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진국 되기’라는 국가적 욕망

한국 정부가 코로나19 위기 단계를 ‘심각’ 수준으로 상향(20.2.23)한 지 3개월이 지났다(신현규 2020). 많은 일이 있었다. 산업이 변화하고, 사람들의 일상이 변했다. 줌(ZOOM)의 사용량이 최대 1900% 증가했다. 번화가는 텅 비었지만, 이커머스 시장의 거래량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집콕 생활이 익숙해졌다. 동시에, 시시때때로 울리는 재난 알람 문자에도 익숙해졌다. 지자체에는 확진자가 사는 아파트의 이름을 묻는 전화가 쇄도한다. 현장 의료진들의 피로감이 누적되었다는 뉴스가 잠깐 눈에 밟혔다가도, 금세 일상으로 복귀한다.

방역은 성공적이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지만, 전염병 확산을 방역망 내에서 관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해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데 성공적인 K-방역이 국제사회 속에서 한국의 입지를 크게 상승시켰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외신의 기사를 인용해서, 우리가 ‘선진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예찬하는 기사도 심심찮게 보인다. ‘선진국’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아직 사태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굳이 선진국이 되었는지의 여부가 주목받을 필요가 있는지. 한국은 정말로 선진국이 된 것일까? 애시당초에, 선진국이란 무엇인가? 작금의 사태에서 ‘선진국임’을 선언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선생님께서는 경제력, 문화 수준, 국민 의식 등을 종합하여 2020년 현재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 위상이 어느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4월 28일에 리얼미터가 실시한 설문조사의 핵심 문항이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 10명 중 6명은 자국의 수준을 ‘선진국’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때의 ‘선진국’은 객관적 기준이 있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개인 인식의 총체이다. 선진(先進)이 국가를 비교하는 상대적 개념임을 고려하면, 선진국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개개인이 선진국의 조건과 비교대상을 설정하고 동일선상에서 평가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선진국의 조건은 필경 상대적 개념일진대, 어째서 ‘서구의 경제적 선진국’이 그 비교대상으로 당연시되는가?

한국에서 선진국 담론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서부터 부상했다. 김종태 교수는 본인의 논문에서,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적 목표는 ‘개발/발전주의’에 입각해 설정되었는데 이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문명 담론─동, 서양을 아우르는 문명국이 되자─과 대비된다고 말한다(김종태 2013). 국가적 단위의 경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 산업화가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태생적으로 결여한 정치적 정당성을 공격적인 경제발전 사업에서 찾았다. 미국의 원조정책이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 변화한 것은 국가주도의 경제성장과 자립경제 달성의 필요성을 더욱 높였다(윤상우, 2006:75). […] 발전주의, 개발주의를 중심으로 한 박정희 시기 경제 담론은 정치적으로 개발독재와 한국적 민주주의 등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해, 저항적 정치세력이 주장하는 민주주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구실을 했다.

조희연 2003, 77

한국식 ‘선진국 담론’은’여기서 등장한다. 이 때 선진국을 가치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경제적 측면에 국한된다. 따라서 국민소득이 낮고 낙후된 국가를 저발전 국가로, 반대를 선진국으로 규정하고 후자를 긍정한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여기서 정의하는 선진국은 풍요로운 일부 서구국가에 한정된다. 한국은 선진국의 대칭점에 있는 후진국으로, ‘빈곤하고, 나약하고, 게으른’, 발전주의적 관점의 후진국으로 정의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선진국의 유사어가 전진(前進)국으로 명기되어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선진국 담론에 따르면 국가의 발전은 산업화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선형적 발전이다. 한국의 후진성에 대한 정의는 일종의 내면화한 오리엔탈리즘인 셈이다. 이에 따라 대중담론 역시 변화한다.

박정희 정부 시기 선진국 담론은 대통령 연설문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차원에서도 급격히 부상했다. 언론매체에서 선진국, 후진국 등의 용어들이 더욱 널리 쓰였고, 이들 사이의 관계도 더욱 안정화됐다.[…] 선진국은 대체로 공업화, 산업화, 발전, 자본주의 등에서 앞선 나라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됐다.

김종태 2013, 96

담론 하의 개인은 새롭게 빚어진다. ‘경제적 성장을 이룩해 선진국 되기’는 마치 노래방의 우선 예약 시스템처럼 개인의 우선순위 앞자리를 차지한다. 경제적 성장은 국가적 목표를 넘어 개인의 목표가 되었으며, 우선순위를 내면화한 개인은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하는 개인으로 작동한다. ‘빈곤하고, 나약하고, 게으른’ 한국. 단현의 말을 빌리자면 비상사태가 선포한 ‘조국 근대화’의 사명은 ‘예외상태의 일상화’이자, 체제를 옹호하는 경제발전과 연관없는 모든 가치의 항구적 유예 사태다.

