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코로나19는 연결성을 드러냈다. 타인과 같은 공간에 있었거나 스쳐 지나갔을 수 있었던 가능성이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겨졌던 적이 없었다. 확진자 동선 공개는 사회의 곳곳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단순히 같은 장소와 때에 머물렀다는 가장 낮은 차원에서의 교류가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생계를 위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데 도시의 특성상 부대껴야 하니, 타인의 감염이 나의 건강에 곧바로 직격탄을 날릴 위험이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감염자의 숫자가 불어나는 건 나와 내 가까운 이들의 생명에 직결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상호 간의 의지와는 상관없겠지만, 가까이에 위치한 타인이 나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의식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도시 내의 연결성을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가시화해왔다.

코로나는 또 죽음이 보다 분명해진 가능성으로 다가왔다는 점을 보여줬다. 자연스레 늙어가는 게 생각만큼 보통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감은 (불공평하게도 이미 앓는 병이 있던 자들에게 더 가혹했지만) 젊은 층에게도 얼마간의 경종을 울렸다. 실상 죽음을 매일 생각하며 살아가는 건 의학적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난 행동일 것이다. 원거리에 도래할 죽음을 인지하는 것이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선이라 루소가 말한 적 있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그 이해를 실제적으로 느끼기를 미뤄놓은 채, 당분간은 지금의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현재를 영위하고 미래를 준비한다. 하지만 재난은 인간 존재 자체의 궤멸이 영화가 아니라 현실로 도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내 순번도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닥칠지 모른다는 통찰을 코앞에 들이민다.

Disaster is unfolding. Discursive catastrophization seeks to trace its patterns of expansion and to help contain it and mitigate its effects. Disaster is protracted and it’s not perceived or experienced as such. Discursive catastrophization seeks to draw attention to the protracted deterioration in the living conditions of a given population, in a given area, to articulate this deterioration as a potentially catastrophic process, and to cope with its results.

Ophir p.69

요즘 많은 코로나 사태 관련 글이 발행 직전 업데이트 된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거론하며 시작하는 것 같다. 규모에 대한 경각심과 논점의 중요성을 거대한 숫자에서 오는 설득력에 기대어 이야기하고자 함일 것이다. 하지만 재난은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다. 재난은 이전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종결된 이후에도 피해를 지속시키는 여파가 존재한다. 이 글은 이번 사태가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취약성을 가시화하기도 했지만 끝난 후에는 우리에게 새로운 일상을 가져다 줄 도약의 여지도 있다는 걸 얘기하려 한다. 숫자로 호명해서는 안 되는 지점을, 재난을 맞이한 상황에서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지평을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명과 비상상황

왜 우리는 죽음을 끔찍해하고 사망자를 최소화하려 하는가? 가장 간단하게 생명은 삶의 기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 유기체가 생동하는 걸 강조하는 것도 새삼스럽지만 그 조건이 부여되고 소실되는 과정을 인류는 아직도 전부 알지 못한다. 한 생명이 떠난다는 것은 그 생명이 향유할 수 있었던 모든 시간이, 관계 맺고 창출하고 보탤 수 있었던 변화의 기회가 소실된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단순히 그 사람이 어떤 문화권에 속했고 얼마나 많은 이들에 의해 사랑받았는지, 어떤 경제적 가치를 산출해낼 수 있었고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와 상관없이 생명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담론은 인도주의적 계몽주의의 발전과 지배로 공고하게 자리잡았다. 전쟁이 테러리스트들의 폭압에 고통받는 주민들의 생명을 위함이라 정당화되고 실제 전쟁의 발발과 사상자 수도 60여 년 간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기록할 수 있었던 범위 내 역사를 기준으로, 인구 비례를 고려했을 때)해 왔다는 걸 보면, 생명에 대한 존중은 실현 방법에 있어 입장이 달라질 수는 있어도 그 전제 자체의 옳음은 이미 인정되어 있는, 일견 양 진영에 의해 동시에 활용되는 가장 거대한 논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확산 초기에는 생명 존중이 아무리 잔인한 억압을 재생산하는 구조라고 해도 생명이 일차적인 이윤 추구보다 앞선다는 걸 알려 준 케이스로 이 사태를 해석할 여지가 있는 듯했다. 아직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이었는데도 디즈니월드가 문을 닫고 재택근무가 시도되는 걸 보면, 개별적인 생명의 독특성이 아니라 도구적인 차원에서라도 (예비)소비자는 보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있는 듯 보였다. 최소한의 목숨 부지가 이윤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국가 제재를 곧바로 맞받아칠 수 있는 기업은 없지만, 바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 기업의 선호는 뒤바뀐다. 생명 유지는 사회의 기본을, 즉 자본주의가 영속하고 성장이 계속되는 기반을 유지하는 일차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생명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여러 취약한 구조 속에서 인구의 다수가 얼마나 비균일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는, 자본주의 밖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된다. 그건 현재 재난의 상황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비상사태 자체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단현이 앞선 글에서 짚어냈듯 비상의 언어가 계속적으로 강조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험과 위급성은 잔존하는 형태로) 대상을 조금씩 달리해가며 되풀이되었던 현상이, 미국에서는 9.11을 시발점으로 위험 극복의 수사와 위기를 뛰어넘는 성장의 언어로 풀이되어 왔다.

