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Cassavetes. (1968). 〈Faces〉.

영화는 우리가 탄생을 지켜본 유일한 예술이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할까.

기원조차 추정에 그칠 만큼 오래된 예술들의 막둥이로서, 영화는 형제들의 발전상을 답습하고 수정, 보완해갔다.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에 따르면 영화는 미라로부터 시작되는 계보에서 회화, 사진을 거쳐 리얼리즘의 역할을 떠맡은 예술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현실 보존 욕구’의 실현이 기술의 발전(방부 처리, 원근법, 감광, 디지털, …)에 따라 자신의 수단을 달리해간다.

또한 ‘예술은 어찌되었든 인간을 다룬다’는 관점에서 영화를 다른 예술들과 비교해볼 수도 있다. 회화-사진-영화의 계보 뿐 아니라, 문학-연극-영화라는 묶임으로 독특한 계열체가 생겨날 수도 있다. 이는 디제시스(허구 세계)라는 거대한 장르 속에 포섭된 것들의 집합이다.

문학-연극-영화는 내러티브와 만나 회화-사진보다 더 ‘인간’에 집중한다. (<이솝 이야기>,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처럼 우화적인 작품들이라 할지라도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보려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내러티브는 인물들이 진행해간다.

문학은 아무리 특정 인물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온전히 허구적인 ‘등장 인물’에 그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등장 인물을 대응시킬 ‘배우’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렇기에 책은 언제나 환원적 상상의 냄새를 풍긴다. (덕분에 인간은 우주에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인간 자신과 관련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연극은 너무나도 직접적으로 ‘현실’과 관계한다. 희곡은 연출과 배우, 스텝들, 즉 인간들로 육화하고 공간은 무대로 구체화되며, 관객은 매개 없이 현장을 ‘경험’한다. 연극은 등장 인물에 대응되는 ‘배우’를 갖는다. 소위 ‘현장감’이라는 연극의 무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배우, 무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도록 해 주었다. 이로 인해 관객들은 연극의 현장에 속해 있으며 연극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극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러티브에 집중하는 것과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오히려 연극의 현장성은 내러티브에 적합하지 않다. 개별 연극은 특수하며, 단발적이다. 이는 개별 연극의 개별 회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는 배우의 컨디션과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때때로 배우의 제스처가, 대사와 어조가 실수인지 의도인지 혼란스러우며, 갑작스러운 소음, 조명, 무대 요소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배우를 등장인물보다는 살아있는 ‘배우’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연극 자체의 제한적 요소들도 (부차적이지만) 분명히 연극적 내러티브의 한계를 제시한다. 연극은 인간 육체의 현현으로, 핍진하면서도 은유와 합의가 난무하는 ‘무대’라는 공간적 제약을 받으며(이는 영화에서 세트장의 눈속임과 같다), 관객들을 위해 제4의 벽은 언제나 허물어져 있어야 하고, 객석에 앉은 관객들을 위해 배우들의 발성과 몸짓은 과장된다.

영화는 분명 연극과 유사하다. 초기의 영화는 연극 촬영에 그쳤다. 요컨대 영화는 연극의 말 잘 듣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디제시스의 측면에 있어서 아버지 격인 연극을 좇았고, 따라잡았으며, 끝내 죽여버렸다. Freud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생각해봄직하다.

미국의 그리피스Griffith가 발명한 클로즈업과 함께 상황이 변화했다. 〈국가의 탄생〉(1905)에서 그리피스가 배우의 표정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밀었을 때, 영화는 비로소 예술이 되었다. 영화는 제4의 벽도,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 목소리도 필요 없어졌고, 비현실적인 무대는 더더욱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벨라 발라즈Béla Balázs에 따르면 클로즈업을 통해 ‘미세표현법’이 발달하게 되었고, 영화의 경향이 리얼리즘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는 배우가 실수할 일도, 현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기술적 문제들로 골치 앓을 일도 없다. 각각의 쇼트들을 몇 번이고 다시 찍어서 연출가가 생각하는 최적의 완성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관객들에게는 이에 대한 믿음이 있다. 발라즈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개념 연상 작용과 상상력은 의미 없는 덩어리에도 (장난 삼아서라도) 의미를 항상 부여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으며, 위의 믿음으로 인해 이러한 경향은 영화에서 결코 방해받지 않는다.

