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인 것 같긴 하지만」을 쓴 지 2년이 딱 지났다. 초보적인 물음이었지만 여하간 탐구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당시 가졌던 물음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파편적으로나마 다뤄왔다. 이제 어디쯤 왔나 싶어서 정리를 해 보려 한다.

생각건대 내 물음에는 강한 욕망이 있다. 문학과 문학비평에 있어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말하기. 나름대로 문학적(?) 행위 규범을 설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한 보편적인 거면 좋겠다. 야, 이렇게 하면 좋은 비평이야,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셈이다.

다만 메타비평은 비평에 ‘축자적인’ 규범을 주지는 못한다. 문학 활동에 대해서 메타문학도 마찬가지고. 찜찜하지만 여정의 말대로 어쩔 수 없다. 음, 몇몇 대상에 관한 탐구는 애초에 그런 거 같다. 혹은 그래도 괜찮은 거 같다. 혹은 혹은 우회로가 있는 거 같다. 좀 대충… 우회해도 어느 정도 쓸모 있는 답이 나오는 느낌…

이 잠깐 들었다. 꿈이었다.

*

물음: 좋은 비평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무엇인가. 앞선 물음 두 개로 나눠 볼까.
1. 이걸 왜 묻나.
2. 비평에 좋고 나쁨이 있나.

이걸 왜 묻냐고 하면, 이걸 왜 묻냐고 왜 묻냐. 아직 잘 모르겠다. 미뤄 두고, 두 번째 것부터 가자. 비평에 좋고 나쁨이 있나. 있는 거 같다. 있다고 말하려면 비평이 뭐냐는 물음을 먼저 해야 한다. 비평이 뭐냐고 물으면 대상 텍스트를 기술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이라고 답할 거다(황유경).

기술description은 “작품 내에 사실로서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을 다루는 것”. 해석interpretation은 “기술에 입각해서 명백하지 않은 특징을 규명해 내려는” 것. 평가evaluation는 “기술과 해석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 (황유경, 1991)

설명이 부족하긴 하지만, 세 가지 요소가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미학적 분석이라고 한다. 근데 말이 어렵지 이게 그냥 비평 아닌가 싶다. 최소한 이 셋에 뭔가를 더할 수는 있어도, 얘네를 빼면 비평이 되나.

지금은 이 정도로: 비평은 항상 대상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그 방식이나 양상이 구체적으로 어떻든, 비평은 그 대상 텍스트에 관련한 발화다. 이걸 인정한다면 비평이 대상을 기술하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다. 기술하고 해석하되 평가하지는 않는다면 굳이 비평이라고까지 부르기 뭣하다. 주석이나 해설 정도의 다른 단어가 있다.

불충분한가. 불충분하지 그럼. 천천히 검토하려 한다. 분석미학에서는 아직도 싸우는 모양이다. 해석과 평가가 잘 나눠지지도 않고 근거도 불충분하고 그렇단다. 하지만 오늘 내 얘기는 기술과 해석과 평가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검토하지 않아도 잘 굴러갈 거 같다(그랬으면 좋겠다).

비평이 기술과 해석과 평가라면, 비평의 좋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좋은 비평은 대상 텍스트에 관한 정확한 기술과 해석을 토대로, 대상 텍스트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문제:
a. 정확한 기술과 해석이 뭐냐. 텍스트의 무엇을 기술하고 해석하나.
b. 텍스트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는 게 뭐냐. 그거 가능한가.

(이쯤 되니 ‘텍스트’라고 퉁치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정 장르에 대한 비평으로 논의 대상을 좁히기 싫어서 그랬는데, 내가 좀 더 똑똑했으면 그대로 밀고 갔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텍스트 대신 ‘문학 작품’이란 말을 다시 쓰자.)

a와 b 모두 문학(작품)이 뭐냐 하는 문제와 엮여 있다. 문학이 뭐냐는 거랑 문학‘작품’이 뭐냐는 거랑은 다르지만. 지금 생각하기로는 a는 문학 작품이 무엇인가,와 문학 작품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물음이 섞여 있다. b는 문학 작품이 뭐냐,랑 문학이 뭐냐,가 섞여 있다. 그리고 a와 b를 묻기 전에 문학이 뭐냐,를 물어야 한다. 스스로 검증한 건 아니고, 직관적으로는 그렇다. 이것도 체크. 잠깐만 문학(작품)이라고 퉁치자.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a를 물을 때는 아무래도 ‘작품 내부의 것’이 답으로 나와야 한다. 안 그러면 좀 이상하다. 작품에 없는 것을 기술하고 해석하는 건 어떻든 정확하지 않다. 어려운 건 작품 내부의 것을 구분하고 범주화하는 일이다. 문학의 형식에 대한 탐구라고도 하겠다. 이게 돼야 무엇을 기술하고 해석할 것인지가 확정되고 그 기술과 해석이 정확한지를 따질 수 있다.

