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금 이른 시기에, 나의 신학 공부에 대한 신조를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짧은 시간동안 나는 어떻게 신학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고민할 수 있었고, 앞으로 이어질 나의 신학함에 대한 신조를 엉성하게나마 짤 수 있었다. 앞선 글에서 나는 윤리적 행동을 위해 요구되는 존재론적 태도가 있다는 것, 그를 비롯해 모든 우리의 삶 중에서 특정한 형이상학적 물음이 발견된다는 것,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리라는 것, 그리고 그 역할을 비평 또한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것을 차례대로 말해 왔다. 이제는 신학에 대해 마찬가지 신념을 소개할 차례이다. 이하는 신학이 무엇이냐는 나의 이해와, 그리고 그 신학에 있어 예상되는 문제들이다.


신학적 질문

무엇이 신학의 내용을 이루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시대마다 달랐다. 고전 전통을 이끈 이들은 신학이 전능한 신, 그리고 그와 관계하는 초월적 존재자들 자체를 숙고할 수 있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며 이른바 ‘칸트적 전환’이라는 것이 나타나 근대 전통에서 신학은 인간 이성에 의해 요청되는 초월적 존재자들을 체계 안에서 정당화하는 역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등장한 하나의 운동은 그 신 자체를 인간의 자기 의식으로 보거나, 의식 자체를 신의 의식과 동일한 것으로 보려는 움직임이었다.

이제 신은 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그를 사유하는 인간 안에 있다. 다시 20세기, ‘언어적 전환’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은 오로지 개념적 인식이며, 사유의 대상 및 사유의 방법에는 언어를 경유해야만 접근 가능함을 주장한다. 신학도 이러한 전환의 예외사례가 될 수는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신학은 문법, 즉 종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정한 진술의 형태를 판별해주는 기준으로 드러난다. 이제 신학의 대상은 공동체 가운데 머무는 초월적 존재자에 대한 공동체의 고백 내용이다.

내가 보기에, 신학적 질문의 틀과 철학적 질문의 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철학적 질문의 형식은 이렇다. 일상인이 어떤 보편적 개념 A에 대해 이렇게 묻는다. ‘A란 무엇인가?’ 이에 철학자들은 A 개념에 관한 철학적 직관과, A 개념에 관련된 사건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A의 특성 등을 종합하여 이렇게 답한다. ‘A는 P이다.'(또는, ‘A는 P일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참이다.’) 신학적 질문의 형식은 이렇다. 성도가 어떤 신앙의 대상 B에 대해 이렇게 묻는다. ‘B란 무엇인가?’ 이에 신학자들은 B 개념에 관한 전통적 고백들(전승과 성서), 오늘날의 성도들이 B에 대해 고백하는 바 등으로부터 추상된 B 개념을 다른 신학적 개념들과 충돌하지 않게 정돈하여 이렇게 답한다. ‘B는 Q이다.’

신학적 답변과 철학적 답변은 적어도 두 요소를 공유한다: 일상인들의 언어적 직관과 다른 개념들에 대한 논리적 정합성. 명시적으로 차이나는 점은, 신학적 답변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전통이 포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큰 차이가 아닐 수 있다. 이 차이는 교회공동체가 무시간적인 진리를 추구하기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초월자이며, 과거의 교회와 오늘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 따라서 그들의 직관과 자기계시는 오늘날에도 이어진다/져야 한다.

철학적 답변을 위해서 특정한 형이상학적 함축이 있어야 한다라는 나의 주장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철학적 답변을 할 때, 적어도 하나 이상의 실체 내지 개별자가 언급되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예컨대 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 때 철학자는 매개변항 a와 b를 갖고 ”a와 b가 사랑한다’라는 것은 ‘a와 b의 관계 행위 R이 있다’를 의미한다’라는 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최소한 사랑이 아무런 실체 없이 떠다니는 공허한 관계항이 아닌, 세계에 자리잡은 두 실체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존재론적 함축을 얻는다. (아무 존재자도 없이 오로지 사랑함이라는 행위만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반직관적이며, 얼마나 공허한가?)