연극은 영화에게 디제시스 공간을 내주었고,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가 지적하듯 영화의 진정한 라이벌은 더 이상 연극이 아니라 소설이 되었다. (그렇기에 연극이 생존을 위해 모색해야 할 방식은 배우 개개인이 등장 인물이 아닌 배우 자체로 살아 숨쉬며 그와 관객들 사이의 직접적 관계성을 담지하는 다큐멘터리극이다.) 영화는 최초의 클로즈업 이후 각도, 앵글 등의 설정과 몽타주, 페이드 인/아웃과 같은 복잡한 기술들을 사용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선수 작업으로 시나리오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시나리오는 소설보다는 희곡에 가까웠지만, 영화는 연극보다 문학에 가깝기를 택했다. 시나리오는 소설처럼 변해갔다. 내용과 형식의 합을 예비해왔던 시나리오에서 우선적으로 대사가 많아지고 중요해졌으며, 영화는 구어적 세계보다는 문어적 세계가 되었다.

할리우드 시스템의 상업주의 덕에 영화는 더욱 실용적이며 합리적으로 변해갔다. 에릭 로메르Éric Rohmer의 〈겨울이야기〉를 비평할 때에도 언급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부터 비롯된 사건중심주의와 맞물려, 영화는 사건A와 사건B의 논리적 연결성을 필두로 가장 쉽게 인과적 이행을 수행할 방법들을 찾아갔다. 그 결과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며 매끄럽게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할리우드 고전 기법들이 정립되었고, 많은 것들이 대사를 통해 진행되었다.


꽤나 많이 돌아왔지만, 감독 존 카사베츠John Cassavetes는 어떻게 클로즈업이 영화를 예술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배우의) 얼굴들과 결합하여 어떤 힘을 내는지를, 그리고 사건 중심의 영화, 논리정연한 영화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밝혀낸다. 영화는 더욱 현실적이어야 하고, 더욱 인간적이어야 한다.

토드 벌리너Todd Berliner는 카사베츠의 영화들을 Real Realism이라고 지칭했다.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의 출연진을 살펴보자. 카사베츠의 실제 부인이자 뮤즈인 Gena Rowlands, 그녀의 어머니 Lady Rowlands, 카사베츠의 어머니 Catherine Cassavetes가 감독의 페르소나인 Peter Falk의 가족 구성원으로 등장한다. 이는 육화된 배우의 초상이 영화에 얼마나 적합한지를 넘어서, 배우를 통해 현실과 영화를 맞닿게 하는 방법론이다. 이는 전후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네오 리얼리즘’ 방식과 흡사하다.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와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등이 이끌었던 네오 리얼리즘은 전후 피폐해진 현실을 필름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여기에 더불어 전문 배우가 아니라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실제 고통받은 사람들을 배우로 세운다. 영화는 (부정적인) 현실마저도 직시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앙드레 바쟁André Bazin과 Réalisateur(불어로 영화 감독은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들에게는 영화에 있어서 결과(작품)보다 과정(촬영)이 중요해진다. 우리는 허수아비를 세워 실제로 고통받는 이들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Real Realist인 카사베츠 또한 자신의 상황을 활용하여 비슷한 방법론으로 다른 실험들을 진행한다. 앞서 언급한 아내 Gena Rowlands와의 여덟 편의 작업 속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직접 배우를 맡기도 한다. 본인의 어머니와 장모, 심지어 자식들 모두 배우로 역할하기에, 현실 가족 관계를 다양하게 조립, 해체해 본다. 〈얼굴들Faces〉에서 직접 자신의 집을 촬영지로 활용한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프닝 나이트〉(1977)에서 카사베츠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이를 위해 영화는 독특하게도 연극, 그리고 유령을 불러들인다. 〈오프닝 나이트〉의 주인공은 유명한 연극 배우다. 그리고 한 젊은 여성 팬이 그녀를 만나려다 사고로 죽는다.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주인공은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배우로서 경력에 있어 감정적인 위기를 겪게 된다.