그리고 텍스트를 ‘평가’하는 게 가능하려면 문학 작품에 ‘좋음이 있다’고 먼저 주장해야 한다.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이다,는 그냥 진술이고, 이 작품이 좋은 작품 혹은 아쉬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좋음이 구체적으로 무슨 좋음일까. 일상적으로 우리가 ‘나 이 작품 좋아, 싫어’라고 말할 때의 좋음은 아닌 거 같다. 이 좋음은 취향이다. 평가와 취향적 발화는 직관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평가는 아무래도 여럿이서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살아왔고 살아갈 사람이 예술 작품을 ‘평가’할 수 있을까(미심쩍은 가정이지만). 할 수 있대도 소용 없어서 곧 그만둘 거다. 평가는 사회적인 행위다. 이 작품의 가치를 주장하고 설득하고 통용시키는 일이다. 그렇다고 작품의 가치가 다수결로 정해지는 건 또 아니다. 묘한 뭔가가 있다.

어쨌거나 비평은 작품의 내외부(딱 나눠지지는 않겠지만)를 모두 겨냥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전부터 ‘텍스트에 굳게 발을 디디고 밖으로 뻗어 나가는 비평’을 종종 얘기하곤 했는데, 그거 가능할 거 같다. a와 b가 말이 되는 물음이라는 게 검증된다면.

그런데 그 검증, 나 혼자서는 못 하지. 혼자 할 수 있으면 여기서 안 놀고 있지. 그러니까 우회를 좀 해 보자.

*

러시아 형식주의는 1915년에서 1930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있었던 문학연구의 한 경향이다(김치수, 7). 이 사람들은 문학 연구를 ‘과학화’하려 했다고 한다. 그 때는 문학연구에 온갖 이상한 걸 갖다 붙이는 일이 많았나 보다. 심리, 정치, 철학, 뭐 그런 거.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의 텍스트로 문학작품을 가져와 쓰는 거. 이것도 잘 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생각건대 그런 건 문학작품을 텍스트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여타 이론들의 무차별한 확장이지 문학이론은 아닌 거 같다. 혹은 문학을 중요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참고 자료 정도로 대하는 것 같다(도대체 문학을 참고 자료로 써도 되는 이론이 문학사와 문학이론 말고 뭐가 있는지). 야콥슨이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처럼 문학사가들은 모든 것을 다시 말하자면 개인의 생활, 심리, 정치, 철학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문학 과학 대신에 투박한 여러 분야들을 뒤섞어 콘크리트를 구성해 놓았다. 마치 이 대상들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학문, 즉 철학의 역사, 문화사, 심리학 등에 속한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이 분야들이 자연히 불충분한 자료로서 부차적인 문학 현상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한 것 같았다.

로만 야콥슨. 다음에서 재인용: 츠베탕 토도로프 편. 김치수 역. (1988). 『러시아 형식주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뭐 그런 불만에서 시작한 모양이다. 근데 문학의 과학화라는 건 정확히 어떤 뜻일까. 문학이 과학적 방법으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인가. 과학적 방법이라는 건 또 뭐고. 왜 문학을 과학화해야만 하나. 왜,라고 물으면 문학이론을 사변적인 무엇에서 구해내 잘 정립된 이론으로 만들고 싶어서,라고 야콥슨이 답할 거 같긴 하다. 과학적이어야만 잘 정립된 이론인가. 그건 그런 거 같다. 과학적 방법의 정의와 문학이론에 적용될 수 있는 과학‘성’ 같은 것도 따로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과학적이지 않은 이론은 이론인가. 거대한 문학… 아닌가(이 때 말하는 ‘문학’은?).

어쨌건 간에,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한 한 해설은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이론에 의해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의해서 이론을 정립해 나감으로써 그들의 문학 이론을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으로 만들고자 한다. 과학이란 구체적인 사실들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폐기되고 수정되는 가운데 원리들을 이론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치수. (1988). 『러시아 형식주의』. 12p.

