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적어도 실용적으로, 규범의 체계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당위성을 보존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어떠어떠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떠어떠한 것을 해야만 한다, 또는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진술들은 일단 사유되었고 합의에 이른 행위의 지침 즉 ‘윤리’가 아카이브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필요할 때마다 ‘저장’ 및 ‘불러오기’를 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윤리(학)적 사유를 거쳐야만 할 것이고 행위를 합리화, 정당화해 주는 근거들을 매번 찾아야 할 것이며 심지어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순간에서조차 시간을 낭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도구는 철저한 소독을 거쳐야 한다.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한다. 타인을 폭행하거나 살해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당위성을 담고 있는 규범적 진술들은 ‘(이미 발명된)바퀴를 계속해서 재발명’하는 일을 피하게 도와준다.

요컨대 규범 체계는 실용적으로 쓸모 있다. 그리고 규범적인 것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윤리적 사유가 당위성에 관한 사유라는 것 역시 명확하다(이 지면에서는 당위성 자체가 어디에 근거하는지의 문제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일단 당위성 자체를 받아들이자). 그런데 당위성에 관한 사유는 규범성을 통해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가? 또, 규범 체계의 규범성, 즉 옳고 그름 내지는 좋음과 나쁨을 규정하고 판별하는 규칙들이 구성되는 방식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며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규범 체계의 정당성에 관한 순환론

어떤 (구체적인) 가치 판단은 특정한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판단은 단지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A는 좋은 시(詩)다’라는 평가는 (그것이 단지 ‘A를 읽으니 기분이 참 좋았어’라는, 감정이나 심리에 관한 진술이 아닌 이상에야) 늘 ‘좋은 시란 어떠어떠한 것이다 / 어떠어떠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적 진술들의 체계를 선제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규범의 체계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늘 전범, 전거, 정전canon이 필요하다. 규범 체계가 어떠한 내용도 없이 단지 규정하는 형식만 지니고 있을 수는 없는 이상, 그 내용은 (그 규범 체계의 적용 대상인) 실제 사례들로부터 구성되었을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연역적 방법만을 가지고 시론(詩論)의 규칙들을 구성한 뒤 이를 가지고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 하나를 적용 대상으로 삼아 평가한 것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전범을 놓고 일반론으로서의 시론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즉 실제적 대상들 사이에 이미 위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전범을 골라낼 수가 없었다면 규범 체계의 내용을 구성할 방법 또한 요원하다. 그런데 좋은 시의 전범을 가지고 좋은 시를 규정하는 규범을 구성한다면, 이는 규범이 가려내야 할 결과를 가지고 규범 자체를 만드는, 일종의 논점 선취와 다름이 없다.

이러한 순환론의 상황은, 단지 예술 작품의 뛰어남을 평가하는 것뿐 아니라 행위 및 윤리적 판단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진다. 다만 윤리의 규범 체계의 경우, 그 규범이 단지 경험적으로 구성된 게 아니라 어떤 선험적 토대를 가진다고 우리가 믿는 경향이 강할 뿐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추상적인 규범으로부터 구체적인 맥락 속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판단이 모조리 연역될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윤리학자들이 일하는 방식 역시,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실제 사례이든 사고 실험이든)을 놓고 행위 규범을 수정해가며 구성하는 식이지 그 반대가 아니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규범의 구체적 내용을 구성하는 것과 그 규범을 정당화하는 것은 별개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예컨대 ‘수술실에 들어갈 때 모든 장비와 기구는 철저히 소독되어야 한다’는 규범은 실제 의료 상황 및 성공적인 수술과 감염으로 인해 실패한 수술이라는 예시로부터 그 내용이 구성되었지만, 규범의 정당성 자체는 ‘목숨이 위험한 처한 사람을 보면 그를 살려야 한다’는 규범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상위 규범으로 올라갈지라도 그 규범은 실제 사례에 대한 경험을 통해 정당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다면 정당화는 또다시 그보다 상위의 규범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끝없이 떠넘겨진다.