주인공을 맡은 Gena Rowlands가 불안정한 상태로 (영화 속) 연극 무대에 섰을 때, 그리고 그녀가 쓰러질 듯하고 마음대로 연기를 중단하는 듯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이 영화 속 주인공이 연극 도중 실수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듯 연극이 갖는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눈 앞의 배우를 기계적 복제자가 아닌 ‘살아있는 배우’로 받아들이며, 그렇기에 언제든 배우는 연극의 의도와 다른 행동을 취해버릴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성질을 강화하기 위해 주인공은 술에 취한 상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역으로 이것이 실수, 연기의 중단이 아니라 극 중 상황이었다는 것을 사후 제시함으로써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허문다. (여전히 이 모든 것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모두 의도대로 진행된 것이다.) Gena Rowlands의 극 중 남편 역할을 현실의 남편인 John Cassavetes가 맡은 것 또한 연극(영화)-실재를 뒤섞는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유령을 보는 것 때문에 심령술사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러한 허상을 만들어낸 것을 알고 있다고 시인한다. 우리는 영화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유령의 이미지를 주인공과 더불어 육안으로 확인하였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그녀가 만들어낸 완벽한 허상인지를 심령술사를 통해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끝내 그것을 알 수 없다. 요컨대 카사베츠의 작업은 꿈-연극-영화-현실이라는 내러티브적 총체들의 경계 지우기이다.

또한 카사베츠는 시나리오의 문어적, 논리적, 합리적 특성들을 지양하기 위해 연극적 방법론을 택한 듯이 보인다. 대부분의 연극은 희곡을 구체화하기 위해 수개월의 준비 기간 동안 런(리허설)을 돌리며 작품을 수정, 보완해간다. 연극은 실제로 작업 초반에 상황을 던져주고 즉흥극을 해보면서 합을 맞춰보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는 일반적으로 리허설을 진행하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약식으로 일련의 과정들이 진행되며 대부분 시나리오에 들러붙어 있다.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자신이 (배우 일을 하며) 모은 자금으로 영화를 찍은 카사베츠는 가족 같은 주변인들과 작업했기에 다양한 시도들을 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연극 연습을 하는 것처럼 상황과 인물 관계를 제시한 후 그 속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대사들을 추구했다. 그런 즉흥극을 진행해가면서 좋았던 부분을 취한다. 그렇게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현실 속 관계망을 즉흥의 망으로 포획한다. 토드 벌리너의 분석을 살펴보면 카사베츠 영화 속 대사들은 (현실적이게도) 때로 비논리적이며 각종 오류들이 난무한다.

배우가 어떤 주장을 펼친다.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대사 끝에서 자신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말을 해버린다. 혹은 대화 속에서 한 인물의 설명을 상대방이 완전히 오해해버릴 수도 있다. 일반적인 영화들에서 이런 미스커뮤니케이션은 그것이 어긋났음을 관객들에게 설명하지 않으면 실수로 치부된다. 그러나 카사베츠의 영화속에서는 이러한 일이 빈번하고,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를 예증하기 위해, 배우였던 카사베츠를 감독으로 인정받게 해 준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 〈얼굴들〉(1968)로 돌아와보자.

이에 앞서,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 영화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에 관한 예술이다. 여기에서 내용이란 단순히 서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형식 또한 촬영 기법이 전부는 아니다. 앞선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아니, 그보다는 많다고 말해야겠다. 결국 영화란 ‘어떤 삶’을 ‘어떻게 보여 줄 것인지’에 대한, 그 탁월성에 관한 것이다.