내게는 재밌는 포인트다. 문학(작품)이 뭐냐는 질문에 우리가 자꾸 막히는 이유는 문학을 정의하는 이론을 먼저 만들고 그걸 적용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런 건 안 되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문학(작품)이라고 부르는, 불러 온 것들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심쩍은 사상이 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먼저 정의되어야 할 사항이 아니다. 이론의 완성은 마지막에 와야 한다. 이를테면 러시아 형식주의자의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하나인 아이헨바움이라는 사람은 이렇게도 이야기한다(좀 길긴 한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태도를 정리하는 데는 내 말보다 이 인용이 나을 거다):

우리는 완전히 완성된 어떤 이론이나 어떤 체계도 갖지 않았고 또 아직도 갖고 있지 않다. 과학적인 우리의 작업에서, 우리는 그 이론을 단지 작업상의 한 가설(假設)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 이론이 도움을 받게 되면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가리켜주고 또 이해하게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우리는 그 아류들이 그처럼 열망하는 정의들을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절충주의자들이 그처럼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일반 이론들을 정립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정립하는 것은 구체적인 원칙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이 어떤 재료에 적용될 수 있기만 하면 우리는 이 원칙들로 만족한다. 만약 그 재료가 우리의 원칙들의 복합화를 요구하거나 그 원칙들의 변화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즉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론들에 얽매이지 않고 충분히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 생각으로는 이론과 신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음에 따라서 모든 학문은 모름지기 그 이론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완전히 완성된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학문이란 시행착오를 극복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진리들을 설정함으로써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아이헨바움. (1988). 『러시아 형식주의』. 26-27.

그러면 이들이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확히 뭘까. 문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의 정의가 아니라, 문학 안의 ‘문학성littérarité’이라는 요소다. 문학 과학의 목적은 다른 분야와 문학을 구별하는 고유한 요소들을 밝히는 일이다. 우리가 문학(작품)이라고 부르는 것들 내부에 있으면서(외부에 있으면 이상하지) 다른 것들과 문학(작품)을 구별 가능하게 해 주는 무엇,을 찾는 일이다. 그래서 이 작업은 ‘형식적 방법’과 관련한다. 문학(작품) 안에 있는 형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문학의 형식들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맺고 작용하는지를 밝히는 일이 문학성을 연구하는 일과 같다.

이 과정이 다름 아닌 가설과 검증의 연속이며, 완성되지 않는다는 거다. 이 요소가 바로 문학성이야,라는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다른 작품들에 적용해 봄으로써 검증을 거친다. 되면 계속 가고, 안 되면 수정한다. 문학의 과학적 연구는 이 반복이다. 연구의 방법도 마찬가지로 수정될 수 있다. 문제는 연구의 방법이 아니라 문학성이라는 연구 대상이기 때문에.

그럼 일단은 완전히 작품 내재적인 층위에서 가능해 보이는 사유틀이다. 그들은 형식과 내용을 봉투와 내용물 식으로 분리하지 않고 ‘문학적 사실fakt들’의 총체로 이해했다. 문학 작품 안에서 나타나는 요소들, 그냥 거기에 있는/있어 온 것들의 총체, 총합이 아니라 결합과 생성, 작용으로서의 총체. 그런 문학적 사실들 중에서 첫 번째 ‘문학성’으로 발견된 것이 그 유명한 ‘낯설게 하기’ 기법이다. 러시아 형식주의는 뭐 그런 식인 거 같다. ‘낯설게 하기’를 설명하는 건 오늘 내 목적은 아니고.

그런데 이건 초시공간적인가? 그렇다고 말하려는 거 같은데.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문학적 사실들’은 적잖이 표백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논문 「기법으로서의 예술」을 발표하고 형식주의 포문을 열었던 슈클로프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슈제트sujet들은 고향이 없다”(김수환, 재인용)는 말을 했다. 슈제트는 플롯의 러시아어다. 플롯보다 좀 더 복합적인 의미가 있는 듯하지만, 오히려 바르트 등 구조주의에서 개념화한 ‘서사’가 더 맞는 거 같긴 하지만, 여기선 여기까지. 어쨌거나 이 말은 문학 작품들이 초시공간적으로 공유하는 어떤 패턴이 있다는 뜻이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있는 작품들 사이의 어떤 보편을 주장하는 것이다.

당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치고받고 했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이 비판했던 게 이 부분이라고 한다. 후자의 이론가였던 트로츠키는 생산관계가 예술의 생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므로 슈제트가 사회정치경제적 맥락에 묶여 있어야 한다고 슈클로프스키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이를테면 형식주의는 어떻게,에 대답할 수는 있으나 왜,에는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식주의자들은 모델에 이런저런 수정을 가했다고 한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슈클로프스키가 ‘항복 선언문’을 낸다!

나의 접근은 상이한 민족적 맥락들을 지닌 서로 다른 세기의 문학들로부터 서로 멀리 떨어진 사례들을 택해서 그것들의 미학적 동등성을 주장하는 것에 있다. 나는 이 작품들 각각을 일종의 닫힌 체계로서, 그러니까 그 체계가 문학적 체계 전체, 그리고 일차적이며 문화-형성적인 경제적 층위와 맺는 관련성 바깥에서 연구했던 것이다. 문학적 현상들에 대한 탐구의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분명해진 것은 모든 작품은 다른 작품을 배경으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오직 문학적 체계의 일부분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관찰을 자신의 연구에 통합시키려 했지만 그로부터 주된 결론을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것이 나의 잘못이다.

