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하니 몰래) 본 섹션에서의 기획에 독자적인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신학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이는 최근 《셋잇단음》에 실은 나의 글, 〈참을 수 없는 실재의 공허함〉의 말미에 제기했던 나의 물음과도 관련된다. 그 물음이란 바로 다음이다:

어떻게든 실재를 공허하지 않게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앞 문단에서 예를 들었던 방식들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론적 양화를 선호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색이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잔인하다. 여러 방식의 주장 가능성은 열어두되, 그 중 하나의 방식만을 채택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정, “참을 수 없는 실재의 공허함”, 응답글, 셋잇단음Triplet 2020년 3-4월 특집, 지평.

우리는 양립 가능한 다수의 형식 체계를 갖는다. 그리고, 특히나 그 복수의 체계들이 동일한 사건 유형에 대해 똑같이 잘 기능하는 경우들을 갖는다. 대부분의 존재론적 논쟁에 이러한 경우들이 있다. 보편자 실재론과 반실재론(들), 시간에 대한 영원주의와 현재주의, 양화에 대한 집합론적 접근과 부분론적 접근 등이 그렇다.

종교에 있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여러 교파의 병존은 동일한 상징체계에 있어 다수의 해석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조계종과 천태종, 웨슬리안과 칼비니안, 수니파와 시아파 등 한 종교 안에서 경합하는 여러 해석 체계에 있어, 둘 중 하나가 명백히 비정합적이라는 증거는 없다. 심지어 동일한 종교적 현상 내지 체험에 있어 각 종교들이 같은 방식으로 경합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생기는 질문이 이런 것이다. 왜 어떤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나의 체계로 삼는가?

다른 종교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신학의 한 분야를 ‘종교신학’이라고 부른다. (레이스Alan Race가 맨 처음 정교화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구분에 따르면, 종교신학적 입장은 셋으로 구분된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 그 중 다원주의는 세세하게 다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 중 내가 본고에서 짧게 고찰하려는 것은 첫째 유형이다.

배타주의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다른 종교가 아닌 바로 이 종교(그리스도교)를 유일하게 참된 종교로 여길 좋은 이유를 갖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맥그래스(McGrath 2001)은 배타주의를 지지할 근거를 둘로 언급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의 권위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구현이며 자기 계시이다.”(McGrath 2001, 42) 이로부터 우리는 “기독교는 세계의 종교들 가운데서 유일하다”(McGrath 2001, 29)는 것을 또한 주장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기독교 신앙은 오로지 인간의 종교성이 아닌, 역사 속에서 주어진 특수한 사실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관한 사실에 근거하며, 따라서 종교성을 해명하는 여타 종교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으로서 성서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 수 있다”(McGrath 2001, 60)는 것이 복음주의자들의 두번째 근거이다. 복음주의자들에 따르면, 오로지 성서를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를 메시아로 보는 신앙에 정향한다. 성서는 따라서 설령 그것이 문화적 배경이나 우리의 주관적 결단에 의해 신앙의 근거로 삼아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독점적 권위를 갖는 계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므로, 배타적인 지위를 갖는 그러한 문헌이다.

이 두 근거에 관한 배타주의자들의 정당화는 내가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하나의 방식만을 채택하는 … 근거”(여정 2020)가 어떻게 한 체계를 독점적으로 올바른 체계라고 주장하게끔 하는지 보여준다. 단지 형식 체계로서는 포착되지 않는, 체계들에 있어 편향적인 어떤 사실이 있고, 그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른 체계가 아닌 바로 특정한 체계를 따를 좋은 이유를 갖는다는 것이 배타주의자들의 논거이다. (이 “배타주의”는, 그리스도교에 있어 그것의 근거가 되는 계시를 곧 ‘복음’이라고 부르곤 한다는 이유에서, ‘복음주의’라고 불리곤 한다.)

어떤 특정한 사실 내지 사건을 계시적이라고 부르는 일 없이 복음주의가 지지될 수 있을까?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그런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동일한 비구조적 사실에 관한 복수의, 표면적으로 양립불가능한, 기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해 우리는 그를 민족 지도자로도, 혁명과는 거리가 먼 도덕 교사로도, 오로지 종교적인 데에만 심취한 선지자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로지 형식적인 이유로부터도, 그를 하느님의 독생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다수의 해석 중 무엇이 옳은지를 지지할 근거는 오로지 형식체계들의 경합 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체계 바깥에서 한 체계를 지지할 그러한 토대가 있어야만 특정 체계를 배타적으로 옹호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토대가 없다면 기껏해야 우리의 주장들은 체계의 정합성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합적인 체계는, 늘 그렇듯 여럿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복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한다면 외재적 토대란 필연적이다.

하지만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토대가 진정 외재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토대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알 수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한 체계를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그것을 알 수 있다면, 이 토대라고 불린 것은 다름 아니라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그런 것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이 질문은 다름아닌 토대의 존재 여부, 계시의 정당화 여부에 관한 물음이다. 토대주의자들의 딜레마란 늘상 이런 식이다.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거나 자기정당화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정당화하는 토대는 우리에게 큰 지식을 주지 못할 것같다(분석 명제들이 으레 그렇듯). 그렇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텐데, 정당화될 수 없는 토대를 신뢰한다는 것은 오로지 규약 또는 결단의 문제인 것 같다. 짓궂은 회의주의자가 다가온다면 우리는 다시 배타주의 대 다원주의의 토론장에 떨어지고 만다.

여러 글들에서 드러낸 바 있던 나의 문제의식이란 지금까지 상술한 것이다. 나는 아직 이 안에서 빙빙 돌고 있다. 다원주의를 허용하지 않으려면 토대를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 토대를 그 자체로 긍정할 방법은 도저히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다원주의의 비판자는 회의론자들에게 취약해지는데, 이는 애초에 토대주의가 희구했던 바와는 거리가 먼 상황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마냥 다원주의를 옹호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 무제한적 다원주의는 사실 무의미한 지껄임에 불과하며, 많은 비판자들이 논증했듯 그 자체로는 비정합적인 주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원주의가 정합적이려면, 다원주의자 역시 최소한의 토대를 허용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한 논증을 여기에서 하지는 않겠다.) 모든 것을 근거 없는 것으로 긍정하는 태도는 어떤가? 나는 (오늘날 횡행하는 것 같은) 그러한 태도는 반지성적이며,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일단 나는 국지적인 데에서부터 딜레마를 차차 해소해 가는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총체적인 차원에서 딜레마에 답해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 때에 답을 주는 것이 정말로 핵심적이며 궁극적인 철학적 과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이 딜레마에 잘 답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참고 문헌

  • 여정. 2020. “참을 수 없는 실재의 공허함”, 응답글, 셋잇단음Triplet 2020년 3-4월 특집, 지평.
  • McGrath, Alister. 2001. 『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김선일 역). IVP. (원, 1996).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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