Resilience demands our disavowal of any belief in the possibility to secure ourselves and accept that life is a permanent process of continual adaptation to dangers said to be outside our control.
회복성은 우리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기를, 그리고 삶은 영구히 우리 통제 밖에 있는 위험에 대한 계속적인 적응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

Evans & Reid. 위 역은 필자

성장을 위해 위험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차원에서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허들은 조금 더 높아진다. 두 저자는 위험 상황에서의 회복력이 신자유주의적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가 되었음을 설명한다.

나병철의 삶정치 부분(p.41)을 인용하며 설명을 덧붙이자면, 자본주의는 극도의 합리성으로 작동하는 순간 그 과정에 도전하는 모든 것을 쳐낸다. 이처럼 상품화(“Thing-ification”)의 규율, 그리고 사물에 적용되기 적합한 극단적인 효율성의 가치가 인간에게 극단적으로 적용될 때 죽음정치의 문제가 드러난다. 우선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각자 부여받는 가치에 따라 다르게 내재화된 규율에 각각 포획된다. 높은 가치를 생산한다 여겨지는 자들의 경우에는 무한경쟁 속에서 스스로가 부과하는 성취에 대한 압박이, 그리고 그 과정을 긍정의 담론으로 승화해내야 하는 피로사회 차원에서의 상품의 원리가 체화되겠지만, 이러한 비상상황에서 스스로를 격리할 수조차 없이 생계로 내몰리는 공장 노동자나 하청업자, 대리적 서비스 노동자들은 신체와 생명이 소모품처럼 처분 가능해져 언제라도 죽음에 이를 위험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후자에 집중하는 죽음정치의 개념은 손상된 상태(state of injury)에 놓인 그들의 생명을 죽음에 이르도록 착취하며 쓸모가 없어진 생명을 유기하는 일련의 권력작용을 의미한다. 시장이 탈정치화되어 순수성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는 다르게 자본주의의 작동에는 그 자체의 원리가 아니라 죽음정치가 놓여 있다. 죽음이 생체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호명되는 문제인 만큼 자본주의적 성장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중립적인,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이상향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유지되는 비상상황은 자연스럽게 개인이 자기 삶을 꾸려갈 권리를 비상상황에서의 탈출을 인도할 존재에 양도하게 한다. 양도 이후에 남는 건 생명에 대한 집착이다. 근대국가의 대표적인 권력작용으로 부상한, (푸코가 삶정치라 명명했던) 인구에 대한 관리는 재난 이전에도 일상 속에서 기능했다. 하지만 전시에는 우선적으로 생명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 많은 권리가 일시적으로 제한되고 그 제한을 틈타 한 번 꾸려진 감시체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아, 보다 노골적인 작용도 정당화된다. 예컨대 9.11 이후 급격하게 높아진 공항에서의 감시체계 수준이 표준으로 자리 잡혔고, 중국 공산당은 현 사태를 틈타 고도화된 감시 체계를 더 널리 정착시켰으며, 최근 헝가리 총리는 국가비상사태를 무기한 선포할 권력을 법제화했다. 생존이 먼저라는 생각이 단단히 뿌리내린 다음엔 삶의 질이나 권력이 작용하는 과정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건 부차적인 가치로, 최소한의 기반부터 다져지고 난 다음으로 미뤄지기 때문이다. 비상상황이 타개되지 않았다는 조건 하에서 위험의 잔존 강조는 효과적인 통치의 전략으로 쓰인다. 결국 이를 통해 리바이어던의 집권이 반영구적으로 계속된다. 이게 일차적인 재난의 여파다.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작용이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것만 빼면, 규율권력의 논리는 아직도 가장 직접적이고 명확하며, 그에 대한 저항도 즉각적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만큼 더 쉽게 상상하고 사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는 면에서 그 위험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더욱이 안전을 이유로 국가가 얼마나 개인을 밀착 감시할 수 있는지를 너무 쉽게 행정적 차원에서 결정해버린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생존 그 자체에만 방점이 찍히게 되면 나의 생존 자체가 담보되지 못한 상황에만 몰두하게 되고, 이는 아비규환의 필요조건으로 기능한다. 나에게 있는 모든 종류의 힘을 발휘해 나와 내 식솔의 생존을 연장할 권리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나의 불안을 일으킨 존재를 특정해 공격하는 것으로 무력감이 일부 해소되며 상태의 종결이 선하고 긍정적인 가치로 규명된 만큼 혐오는 묵인을 넘어 정의가 된다.