다음에서 재인용: 김수환. (2017). 「러시아 형식주의 : 혁명적 문학이론의 기원」.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57(0), 7-35.

뭐 이 선언문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고 한다. 이 선언문 하나로 러시아 형식주의가 다 부정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슈클로프스키 외 다른 사람들은 문학사회학이나 문학의 제도적 연구 등으로 방향을 틀어서 형식주의를 잘 계승했다. 다만 여기선 이것만 짚자: 이 선언은 어쩐지 순수하게 내재적인 문학 이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러시아 형식주의 스스로 증명한 것을 보여주는 거 같다. 그렇게 대단한 통찰은 아니지만, …

*

비평을 위해서는 이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던 a나 b 같은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문학(작품)은 무엇인가 내지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 같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번 러시아 형식주의 공부는 a에 좀 도움이 됐다. 문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작품들에서 뽑아낼 수 있는 ‘문학적 사실들’에 집중하면 작품에서 무엇을 기술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의 답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언어라는 구성 요소와 언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므로, 선제하는 것 없이도 어느 정도는 ‘이미 거기에 기술하고 해석할 것들이 있다’. 그 중에서 문학성 같은 걸 발견하고 검증할 수 있다면 더 좋겠고.

근데 b를 답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만약 러시아 형식주의가 초시공간적 보편성을 귀납적으로 발견하고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면 뭐,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학성들을 얼마나 강도 있게, 혹은 복합적으로, 중층적으로, 창작 기술로써 구사하고 있는지를 체크하면 작품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는 게 문제다. 이를테면 막 사람을 죽이고 그러는데 죄책감도 없고 그 범죄가 부드럽게 정당화되고 그러는데 글을 너무 잘 썼다. 압도적인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작품은 좋은 작품인가. 여전히 아닌 거 같다. 순수하게 내재적인 문학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건 여기에 있다. 문학은 결국 사람이 읽기 때문에, 아까의 질문 b는 어쨌거나 문학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이다.

모호하지만 나는 다시 이런 말로 돌아온다: 결국 지금의 우리가 무엇을 문학이라 부르느냐의 문제다. 문학의 존재 이유나 기능은 먼저 합의되어 있는 게 아니어서, ‘이게 좋은 문학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이건 랑시에르가 정의했던 미학의 문제다. 무엇을 무엇으로 부르느냐. 그 충돌 과정 전체가 문학이다,라는 넓고 사소해서 귀여운 결론. 슈클로프스키가 부딪혔던 것도 이 비슷한 게 아니었으려나, 하는 생각. ‘문학적 체계’라는 거대하고 미심쩍은 덩어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결국 못 피한 거지. 그 체계는 문학성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거고, 문화와 경제와 사회가 만드는 거고, … 문학의 열쇠는 어쨌거나 문학 밖에 있다.

그러면 b. 텍스트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는 게 뭐냐. 그거 가능한가. 이 물음 없이도 비평을 정의할 수 있다면 좋다. 그게 안 된다면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답해야 하는데 답하지 못한다면, 좋은 주석이나 해설이 무엇인가,는 묻고 답할 수 있어도, 좋은 비평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시작도 못 하는 게 된다.

아, 여기까지 왔는데 기분이 나쁘다. 결국 메타적인 고찰은 실천에 도움이 안 되는 건가. 일단 좋은 비평이든 뭐든 비평을 하나하나 써나가야 하나. 우리가 무엇을 문학으로 부르느냐,를 선제함으로써 헛도는 바퀴를 고정시킬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다시 빠지는 임시 방편일 거다. 튼튼한 기반 같은 건 못 된다. 나무 판자 두 개로 대해를 건너가려는 느낌이다.

만약 내가 이 헛짓거리를 계속한다면, 다음 물음은 아마, 이 답도 없이 구성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으로 보이는 체계를 한순간만이라도 그럴듯하게 고정시킬 수 있을까, 비슷한 물음이 될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게 돼야 내 비평의 틀이 생길 거 같은데, 만약 정말로 끝까지 헛짓거리라면, 빨리 다른 우회로를 발견하거나, 이 작업이 애초에 필요 없는 일이라는 확신을 찾았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황유경. (1991). 「분석미학에 있어서 예술비평의 문제 -비어즐리의 비평철학을 중심으로-」. 『미학』, 16(0), 153-174.
김수환. (2017). 「러시아 형식주의 : 혁명적 문학이론의 기원」.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57(0), 7-35.
츠베탕 토도로프 편. 김치수 역. (1988). 『러시아 형식주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권철근 외 공저. (2001). 『러시아 형식주의』.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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