[…] 모든 가치의 항구적 유예 상태다. 경제 개발과 ‘조국 군대화’의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방해하거나 그와 무관한 가치들은 ‘가치들의 순위표’ 상에서 무한정 밀려난다. 따라서, 예컨대 노동자의 생존은 보장되어야 하겠지만 노동자의 권리나 존엄은 없다. 여성의 권리 증진은 아직 시급한 과제가 아니며,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은 차후에나 다룰 일이다. 도래하지 않는 차후를 저편에 둔 채, 국가는 국민들로 하여금 오늘만을 성실히 살아낼 것을 요구한다.

단현, 「한국 사회에서 ‘예외상태의 일상화, 일상의 예외상태화’」

발전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들은 무대 뒤편으로 밀려났다. 서울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은 도시 외곽의 판자집으로 밀려났고, 그마저도 88올림픽의 화려함 뒤에서 무너져내렸다. 화려함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더럽다고 규정되었다. 그 역시 ‘빈곤하고, 나약하고, 게으른’ 한국의 잔재이기 때문에, 발전주의적 관점에서는 ‘해결’해야 할 미운 대상이었다. 그동안 ‘선형적 발전’은 신화로 굳어졌다. 박정희 정권이 최초에 설정한 ‘국민 소득 1만 달러’는 진작에 달성했다. 이후로 계량화된 뚜렷한 목표는 딱히 없다. 다만 ‘발전’해야하고, 도태되는 것들은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만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오늘날. 또 다른 비상사태 중에 누군가가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선포한다. 항구적 유예 상태는 해소되었는가? 일전의 모습은 정말로 달라졌는가? 안타깝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선진국/발전 담론은, 집단 혐오와 무시의 형태로 사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확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대림동은 바이러스의 근원지라고 불리며 욕을 받았다. 중국 동포가 밀집해서 살고 있는 지역이라는 이유에서다. 대구를 향한 지역 혐오, 신천지 신자들을 향한, 성소수자들을 향한 혐오 역시 비슷한 양상이다. 한 번이라도 국가적 단위의 방역에 해를 끼친다면, 그들은 마땅히 혐오당해야 했다. 국가적 발전(방역)을 저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혹은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이 마구잡이로 공격당했다. 존중받아야 할 정체성이 ‘해결’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의료진 또한 진작에 과부하가 걸렸다. 과도한 업무량과 코로나19 감염 우려가 상존하는 환경 속에서 일하는 의료진의 스트레스는 상당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응원과 격려 외의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쉬면 방역에 구멍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분명한 고통은 외면받는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선진국’ 담론이다. 수많은 언론이 뛰어난 방역체계와 시민의식을 칭찬하지만, 이면에 대해서 깊게 다루지 않는다. 이번 대통령 특별연설은 어땠는가? 언급된 것은 ‘훌륭한’ 국민에 대한 격려와 ‘선진국’으로서의 대한민국, 그리고 경제 발전의 포부뿐이다. 일전의 발전 구도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은 없다. ‘발전’의 요소에 방역 체계가 추가되었을 뿐, 명암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히려 수많은 혐오는 화려한 ‘선진국’ 선언의 뒤로 숨는다. ‘경제적 성장’은 더욱 강력한 목표가 되었다. 1960년대 경제 성장이 ‘생존’을 위해서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면, 21세기의 경제 성장은 개인의 부(富)의 축적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조금 더 무서운 것은 개인적 부(富)의 추구와 국가적 단위의 발전 담론의 예속적 결합이 혐오를 해결하기는커녕 비판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2. 개인적 욕망의 경제적 예속

국가에 속한 개인이 부의 수준에 상관없이 국가적 경제발전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한 모델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긴급생활지원금을 국가가 제공하는 상황을 상정해보자.

시장에 다음과 같은 3명의 플레이어(player)가 있다고 가정하자(금융시장 역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이 때 각자의 목적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정부 : 국가 경제 수준의 증진 & 국민 복지 수준의 증진
국민(실물자산 보유자) : 개인의 사적 이익
국민(실물자산 미보유자) : 개인의 사적 이익

추가 조건/가정
#자산 규모가 상승하기 위해서는, 물가성장률/실질경제성장률이 높아야 한다.
#실물자산 보유 국민은 금융 자본 역시 지속적으로 투자.
#실물자산 미보유 국민은 생계 유지를 위해서 재난지원금을 당장 수혜받아야 한다(=장기적으로 국가 의존). 이들 역시 적은 돈이라도 금융 자본에 지속적으로 투자.