이처럼 최초의 사회계약이 가장 기본적인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게 되면 자연 상태에서처럼 스스로 생존을 추구할 권리가 정당화될 것인데, 이러한 자기 보호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차이는 사회계약 이전 자연 상태에서의 신체적, 지능적 차이와 같은 개인적 불평등 정도를 훨씬 넘어서서,  비상상황 이전의 사회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상태가 그대로 넘어와 정착된다. 생존을 추구할 수 있는 역량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정도에서도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자기 보호의 강조는 왜 일전의 혐오가 현 상황을 맞아 더 노골적으로 터져 나오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 미국의 지도자처럼 일부 권력자가 책임을 피하려고 기름을 붓고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다른 정부 하에서도 혐오는 최소한 묵인되거나 외면되고 있다. 이는 일상에서 명목적인 차원에서나마 유지되던 넓은 공동체의 개념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미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느끼고 있던 주변부의 사람들에겐 경쟁에서의 불이익이나 기회의 제한 등 추상적인 차원이었던 문제가 보다 신체적으로 체감되는 공포와 배척으로, 좀 더 일상으로 바투 다가온 셈이고, 인종차별 등은 사라진 게 아니냐는 환상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그들의 일상이 깨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일전에도 동질감으로 대해지지 못했고 넉넉한 상황에서 선심으로 도덕적 고매함을 드러낼 대상으로서나 기능했던 집단이나 평소에도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피 대상이었던 집단이 너무나도 쉽게 바이러스의 근원으로, 혹은 전파자로 구분되어 호명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게이 클럽이 유독 이슈화되었던 사건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던 현상이라 하겠다.

안보

안보를 새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힘와 안보의 분리는 1945년 핵무기의 등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전 현실주의의 주장과는 다르게 힘의 우위가 안보를 더 이상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단순한 한 번의 실수도 인류를 멸망시킬 위험이 있다고 간주되는 새로운 세계에서 국가들은 위험으로 안보 체계를 쌓아 올렸다. 사람들은 가장 근본적으로 민간인의 생명을 담보로 한 한시적 안정의 유예 속에서 살았다. 부연하자면, 내가 방어체계를 구축하게 된다면 내가 선제적 공격을 했을 때 상대 측에서 반격할 2차적 공격에 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논리로 내가 공격할 이유가 충분히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에 상대방은 큰 위협에 상시 노출되게 된다. 이 때문에 냉전 핵경쟁 당시 대외정책을 견인했던 전통 이론(classical theory)에 따르면 상호 확증 파괴(MAD)에서 도출되는 핵억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측도 무기와 기지 보호를 능가해 도시 전체나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방어체계를 구축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시대가 지나며 단순히 핵탄두의 소지만으로는 억제가 힘들다 인식되기 시작하며 탄두를 실어 보내는 여러 방안을 고안하는 데에서 다시 군사경쟁이 촉발되게 되었지만, 핵무기 보유 사실이 국제사회에 안보 불안감을 터뜨릴 수 있는 폭발력은 아직 건재하다.