결국 우리는 ‘내용 없이 오직 형식만 존재하는 최상위의 규범’을 전제하지 않는 이상—그리고 정말로 그 어떤 내용도 없이 오직 형식만 존재하는 최상위의 규범이 실재한다는 주장은 신명론에 다름없다—규범을 정당화하는 일의 한계에 부딪친다. 그리고 신명론에 관한 유명한 반론들이 이미 입증해 보였듯이, 신명론을 옹호한다면 뭇 규범들이 다 연역될 수는 있지만 말 그대로 모든 규범이 연역될 수 있기에, 어떠한 규범이 반드시 이러한 규범이어야 할 근거는 사라지게 된다. 요컨대 규범 체계가 정당성을 확보하면 할수록 (구체적 규범의) 당위성은 희박해지며, 당위성이 분명해지기 위해선 규범이 경험에 의존해야 하므로(그렇게 되면 앞서 보았듯 순환론이 발생하므로) 정당성이 희박해진다. 그러니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당위성에 관한 사유를 규범성을 가지고 전개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은 없는가?

규범성과 기술성

규범적이라는 것은 곧 어떠한 것을 일차원적으로 의미화한다는 것이다. 규범의 체계에서, 의미는 하나의 대립쌍이 만드는 축 위에만 배치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어떤 행위의 의미가 하나의 축 위에 근거하거나 혹은 하나의 축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가능해 보이는 때조차도 실은 행위에서 (실제 세계에서는 늘 결부되어 있기 마련인) 맥락들이 소거되어 극도로 단순화된 경우가 아닌가? 다시 말하면 늘 어떤 행위는 어떠한 것을 감수하는 대신 어떠한 효과를 얻는 일로서 복잡하게 의미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문법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어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문법은 규범 문법normative grammar—처방 문법prescriptive grammar으로 불리기도 한다—으로 이해되었다. 이 때의 규범이란 한 언어 체계가 ‘말해지는’ 방식 속에 있는 내적 일관성, 정합성, 규칙성 등을 ‘말해야만 하는 방식’의 형태로 가공한 것이다. 언어는 특정한 문법 요소들을 통해서 의미를 생산할 뿐인데, 그러한 방식들을 규범화한 것이 규범 문법인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문법 내지는 통사론에 규범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들이 어떻게 말을 하는지, 그들이 어떤 문장을 자연스럽다고 판단하고 어떤 문장을 부자연스럽다고 판단하는지를 관찰하여 언어 내적 규칙들을 규범화하지 않고 다만 그것들을 기술describe한다. 이를 기술 문법descriptive grammar라고 한다. 즉 기술 문법이 원하는 것은 어떤 문장이 올바른 문장인지 틀린 문장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 한 언어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어떤 문법 요소들을 어떻게 활용해서 서로 다른 의미들을 생산해 내는지 하는 것이 기술 문법의 관심사인 것이다.

규범 문법은 기술 문법으로 대체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후자가 언어에 관한 더 정확한 이해임이 분명하다. 상세한 언어학적 지식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규범 문법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어떤 문장이 ‘올바른’ 문장인 이유는 문법 규범에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법적 규범이 그런 식의 규범인 까닭은 언어가 그렇게 쓰이기 때문이다. 문법 규범이야말로 그것의 정당화를 경험 외의 다른 것에 의존할 수 없는 규범 체계다. 따라서 앞서 지적한 순환론이 여기에서도 발생한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고 이렇게 말해야 정확한 문장이다’라는 규정의 체계, 즉 ‘올바르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에 관한 규범 체계는 ‘이렇게 말하면 이런 의미가 되고, 저렇게 말하면 저런 의미가 되는데, 다만 이렇게 말하면 어떠어떠한 까닭으로 어색한 문장이 된다’는 식의 서술의 체계로 전환 가능하다. 물론 당위성을 가진 진술은 실용적인 지침으로서 쓸모 있다. 몇몇 문법 규칙들을 외워 둔다면 문장을 쓸 때마다 형태론적, 통사론적, 의미론적 분석을 하지 않아도 학자들이 이미 밝혀놓은 언어 체계 내적 정합성, 일관성, 규칙성을 근거 삼아 의사소통에 별다른 문제없이 문장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범적인 체계로 언어에 접근하는 것은 확실히 언어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차원적으로 의미화된, 비규범적 체계를 통한 이해는 습관처럼 지니고 다니는 규범들이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듯 보이는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이 전환과 함께 당위성은 완전히 사라지는가? 기술 문법은 어떤 문장이 제아무리 기괴하고 어색할지라도 그것을 배제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비규범적 서술의 체계는 의미가 분간되지 않거나 혹은 모순되는 것을 배제한다. 즉 비규범적 서술의 체계는 어떤 것을 할 것을 명하지 않고(또 어떤 것을 ‘금지’한다고 할 수도 없겠지만), 다만 어떤 것이 여러 차원에서 어떠어떠한지를 분석하며, 용납되기 힘든 것의 용납될 수 없음을 근거 짓고 그것을 배제한다.