긴급생활지원금을 제공할 시 전개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긴급생활지원금 마련을 위해서 재원을 확보해야한다. 이 때 재원은 국채를 발행해서 마련하는데, 이는 금리 조정을 통한 통화량 조절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불안심리로 금융 시장이 급락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정부는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추가적으로 자금을 투입해야한다. 통화량이 비대하게 증가하고, 이 때문에 물가가 상승한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종식된다면 부채가 늘어난 재정을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재정 정상화를 위해서 세금을 늘린다면 국민 모두의 반발이 극심할 것이다. 만약 국가가 갚아야 하는 국채 금리보다 명목물가상승률이 크다면 정부가 갚아야 할 빚은 감소할 것이다[명목이자율 = 실질이자율 + (예상)물가성장률]. 하지만 물가상승률의 증가는 실물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국민의 자산 규모를 증대시킬 것이다. 필연적으로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제/금융시장이(가) 무너진다면 모든 플레이어들의 손해이다. 따라서 코로나 종식을 위한 국가적 규모의 정책과, 실물/금융시장 안정화를 위한 정부의 예산 증대를 지속적으로 용인할 수밖에 없다. 실물자산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는 자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애 반대할 이유가 없다. 긴급생활지원금이 당장 필요한 플레이어는 필수 소득의 상당부분을 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빈부격차가 생기더라도 국가의 정책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모델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명백하다. 요컨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개인 역시 국가적 발전을 옹호하는 것이 유리하다. 자산이 많은 개인은 당연히 경제 성장과 물가 상승을 옹호할 것이다. 자산이 없는 개인 역시, 물가 상승으로 인해 실질 소득이 감소하더라도 국가적 단위의 정책과 성장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 상당한 소득을 이미 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산이 많은 개인이건 재산이 거의 없는 사회적 약자건,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국가 체제가 유지되어야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강제적인 체제는 아니다. 어찌됐건 개인의 생활 수준은 보장되며, 금융 시장은 성장한다. 아무리 빈부격차가 심해지더라도, 개인이 이익을 얻는 부분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일련의 체제를 용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먹고 살고 돈을 버는 것이 사람의 1차적 목표인 이상, 국가는 발전할 정당성을 가진다. 어찌 됐건 정부의 행동 논리는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기 때문이다. 발전이 개인의 복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발전과 직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개인의 관심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런 문제가 국가적으로 정의한 발전에 대치된다면 이를 무시하고 발전 담론을 지지하는 것이 개인의 최적화된 선택이다. 결론적으로, 국가 단위의 발전 담론에서 배척받는 대상은 다수의 개인의 지지조차 잃는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는 구조가 아니라면, 선진국이 된 나의 조국은 개인에게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곳이다. 개인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조국을 굳이 비판할 이유가 없다.

3. 그래서?

코로나19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단위의 노력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 단위의 빠른 대처가 없었다면 방역망은커녕 사회 안전망이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생각을 하고 싶었다. 빛의 이면에 반드시 그림자가 존재하듯, 성과를 이루기 위해 외면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그들에 대한 존중은 유예되었고, 무관심은 특정 집단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개인이 이들을 존중할 동기가 마땅히 없기 때문에, 막연한 감정적 공감을 호소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해 보인다. 개인적 욕망을 국가적 욕망과 분리하는 것도 그렇게 의미있는 작업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개인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비판하고 사유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망각에 묻히지 않고 연대하는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직은 의문과 질문만을 가득 던지는 글을 마친다. 오늘 밝힌 욕망의 얼개가, ‘아직’을 현실에 구현할 발판이 될 수 있기를.


참고문헌

─ 신현규. 20.05.03. “코로나 이후 저녁, 주말에… 영상회의 ‘줌’ 사용량 폭증”,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it/view/2020/05/453849/ 매일경제(20.5.28. 확인)
─ 김종태. 2013. 「박정희 정부 시기 선진국 담론의 보상과 발전주의적 국가정체성의 형성: ‘대통령 연설문’과 ‘조선 일보’를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vol 47: 71-106
─ 조희연. 2003. 「정치사회적 담론의 구조 변화와 민주주의의 동학: 한국 현대사 속에서의 지배담론과 저항담론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한국의 정치사회적 지배담론과 민주주의 동학: 한국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의 동학(3)』, 조희연 편저(서울: 함께읽는책), 3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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