코로나19의 출현과 이러한 범국경적 전염병이 앞으로 주기적으로 발생할 거라는 전망은 단순한 힘과 안보의 분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안보의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지금껏 안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켜야 할 존재와 맞서 싸워야 할 존재를 뚜렷하게 밝히는 일이었지만, 이 “전쟁”에선 ‘적처럼 보이는’ 존재까지도 지켜야 원래 ‘마땅히 보호받아야만 하는’ 존재들까지 지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뚜렷한 선을 긋는 행위는 오히려 위험성을 품고 있는 개인들을 집단 속으로 숨게 만들어 방역에 악영향을 끼친다. 공권력이 들어가기 전까지 신천지가 그랬고 정체성이 밝혀질까 검사 받기 두려워했던 퀴어 커뮤니티가 그랬다. 기한 없는 백신의 도래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우리”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쉽게 적으로 돌리지만, 이러한 행동은 무력감을 잠재우거나 정의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상황 해결을 방해했다. 단순히 탑다운으로 명령을 내린 후 따를 수밖에 없게끔 형법적인 강제를 부여하는 대신, 왜 나오려 하지 않는지에 대한 고심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여론몰이가 한 차례 벌어지고 나서야 실행된 거라 한 발 늦은 움직임이긴 했지만, 서울시가 익명검사를 도입한 직후 검사자가 하루 만에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을 봐도 그러하다 (5/12 한경).

“우리”를 지켜야 하는 국가책임이 여력 부족으로 인해 어떠한 선 안으로 한정되는 경우 그 선 안에 포함되는 사람들에겐 얼마간의 심리적 안정감이 부여될 것이나, 그 선이 문화와 역사에 의해 작위적으로 그어진 것인 만큼, 선 외부의 사람들에 의해 얼마든지 다시 위험이 선을 넘나들 수 있다. 선 안팎 사람들의 생명에 차등을 두는, 위험의 타개가 아닌 명백히 “잘못된” 행위를 하고서도 국가가 책임을 다했다고 칭찬받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일례로 마스크는 가장 주요한 방역 대책 중 하나였고 공적 마스크 배분 정책은 결정 과정 하나하나가 큰 화제였지만, 4월 20일이 되어서야 외국인에게도 구매가 허용되었다. 한국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같이 거주하고 있지만 건강보험 가입이 차단된 이주민들, 즉 유학생, 난민신청자, 미등록 외국인 등을 포함한 약 46만 명에게는 기초 방역 물품의 구입 기회가 첫 시행일인 3월 9일으로부터 약 한 달 반 동안 차단되었던 것이다 (4/28 어필). 결국 재난을 맞아 각자가 생각해오던, 사회가 최우선으로 구성원 삼았던 “우리”의 선이 더 가시적으로 변했지만, 이번 재난은 바이러스라는 적의 성격상 선 안 주민들의 안위를 위해서도 선 밖을 챙길 수밖에 없게 만든다. 최소한 내가 안전하기 위해서라도 요양병원이나 콜센터 등 약한 고리에 대한 사회적 집중이 논의되고 조금 더 거시적으로는 불평등이 본인 생명에 미칠 수 있는 실제적인 영향을 고려하게 된다는 말이다. 타인의 취약성이 나의 취약성으로 전이될 가능성의 온상을 이룬다는 사실이 명료해질수록 논의가 증폭될 여지가 생긴다.

애도

애도가 그 논의의 구체적인 방안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정해진 끝 앞에서 아무도 그 다음을 밝혀내지 못한 선을 넘어버린 이들의 삶을 기억하는 행위는 결연함을 부여하고 슬픔의 결이 같을 때 이어지는 공감을 불러와, 결국 정치성을 태동하기 때문이다 (문강형준 2015).

