가? 1960년대에 피터 브룩은 연극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배우와 관객, 그리고 (빈) 공간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훨씬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단순하게 연극을 ‘인간 행동의 모방’이라고만 정의했다. 그리고 미디어의 발명과 함께 새롭게 드러난 연극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현장성, 직접성, 그리고 일회성이다. 근대 미디어가 등장하기 이전의 서구 사회에서 연극의 현장성과 직접성은 당연한 것이었고 연극 고유의 성격도 아니었던 것이다(우수진 2020).

그리고 이러한 현장성과 직접성, 일회성은 배우가 등장 인물이 되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무리 스타니슬랍스키식의 메소드 연기가 배우들의 연기를 보완한다고 할지라도, 현장에 존재하는 인간이 등장 인물로서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눈 앞의 배우를 기계적 복제자가 아닌 ‘살아있는 배우’로 받아들이며, 그렇기에 언제든 배우는 연극의 의도와 다른 행동을 취해버릴 수 있다(밤비, 2020). 그러나 영화에서는 배우가 ‘실수로’ 등장 인물에서 벗어나게 되면, 감독은 그 장면을 들어낸 뒤, 등장 인물로서 행동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찍기만 하면 된다. 벨라 발라즈에 따르면, 그곳에서는 배우가 실수할 일도, 현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기술적 문제들로 골치 앓을 일도 없다(Balázs 2003).

연극은 드디어 영화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포스트드라마 시대로 넘어간다. 현대의 연극 이론들은 허구 내러티브 세계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기에 이를 포기하였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연극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한다.

앙드레 말로는 예술이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갑자기 설득력을 갖는 관계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연극은 여전히 예술이기 위해서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형식적 특성을 통해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을 찾아내야 했다. 따라서 현대 연극의 특징으로 부각된 현장성, 직접성, 일회성과 관련된 연구와 실험들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피터 브룩은 자신의 저작 〈빈 공간〉(1968)과 이후의 저작에서 연극들을 분류하며 자신의 지향점을 드러낸다. 성스러운 연극이란 보이지 않는 삶의 모습을 드러나 보이게 만드는 것이며, 거친 연극이란 현 시대의 거친 측면까지도 되는 대로 끌어오면서 이를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모든 순수함과 불순한 요소들이 가감 없이 뒤섞여 배우와 관객과의 만남 가운데 총체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직접적인 연극’이 된다(백훈기 2010).

이는 궁극적으로 그로토프스키의 초기 방법론이었던 ‘가난한 연극’과 연결된다. 그에게 있어서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와 관객의 직접적인 ‘만남’이다. 그는 배우에게 존재하는 내적 충동과 외적 반응 사이의 시간 차를 없애고, 충동이 곧 반응이 되는 단계에 이르러 관객이 배우에게서 일련의 충동만을 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진실한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신은아 2014).

이렇듯 ‘직접적인 만남’이 연극에서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 후, 이제는 이 만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가 화두로 오른다. 그로토프스키는 만남의 중요성은 인지하였지만, 그러한 만남이 실제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관객들에게 역할을 부여하였지만, 종국에는 ‘상호능동성’의 문제가 재론되었다. 그로토프스키는 결국 연극을 ‘배우’ 스스로의 고양을 위한 것으로 국한시켜버렸다.

매체 연기와 연극 연기를 번갈아 하는 배우들이 흔히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며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연극을 하는 이유가 보통 자기 만족과 고양을 위한 것이라고 언술하는 것을 볼 때, 이는 합리적인 과정이었다. 그곳에 관객을 위한 자리는 없다. 진정한 만남은 배우 자신과 이루어지며, 관객이라기보단 관찰자로서 ‘증인’들은 이를 지켜보고 그러한 고양을 확인하는 사람들이다(연극이 심리 치료에 쓰이는 것은 이에 다름 아니다).

현대 연극의 또 다른 진행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포스트드라마의 상태로 돌아와 보자. 레만에 의하면 이것은 브레히트 서사극과는 다르다. 브레히트 서사극이 여전히 허구적 인물의 재현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둠으로써 그것이 표상하는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무언가에 대한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거부나 저항을 발견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따른 연극에서는 환영을 바탕으로 무대 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연극’이 아니라 마치 ‘현실’인 것처럼 보여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앞서 제기된 문제들을 통해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이에 대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연극은 현실인 것처럼 보이기보다는 현실을 무대로 들여오기를 택한다. 연극은 서사극이 아니라 다큐멘터리극이 되기 시작한다. 다큐멘터리극은 정치, 경제, 사회 등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무대로 끌어들였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굳이 연극 무대를 통해 사실이나 진실을 확인해야 하는가? 최영주는 드라마 연극의 허구적 재현이 아닌, 몸과 오브제의 제시提示를 통해 지금, 이곳의 이벤트로서의 체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몸의 현존을 이벤트화하고 허구의 환영 대신 무대에서 전개되는 사건으로서의 연극을 체험하면서 관객은 소외된 몸에 대해 환기하고 의미 구성에 참여하며 존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강화하게 된다는 것이다(최영주 2017).