마찬가지로 신학적 답변에도 이러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영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인데, 이 때 신학자는 ‘영혼이란 하느님의 숨을 통해 인간에게 예화된 생기 활동 및 영적 활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와 같은 식의 답을 할 것이다. 여기에서 최소한 어떤 하나의 영혼이 예화되는 인간과, 그의 영혼을 구성하기 위한 하느님의 두 존재자가 선제되어야만 한다. 신학적 개념이 전적으로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함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설사 신학적 개념들은 신앙 공동체의 고백을 통해서만 구성된다고 주장하더라도. (단지 그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과도한 진지함을 제거해야만 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중세신학을 조롱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바늘 위의 천사 논제’ 역시 등장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일상인들은 천사를 실체적 존재자로 상상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실체이면서도 시공간적 특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공간에 여러 천사가 있을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에 철학자들은 답할 수 있어야 했다.

오늘날 역시 유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하나의 색채가 저 지점에 몇가지나 있을 수 있는가?’ ‘전적으로 물리적 특성이 동일하지만 구분되는 두 가능세계는 실재하는가?’ 와 같이 물을 수 있다. 중세의 질문 자체는 그릇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단지 그 질문이 선제하는 대상에게 너무 진지한 존재론적 태도를 가진 데에서, 그 질문이 공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신앙 공동체의 고백을 번역하기

다시 신학으로 돌아오자. 신학과 철학이 결국 같은 질문-답변 구조를 갖는다는 것은 나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이전에 철학이란 삶 일반에 관한 비평작업이라는 개인적 신념을 드러냈던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은, 그 질문 구조는 유지된 채 범위만을 신앙 공동체에로 옮긴 것이기에 신앙 일반에 관한 비평작업으로 이해된다. 이전의 글에서 ‘비평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나의 신념을 다음 두 조건으로 요약했다. 1) 비평은 비평 대상을 오늘날의 일상어로 충실히 번역하는 일이다. (주석적 비평) 2) 비평은 번역에 더하여 그 번역된 텍스트가 일상인들에게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해명하고, 실제로 의의를 갖게 해야 한다. (예언자적 비평)

신학이 비평의 일종이라면, 이 두 조건을 신학 또한 가져야 한다. 첫째로, 신학은 그 대상인 신학적 개념을 오늘날의 일상어로 충실히 번역하여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 신학은 그 개념이 성도들에게 어떤 실천적 의의를 갖는지 말해내야 한다. 전통적으로 랍비와 설교자들은 이 두 역할을 공동체 안에서 해내려 했고, 그래서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주석가(신학자)는 곧 종교 지도자였다.

상기했듯 주석적 신학의 재료는 세가지이다: 전통에 의거한 개념 이해,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기록한 성서, 개념에 대한 현재 교회 공동체의 고백. 그런데 이 중 앞의 둘은 순수한 고백 내지 진술이 될 수가 없다. 이미 그것은 전통으로 이어진 바,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고, 오염된 채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이나 계시는 다시금 번역되어야만, 해체되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환원된다.

말하자면 신학은 이중의 과제를 갖고 있다. 일단은 신학적 개념을 해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통, 계시, 고백이라는 세 재료가 있다. 여기에서는 개념이 비평에서 텍스트의 위치에 놓인다. 그런데 전통과 계시는 다시 해석되어야만 사용 가능한 재료이므로 이 각각의 의미를 해명해야 한다. 여기에는 그것의 의미에 관한 오늘날 우리의 관점만이 재료로 남는다. 이제 텍스트는 전통과 계시이다.