집단적 상실의 경험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이는 집단적 우울감과 같은 부작용을 가져온다 (5/26 YTN). 더욱이 사망 직전 모두로부터 격리되고 시체도 화장되는데다 추모를 위해 모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보건복지부는 코로나19에 감염돼 사망한 시신은 유가족 동의를 받고 우선 화장하고, 장례식은 그 뒤에 치른다는 지침을 발표했다 (2/24 연합). 시신은 추모의 대상 이전에 감당이 어려운 의학 폐기물로 전락했다. 한계선을 넘어선 뉴욕시에서는 인근 하트섬의 무연고 묘지에 시신을 무더기로 가매장하기도 했고 시내에서 시신이 무더기로 실린 임대 트럭이 발견되었다는 소식도 최근 보도되었다. 한국에서도 시신이 음성 판정을 받았는데도 장례식장에서 거부당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통상적으로는 희생자 수가 쌓여 “상식”의 선을 아득히 초월했을 때에만 공적인 관심이 쏟아진다. 아주 안타까운 일이지만 관심 자체가 자책과 애도의 시작인 만큼 이건 그 다음 단계를 열 수 있는 기회다. 애도는 행위의 성격상 중단이고 되새김이다. 죽음에 대한 상기고 그 앞에서 명확해지는,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소환하는 절차다. 어원상 무엇이 촉발했는지에 대한 불명확성을 나타내는 우울감에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는 슬픔으로, 이러한 상황이 촉발된 데에 대한 분노로, 그리고 끝내 행동으로 치환될 수 있는 과정이다. 이건 바이러스의 침투를 가능하게 한 상황이 어떠했는지, 누가 더 감염되고 누가 더 죽어가는지, 결국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곱씹게 하고, 이 모든 것과 얽힐 수 있었던 나의 취약성을 떠올리기에 더없이 적합한 환경을 조성한다.

맞서 싸워야 할 적이 건재한 상태에서 죽음은 일상의 일부가 된다. 전쟁 중 병사는 애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긴급피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의 업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한편 민간인도 애도를 눌러 삼킨 채 죽어라 피해야 할 위험을 우선 정신없이 넘겨야 할 뿐이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야 죽음의 가치는 선별적으로 부여되어 넋이 기려지고 그에 맞춰 사회는 재건된다. 이건 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환경에서조차 생명의 가치가 사실상 동일하지 않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 준다. 주디스 버틀러는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인용해 애도가능성의 차등적 배분을 짚어내는데, 공적으로 애도받는 인간의 표상이 규범에 맞는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한 배타적인 관념을 생성해 유지한다고 밝힌다 (p13). 애도는 결국 산 자들이 어떻게 그 이후의 삶을 꾸려 나갈 것인지에 대한 행동 반경을 제시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특정한 인생이었어야 애도 받아 마땅하다며 사회적으로 범위를 정해 넣는 행위는, 애도의 상황을 전환시킬 수 있는 거대한 에너지를 박탈한다. 공적 영역은 일부러 비가시화된 것들로도 구성된다. 그래서 공식적인 상의하달식 애도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서의 보편적인 애도의 도입은, 사회에서 생명의 가치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다.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하는 능력이 폭력에 맞서기 위해 중요한 이해를, 낙인 없이 견해를 밝힐 수 있게 하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사람들에게 공적 시야를 부여한다 주장한다 (p18). 그리고 이런 시야는 이전에 죽음으로만 주목받았던 자들의 위상을 변화시켜, 죽지 않은 상태에서도 비로소 목소리가 들리게끔 하는 힘을 부여한다.

공통적인 취약성의 자각은 이 안에서 느끼는 고독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고독의 일시해지를 가져온다. 연대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재난이 지속되는 동안이 각자도생의 버튼이 눌리는 시기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취약성의 자각은 공포와 배제 대신 반대 방향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다. 생지옥일 거라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도움이 오가고 있던 물자 도착 전 재해 현장의 숱한 사례가, 혹은 기꺼이 자원봉사를 하러 떠나는 이들이, 이 잠재력을 증명한다. 개개인의 서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지금 이 싸움을 하고 있는지, 다음 재난에 맞서서는 어떤 상황을 조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력은 지금 열릴 수 있다.