규범적 윤리에서 비규범적 정치로

윤리학 중에서 메타윤리학적 논의를 뺀 영역이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윤리학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규범적이되, 일단 자기 자신의 근거를 모색하게 되면 자신의 규범성을 정초하기 난망하다는 사실에 대한 알레고리라도 되는 것마냥 절묘하다. 여하튼, 윤리학은 당연하게도 규범적 체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그 규범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우리는 다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윤리학을 비규범적 서술의 체계로 전환하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 애초에 윤리학을 비규범적 서술의 체계로 전환해버리면 그것이 과연 여전히 윤리학인가?

아마도 윤리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ethos든 倫이든) 다분히 규범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 이름으로 묶이는 진술들이 규범적이지 않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또 규범적 체계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쓸모가 있으므로, 윤리라는 영역 자체를 남겨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윤리가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대상들을 일차원적 규범성의 틀에서 해방시켜 다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마도 내가 ‘정치는 윤리에 앞선다’고 주장했을 때의 ‘정치’가 가리킨 것, 또 제도적, 거시적 정치 이전에 가능하고 또 이미 펼쳐져 있는 것으로서의 ‘정치성’이 가리킨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듯싶다. 구체적인 맥락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딜레마로 가공된 ‘트롤리 문제’를 다시 세계 속의 사건과 상황으로 복귀시키고, 이를 ‘정치’의 문제로 되돌려 여러 차원의 축을 두고 분석하는 것, 가능한 선택들의 의미에 관해 숙고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가 규범성 위에 놓이는 한 선택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도덕적 정당화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의 문제인 한 선택의 방향과 그에 대한 정당화 여부는 불일치할 수도 있으며, 제거된 맥락이 복원되어 실제의 구체적 상황이 되는 한 딜레마 상황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택이 결정될 수 있다. 예컨대 실제로는 특정 행위가 특정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점을 100% 확신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또 윤리를 규범성이라는 일차원의 인식 틀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비로소 이른바 ‘선량한 차별’에 관한 비판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이를테면 ‘선한 의지’에서 나온 행위가 실제로도(적어도 단기적으로)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켰지만, 그것이 다분히 차별적 시선에서 나온 적선이라면 그런 행위를 배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규범적 당위성, 즉 ‘X를 해야 한다you should X’는 식의 진술들로 구성된 체계로서의 윤리는 긍정문이든 부정문이든 명령 혹은 금지만 명시할 뿐, 그 어떤 가능성의 영역도 남겨두지 않는다. (또 이 명령 전체의 부정은 ‘꼭 X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You don’t have to X’이므로 단지 소극성만을 나타낸다.) 그러나 비규범적 서술의 체계에 잔존하는 ‘부정형의 당위성’, 즉 ‘X는 받아들일 수 없다it’s not acceptable (that) X’는 다시 부정을 더하면(즉 긍정문을 만들면) 가능성을 열어두는 진술이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당위성을 다시 사유함으로써, 당위성에서 규범성을 걷어 내어 ‘규범성 없는 당위성’을 발명함으로써 행위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면서도 폭력을 배제할 근거를 확보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규범성이라는 가장 오래된 습속ethos으로부터 사유가 자유로워짐으로써(그것을 다만 실용적인 규칙과 습관으로만 유지함으로써) 정치성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또 역사적으로 정치적 운동은 늘 그것의 외침이 규범화되어버리는 순간에 정체되거나 변질되거나 실패했던 것이 아닐까?

단현
danhyun0124@naver.com

3 thoughts on “규범성 없는 당위성의 가능성

  1. 전에 한 번 다른 글에서 물었던 것인데, 단현은 그 정치에 참여하는 이들이 규범성을 전제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예컨대, ‘여대를 존속시켜야 한다’를 주장하기 위해 결국 정치 참여자는 ‘여성은 교육권을 침해받고 있다’, ‘교육권을 침해받는 이에게 교육의 자리를 넓히는 것은 분배적 정의의 실현이다’라는 주장 외에도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규범적 주장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1. 전제되는 것은 당위성이지 규범성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저는 당위성에서 규범성을 분리해내려는 것입니다. 당위성 없는 정치는 물론 가능하지 읺겠지요.

      1. 규범성이 전제되지 않고 공론장에서 정치적 의사 표현이 가능한지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말이었습니다. ‘분배적 정의를 시행해야 한다’라는 전제는 단순히 취향에 관한 주장이라기보다, 규범적인 주장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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