수 많은 형식들이 다시 수 많은 내용들과 연결된다. 우리는 교양 과목으로 영화를 접할 때, 특정 촬영 기법들이 특정한 효과를 낸다고 배운다. 이를테면, 매우 짧은 쇼트들을 이어 붙이면 긴장감이 생기고, 화각을 좁히면 답답해진다는 등의 것들이다. 그러나 특출난 감독들은 내용과 형식의 다양한 결합을 통해 기대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며 같은 기법들도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테면 에릭 로메르Éric Rohmer의 〈겨울이야기〉는 사건 중심 내러티브의 비현실성에 저항하기 위해 일상에서 죽어 있는 시간들을 사건의 지위로 격상시킨다. 비-사건의 중심화, 사건화. 이동 시간(잉여 시간이자 어쩌면 과정주의의 은유일)에의 집중. 그리고 그러한 내용은 삼각대 고정, 느린 팔로우, 이동 시간과 이동 시간의 몽타주(이어붙임) 등으로 구체화된다.

반면에 벨기에의 대표적인 듀오인 다르덴 형제Jean-Pierre Dardenne & Luc Dardenne는 언제나 얕은 심도의 클로즈업과 핸드헬드로 촬영한다. 〈아들〉, 〈로제타〉 등에서 그들은 소외된 자의 곁에 머무는 동행으로서의 카메라를 추구하기에, 카메라는 인물의 눈처럼 롱테이크로 터벅터벅 걷는다. 여기서 카메라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권력자가 아니고, 언제나 종종 걸음으로 뛰어가는 소외된 자들을 간신히 따라잡는 시선이다.

카사베츠는 〈얼굴들〉에서 에릭 로메르와 마찬가지로 사건 중심 내러티브의 비현실성에 저항하고자 한다. 그는 사건, 비-사건 대신 정념Pathos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위해 (다르덴 형제와 유사한) 클로즈업close-up과 핸드헬드handheld를 형식으로 취한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와는 반대로, 〈얼굴들〉의 카메라는 등장 인물들의 감정을 뽑아내는 일종의 ‘흡입기’이다. 짧은 테이크 중심의 흔들리는 촬영은 말 그대로 ‘산만하고’, 그러한 촬영은 감정의 전이적 측면, 광기와 같은 순간성,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얼굴들>의 카메라는 집요하게 ‘얼굴들’을 포획한다.

벨라 발라즈가 영화를 예술의 차원으로 옮겨 놓은 것이 클로즈업이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배우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자크 오몽은 『영화 속의 얼굴』에서 무성 영화에서 현재의 영화 전반을 다루며 그 속에 담긴 얼굴들의 양태를 면밀히 분석했다. 그는 벨라 발라즈를 인용하면서 얼굴의 폴리포니polyphony를 강조한다.

발라즈에 따르면 하나의 얼굴은 결코 완전하게 고유한 얼굴이 아니며 항상 개인에게서 유래한 것과 유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합되어 있다. 오몽은 이렇게, 얼굴이 서로 다른 두 얼굴의 중첩이고 융합이라면 전혀 다른 의미에서 복수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이중적 얼굴은 동시에 다수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다.

영화에서 얼굴은 사실들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이미 영화에서 얼굴은 이중적이다. 연극에서는 배우가 등장 인물이 되기 위해 (연기적으로) 완벽해야 하며, 개성있기보다는 무난해야 한다. 그러나 스크린에서 배우는 언제나 동시에 등장 인물이며, Georg-Otto Stindt에 따르면, 하나의 가면(인물)과 하나의 얼굴(배우)만을 표현하기 때문에 눈에 띄게 두드러진 특징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요컨대 영화배우란 태생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얼굴들〉은 폴리포니한 얼굴들을 드러내는 실험이다. 딕키와 마리아라는 미국 상류층 부부의 권태와 외도를 그린 이 작품은 지금까지 필자가 비평해온 다른 영화들이 그랬듯 대단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잘 나가는 대표이사 딕키는 친구와 함께 바에서 만난 지니와 놀다가 이내 집에 돌아가고, 권태를 느껴 집을 나간다. 딕키는 지니의 집에 가고, 마리아는 친구들과 클럽에 가 남자를 만난다.

딕키와 마리아는 권태롭다. 그들은 이를 애써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딕키가 마리아와 다툴 때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섹스머신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기계가 되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에 몸서리친다.