러시아 인형을 조립하려면 작은 인형부터 짝지어야 하듯, 신학의 순서는 반대로 진행된다. 우선 우리가 어떤 전통을 어떻게 이해해 왔냐는 작업이 수행되고(교회사 및 교리사), 교회가 제일의 계시로 삼은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냐는 물음에도 답이 제공된다(성서학). 이 두 작업은 역사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묶인다. 그리고 이러한 재료들로부터, 오늘날 신앙 공동체의 고백을 참조하여 ‘신앙의 대상이란 당췌 누구인가?’라는 데에 답하는 비평적/철학적 작업이 진행된다. 조직신학이라 불리는 학제가 이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 작업이 모두 완수된 후에는 이로부터 얻은 신학적 통찰을 삶과 신앙 공동체의 구성 원리에 적용해야 한다. 이 적용은 실천신학이 맡는다.

나는 근대 이후 신학의 세 갈래로 여겨진 이 세 학제가 각각 이런 방식으로 신앙 비평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철학에 있어서는 지식학-형이상학-윤리학이 각 위치를 점유하는 듯하다. 또는 철학학-철학-인문학이 그렇다.)비평작업의 일종으로 신학을 해석한 바 ‘좋은 비평은 정치적 귀결을 낳는 것이 당연하다'(이전 글, 4절)라는 생각이 신학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그 구조는 조금 달라 보인다. 신학의 유용성은 신앙의 언어로 고백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공의로 이어지는 과정은 이러할 것이다. 먼저 우리에게 특정한 성서 구절이나 특정한 전례와 같은 어떤 전통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 주어진 전통은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공의를 이루게 하도록 친히 정해준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있는데, 그 영이 바로 그 전통을 취하도록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집행한 성례전,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나눈 전통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공의의 실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 원리이다. 문제는 그런 신이 정말로 있냐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신의 영감을 기다리며 오늘의 성서 구절을 찾기 위해 묵상하기보다는, 주기적인 성서 읽기표를 제정하여 그 때의 성구를 정하기로 했다. 또 성례전이 집행되는 시기를 정해 그 때에 바로 그 성례전이 열리도록 교회력을 정해 놓았다. 초자연적인 계시가 어떤 전통을 취하게끔 하는 일이 더이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짐작하게 된 탓이다. 그런데 그런 성구, 그런 성례전을 취하는 중에서도 교회 공동체는 신성에 관해 말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신학적 개념으로부터의 자유

신학과 문학 비평, 신학과 철학에는 처리할 수 없는 골이 존재한다. ‘신성‘이 전제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신학은 신성한 대상들을 다룬다는 자기주장을 반복했다. 여기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한편으로 비평과 철학은 각자의 대상을 과하게 진지한 것으로 다루지 않아야 한다. 어떤 주석도, 어떤 형이상학도 그것이 기술하는 존재와 그 자체로 같다고 보는 것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편에서 신학은, 그것이 기술하는 존재가 신성하고, 바로 그 신성에 관한 기술을 신앙의 방식으로 삼는 것이 신앙인들의 바람인 탓에 신학의 내용을 과하게 진지한 것으로 다루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그 하나의 사례가 바늘 위의 천사에 대한 공허한 논쟁이었고, 죄나 구원, 창조에 관해 오늘날 진행되는 공허한 담론도 마찬가지 이유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다.

신학의 전통은 이러한 고착화를 정말로 조장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 전통의 어떤 금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우상 숭배의 금지가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이 이렇게 계시한다. “나를 닮은 형상을 땅 위에 세우지 말라!” “나의 이름을 경솔히 부르지 말라!” 광야를 떠도는 헤브라이 사람들은 이 계시를 듣고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내가 분명히 지향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그렇게 그들은 황금 소의 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했다. 하느님은 황금 소의 모습에 갇혀서 사유되는 유한한 존재자가 아님을 잊은 탓이다.