그러나 여전히 의뭉스러운 것이 있다. 이러한 다큐멘터리적 소재들을 무대에 올릴 경우, 그것은 결국 또 다시 재현이 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논의를 전개해가며 하나의 단어에서 멈추게 된다. 그것은 몸이다. 직접성과 현장성’을’ 소유한 것, 그리고 직접성과 현장성’이’ 소유한 것은 배우의 몸이다. 재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배우 자신의 이야기를 배우의 몸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하기’는 새로운 서사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연극성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메타연극이기도 하다.

이는 공연이 재현을 단념하는 대신 현실을 공연 안으로 끌어들여 스스로를 확장시킨 결과이다. 이러한 자기 이야기하기 서사는 오브제와 설치물 등으로 물체성이 강조된 그들의 몸을 통해 배우로 하여금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희곡에 나타나는 해체된 언어의 발화행위보다 더욱 독립되고 확장된 창작주체로서 기능하게 한다(나경민 2013).

‘자기 이야기하기’가 강연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배우의 ‘몸’을 통해 발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직접적이며, 현장성을 강화한다. 또한 매 회차마다 같은 연기를 하고자 하는 강박을 버려야 한다. 연극은 현장과 결합하여 매번 다르게 나아간다. 그것이 일회성의 장점을 부각하는 방식이다.

연극과 무용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만 드러날 뿐이다. 어쩌면 무용은 무대 예술 측면에 있어서 바람직한 형태를 초기부터 지니고 있어왔기에 큰 변화 없이 여전히 진행되어 오고 있는지 모른다(비록 그 안에서의 내용적 한계점은 있을지라도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지식이 얕으므로 일축하겠다).

영화는 우리가 삶 속에서 사건에 참여하고 있을 때 직접 보고 듣는 것을 보여주고 들려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교훈적인 이야기처럼 삶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암시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한 편의 소설은 요약되거나 산문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물을 교육적으로 기술하거나 이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시 또한 독자를 거의 항상 어떤 시적 상태에 빠져들게 하는 언어 기계의 창조를 목적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한 편의 영화 속에는 항상 이야기가 있고 종종 이념도 있지만, 영화의 기능은 우리에게 사실이나 이념을 알려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인식 속에서는 상상력이 지성을 위해 작용하지만, 예술에서는 지성이 상상력을 위해 작용한다고 말했다. 이 말의 뜻은 이념이나 평범한 사실이 예술가에게 감각적 상징을 찾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시각적이면서도 청각적인 합자를 그릴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 몸짓의 의미는 바로 그 몸짓 속에서 즉각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영화의 의미는 영화의 리듬에 통합되어 있고 영화는 영화 그 자체 말고는 어떠한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Merleau-Ponty 1945).

연극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연극은 더 이상 내러티브의 환영을 통해 세계를 재현해내고 그 속에서 연출가가 전달하길 원하는 메시지를 표현하지 않는다. 하나의 배우가 자신을 이야기는 것 또한 이를 통해 무언가 교훈을 끌어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특별한 개인을 보는 것, 몸을 드러내는 것, 얼굴을 전달하는 것 그 자체의 의미화이다.

(추신: 파비안 힌리히스는 ‘상호수동적’ 연극을 지향한다. 상호능동성에 대한 환상이 내러티브의 환영만큼이나 연극을 갉아먹는다는 생각에서다. 상호능동성 연극에 참여할 경우 경험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경험해야 한다. 치약 묻힌 전동칫솔을 들고 객석의 관객들에게 칫솔질을 강요한다. 힌리히스에 따르면 무엇을 하든 무대와 객석의 능동적 교감은 있을 수 없으므로 상호수동적이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나경민 2013) 그렇다면 상호수동성의 연극이란 무엇인가? 관객이 수동적인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배우는 어떻게 ‘상호적으로’ 수동적inter-passive이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흥미로움을 넘어 현실과 맞닿을 수 있을까?)


참고문헌

─나경민. (2013.) 「포스트드라마 시대의 배우의 방향성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 대한민국.
─Rudolf Arnheim. 1935/1957. 「영화와 현실」, 『영화와 현실』, 이윤영 편역(서울: 문학과지성사, 2011).
─Béla Balázs. 2003. 『영화의 이론』. 이형식 역. 서울: 동문선.
─Jacques Aumont. 2006. 『영화 속의 얼굴』. 김호영 역. 서울:마음산책.
─우수진. (2020.) 「팬데믹 시대의 연극」. 『공연과 이론』 77: 5-6
─밤비. 2020. “Pathos In Faces”. 지평L’Horizon, http://www.lhorizonsociety.com/4971/
─백훈기. (2010.) 「피터 브룩의 연출 작업과 ‘빈공간’에 드러나는 브리콜라주」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0(10): 161-171.
─신은아. (2014.) 「수직성 개념을 중심으로 본 예르지 그로토프스키의 ‘운반수단으로서의 예술’ 연구」. 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대한민국.
─최영주. (2017.) 「왜 지금 다큐멘터리 연극인가?」. 『연극평론』 87(0): 170-175
─Maurice Merleau-Ponty. 1945.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 『영화와 현실』, 이윤영 편역(서울: 문학과지성사, 2011).

밤비
tpdyd83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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