그래서 그들은 이에 저항하기 위해, 기계가 할 수 없는 ‘웃음’으로 무장한다. FACES, 제목이 롤업되고, 곧바로 딕키와 프레디, 지니가 바에서 만나 웃고 떠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니의 집으로 향한 그들은 아무 대화나 짓거리며 장난친다. 시덥잖은 농담에 크게 웃어젖힌다. 이는 때로 너무 과도하기에 ‘일부러’ 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딕키는 영화 전반에 걸쳐서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헛소리, 실 없는 농담, 언어 유희, 그리고 웃음에 집착한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춤 추고 노래한다. 지니와의 하룻밤 후 그녀가 몰래 눈물 흘릴 때 먼 곳에서 그녀를 불러낸 딕키가 ‘간장 공장 공장장—’ 식의 언어 유희를 뱉어 내는 것은 이러한 집착을 예증한다. 일상에서의 무거운 주제들(정치, 이념, 동물권, …) 또한 농담에 포섭되어 그 지위를 박탈당한다.

그는 마치 해도 될 고민따위는 없다는 듯이, 모든 것을 웃음으로 승화하고 깎아 내려 천박한 것들로 만들어 낸다. 그는 기껏해야 웃는 기계이다. 그가 지니를 다시 찾아갔을 때, 지니는 진지하게 왜 자기를 다시 찾아왔는지 묻는다. 딕키는 ‘나는 당신과 놀고 싶을 뿐이야.’라고 말한다. 이후 지니가 딕키를 껴안으며 당신은 내 마음을 흔든다고 진심을 표현할 때, 딕키는 ‘You Kill Me’라고 말하며 노래 틀고 춤 출 뿐이다.

마리아 또한 삶의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 이러한 웃어젖힘에 기꺼이 동참한다. 딕키,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너무나 깊게 웃고, 그 웃음은 주변으로 쉽게 전이된다. 웃음은 지속되지만 각각의 웃음들은 너무나 순간적이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얼굴들을 따라다니며 웃음을 좇고, 때로 빠른 전이들로 인해 초점 나가거나 흔들거린다.

우리가 크게 웃을 때면 몸이 떨리고 초점은 나가버린다. 그것은 놀랍게도 불안의 성질과 너무나 유사하고, 이것을 발견한 카메라는 웃기 위해 벌린 입에 불안을 욱여넣는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열심히’ 웃는 자들의 수단일 뿐이기에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이 없다.

영화 속 상황들은 늘 술과 함께하며, 그만큼 비논리적 대화들이 오가고 언제나 웃는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문제가 될 법한 말들도 웃어 넘긴다. 반대로 어떠한 것이든 웃음을 촉발해낼 수 있었듯이, 별 일 아닌 것에 그들은 정색하고, 화내고 눈물 흘린다. 흔들리는 클로즈업에 담지된 불안. 그것은 분노와 눈물의 예감일 것이다.

딕키는 담배도 채워두지 않고 영화보러 가자고 재촉하는 마리아에 싫증을 느끼고, 마리아는 밥이나 차려달라고 하는 딕키에게 화가 난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주고 받으며 웃음으로 넘기다가 임계치를 넘으면 정색한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웃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얼굴에 주름을 새기고 침전물처럼 남아있다. 딕키와 마리아가 언쟁한 후 마리아가 침실로 올라간다. 딕키는 그녀를 따라가다 말고, 당구대에 굳은 표정으로 멈춰선다. 싸움이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Cut to.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둘이 농담하며 웃는 쇼트가 붙는다. 한참을 웃다가 가벼운 말로 상처입는다. ‘잘 자.’ 뒤돌아 누운 서로의 얼굴은 잿빛이며 표정에 담긴 고통을 카메라는 기어이 Zoom In하여 밖으로 내놓는다.

연속적인 짧은 쇼트들과 줌인 기법은 양립 불가능하다. 줌인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산만하던 광기의 카메라가 갑자기 멈춰 서서 천천히 줌인해 들어갈 때 우리는 정서적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특히 줌인은 광학적으로 다가감으로써 화각을 조절하게 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클로즈업은 좁아진 화각으로 인해 점차 흔들리게 된다.