앞서 논한 대로 죽음의 숫자가 쌓이기만 하면 사람들은 우선 타개되어야 할 중요한 지점을 스스로 검열하게 되고, 사회는 꺼지지 않은 생명 이상의 가치를 얻지 못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이 살아질 수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다음 죽음이 도래할 때까지 잠시 다시 묻힌다. 죽음에 무덤덤해지지 않고 몇 십만 명 단위로 쌓여 가는 사망자 수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는 걸 느끼기 위해서는, 이번 재난으로부터 특정 정권이 아니라 나를 지키고 이번 사안 이전과 이후의 재난의 여파로 얼룩진 일상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애도가 필요하다. 개인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비극을 비극으로 볼 수 있도록.

마무리

재난이 가져오는 공포와 죽음 그 자체 앞에서는 모두가 인간인고로 평등하다. 하지만 그게 일상에 스며드는 방식은 원래의 권력구조를 더 공고하게 보여주기만 할 따름이다. 그저 당도한 죽음이 그리고 멸망이 모두에게 선명해졌을 뿐, 재난의 적용은 기존의 간극에 의해 먼저 쓰러질 도미노를 정한다. 이미 이전의 재난을 몇 겹으로 맞닥뜨리고 있던 사람들이 감염되기 더 쉬운 환경에 노출되는고로, ‘우리’의 매일을 채우느라 안그래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던 그들의 미래마저 뭉텅 끊기고 말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정작 시스템의 유지는 존재감 없고 대체 가능한 이들이 지탱하던 하부에 의해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재난 다음의 사회에 대한 예상이 범람하는 가운데, 무엇보다 이 재난이 다른 재난처럼 사건 자체가 지속되는 동안을 넘겨 존속할 것을 예상하고 재난화(catastrophization)​*​의 논리를 직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Vasquez-Arroyo의 재난이론은 이 과정을 명확하게 짚어낸다. 과거에 발생한 재난에서 교훈을 얻겠다며 돌아보는 행위가 미래에 도래할 재난을 막겠다는 명목 하에 재앙적인 현재를 가리는 방식으로 자칫 작용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객관적인 재난의 경위를 거쳐 발생한 “사건”은 그 여파를 줄이기 위한 폭력적인 권력 작용을 정상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사건 자체의 거대한 스케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수직선이 정상적인 상태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시야를 가린다. 하지만 사건을 태동시킨, 재난 이전의 문화, 정치, 경제적 상황이 존재하며 재난의 여파와 결과는 재난 직전의 상황에 의해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재난을 논할 때는 발생한 사건 자체뿐 아니라 그 사건을 재난의 위치에 놓은 좌표평면을 알아야 한다. 이게 사건과 여파가 “재난화”의 과정으로 엮이게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Vasquez-Arroyo는 재난의 상황에서 누가 재난을, 무엇의 이름으로 누구에게, 어떤 정치적 목적을 향해 발행하는지가 중심적인 정치적 질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취약성에 대한 고찰이 우리의 탈정치화된 구조를 다시 정치적 바탕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타인의 취약성을 슬퍼한다는 점에서 애도는 정치적 행위다. 단순히 사랑받던 가족의 일원, 근로하던 산업의 종사자처럼 판에 박힌 국가주의적인 프레임을 경계하면서, 숫자로 스러져 간 이들을 그들의 삶의 궤적 속에서 추모할 때, 우리는 이런 정치적 질문을 직시할 추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 위기가 조속히 타개되기를 염원하는 동시에 우리가 바라야 하는 “이전”의 상태는 왜곡된 그 시점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가장 취약한 자들에게는 이전의 일상이 이미 항상적인 위기 상황이었음을 인식하고, 폭넓게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 만큼 공동적인 취약성의 자각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다. 또 다른 비상상황을 보다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우리의 일상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비상화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균열이 벌어진 틈은 새롭게 맞춰 끼울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도 할 것이다. 역사의 분기점은 현 상황이 영구히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데에 대한 강력한 자각이 집단적 경험으로 이루어질 때 만들어진다. 현재 상황 중에서 우선시하는 것들이, 논의되는 것들이 이 다음 살아남은 자들이 살 세상을 구성할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구체적인 방안을 힘껏 상상해야 한다.


  1. ​*​
    Catastrophization의 번역. Adi Ophir에 의해 자연적, 인공적 요소가 협업해 사건에 대한 절망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과정으로 정의되어, 실제 사건의 객관적인 조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 이를 정당화하고, 완화시키며, 유예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칭한다. p743, 2013

Bibliography

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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