지니가 딕키로부터 식사와 담배에 대한 면박을 받고 헤어짐을 예감하여 눈물 흘릴 때, 클로즈업이 얼굴 자체를 흔들어 정념의 알갱이들을 털어내는 것만 같다. 카사베츠는 이러한 순간을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에 비유한다.

마리아가 바에서 만난 체트와 하룻밤을 즐기고 수면제로 자살을 기도했을 때, 이것은 얼굴에서 모두 예견된 것이다. 체트는 딕키처럼 언제나 웃고 농담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딕키와 달리 ‘젊고’ 마리아를 ‘사랑한다’. 지니가 딕키의 말들에 상처입고 눈물 흘린 것은 딕키를 사랑해서이다. 체트의 웃음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젊음이 소유하고 있는 여유이다. 그는 다른 감정들을 숨기기 위해 웃지 않는다. 마리아에게서 눈물이 터져나왔을 때 그는 방방 뛰고 박수치며 말한다.

— 그래 울어! 그게 사는거야. 눈물은 행복이라구. 어서 울어.

터져나오는 눈물, 터져나오는 감정을 애써 숨기는 것은 바보 짓이다. 웃음은 행복이고, 눈물은 슬픔인가? 우리들의 감정(내용)은 육체(형식)와 다양하게 결합할 수 있고, 정답은 무수하다. 〈얼굴들〉에서 눈물은 (진실하기에) 행복이 되고, 웃음은 슬픔이 된다.

별 다를 것도 없는 권태 속에서 딕키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춤추고 노래하며. 딕키가 침실로 들어가고, 체트는 유리창을 통해 도망간다. 마리아의 얼굴에는 번진 화장이 눈물 자국을 만들어냈다. 또 다시 굳어버린 것들. 주름들, 안면 근육과 감정들. 마리아와 딕키가 계단에 앉아 담배를 나눠 피운다.

각자 다른 높이에 앉아 담배와 라이터를 주고 받을 때, 영화는 갑자기 너무나 인위적인 냄새를 풍긴다. 마치 연극처럼 마리아가 자세를 고쳐 앉고, 딕키가 같은 자세로 고쳐 앉는다. 또한 풀샷으로 거의 흔들리지 않게 찍힌 라스트 쇼트는 아예 고정되어 버릴 것 같고, 실제로 프리징되며 엔딩 크레딧이 나타난다.

굳어버린 화면. 영화는 권태를 벗어나고자 했던 그들의 하룻밤을 완벽히 허구로 만든다. 영화가 진행되며 잊고 있었지만, 첫 시퀀스의 이질감이 우리에게 되살아난다. 리차드 포스트(딕키)가 계단을 내려와 프라이빗 시사회 장에 들어간다. 권위적인 자세의 딕키는 비서로 보이는 여자들의 수발을 받고, 이윽고 관계자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이제 곧 시사할 영화에 대해 얘기한다.

— 이번엔 우리한테 뭘 팔 거죠, 해리?
— 돈이죠.
— 그거 아주 좋은 영화예요.
— 그걸 뭐라고 하냐면…
— 상업적인 “돌체 비타”!

영사기가 돌아가고 〈얼굴들〉이 시작된다.

결국 상업적으로 칭해진 〈얼굴들〉은 사람들의 바람을 보여준 것뿐이다. 혹은 동명으로 나오는 배우 딕키를 위해 차려진 허상이다. 삶의 권태를 벗어나고자 감정을 숨기고 표면적으로 웃음만을 영사하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크게 웃고 크게 울자. 다만, 솔직해지자. 우리의 얼굴들은 이미 알고 있으니.


참고문헌
— 앙드레 바쟁. (1945)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 앙드레 말로. (1939) “영화의 심리학 개론”.
— 벨라 발라즈. (1930) “영화의 이론”.
— 자크 오몽. (2006) “영화 속의 얼굴”. 이형식 옮김. 동문선.
— 자크 오몽. (1986/1987) “멈추지 않는 눈”. 심은진, 박지회 옮김. 아카넷.
— Todd Berliner. (1999) Hollywood Movie Dialogue and the “Real Realism” of John Cassavetes. Flim Quarterly.

밤비
tpdyd83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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