5천년 전의 헤브라이 사람들처럼 신성을 논하는 이들은 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분명히 참인 하느님의 계시를 고정시키고, 그 반석 위에 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강력한 신학적 토대를 만들자!’ 그리고 그들은 그 신학에 절한다. 하느님의 모습은 이제 어떤 특정한 시기의 고백에 고착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의 잘못된 한 예시를 발견한다. 이른바 ‘근본주의자’의 신학적 욕망은 과거 헤브라이 사람이 갖고 있던 왜곡된 욕망과 본질적으로 같다. 그것은 신성한 대상은 언제나 특정 유형이어야 하며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에서 기인한다. 이 전제로부터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그릇된 전제가 추가될 때, 그들의 욕망이 완성된다.

어떤 것이 신성하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그 의미를  수정할 수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갖는 의미가 그 신성을 포착할 수 없음을 뜻한다. 신성은 무한정한 해석 가능성을 갖고 있다. 신성은 그 시기에 맞는 내용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포착된다. 모든 시기와 모든 문화에 따라 신성의 형태는 변화한다.

네 복음서가 각각 드러내는 하느님의 모습이 다르며, 고대인들이 만난 하느님의 모습이 각자 다르다. 성서는 언제나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그 세 하느님이 언제나 똑같이 행동했다고 진술하지 않는다. 야훼는 야곱에게 자기 아들을 산에 올라가 죽이라고 명하지 않았다. 오늘의 하느님 역시 그럴 것이다.

말하자면 신학은 그 참된 전제들로부터, “신학적 개념으로부터 자유하라!”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영으로 고백하지만, 그는 영에 갇혀 있지 않으며, 자연 세계의 활동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창조를 원역사로부터 고백하지만, 하느님의 창조 역사는 원역사에 갇혀 있지 않으며,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그 부활은 나사로의 소생과 같은 ‘죽은 몸의 즉각적 소생’으로 고착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잠정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느님이 달랐다는 사실이 하느님에 대한 어떤 고백도 불가능함을 귀결로 갖지는 않는다. 원역사에 두 창조 설화가 병렬적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어떤 창조에 관한 고백도 거짓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네 복음서의 예수 부활 기록이 다르다는 사실이 어떤 예수의 부활에 대한 고백도 불가능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나의 하느님, 나의 창조, 나의 예수, 나의 신학을 포착할 수 있다. 일단 참된 방식으로 포착되고 나면 내가 잡아낸 그 믿음의 내용은 참되다. 참된 포착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참이 언제나 무시간적이어야만 한다는 독단에서 비롯했다.

신앙의 대상을 유동적일 수 있다고 보면서, 우리는 조금 약화된 방식으로 신성을 추구할 수 있다. 요점은 이렇다: 신성은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등장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중에 있는 성서읽기표와 교회력에서도 하느님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자연적 인과에 의한 사건들도 기적으로 부를 수 있고, 우연히 내가 고른 하나의 성구로부터 하느님 나라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하느님의 운행은 오로지 영적인(정신적인) 것이며, 하느님의 영감은 오로지 외재적인 것이라는 과거의 주장을 버리면서 이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거부는 타당하다. 하느님을 오로지 초자연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자로 간주하는 것은 그를 특정한 형태의 개념에 가두는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은 이러한 가둠을 방지할 좋은 근거를 우상 숭배 금기 명령의 형태로 갖추고 있다. (삼위일체 도식 또한 또다른 근거 중 하나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지만, 그는 오로지 정신적인 것도, 오로지 관계적인 것도, 오로지 물리적인 것도 아닌 채 존재한다.) 이제 신성은 훨씬 덜 진지한 차원에서 고찰된다.

신학은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철학은 어떤 질문에 답하여 공동체의 치유를 이루어 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철학과 신학은 비평이라는 줄기 아래 쌍둥이이기 때문에, 신학 역시 어떤 질문에 답하여 치유를 이루는 의무를 갖는다는 것이 신학에 관한 나의 믿음이다. 이러저러한 초월에의 고백이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공동체의 지체들이 묻고, 신학은 그 의미를 전통과 현재에 기대어 해석해 낸다. 그리고 그 해석이 정치적 귀결을 낳는다. 여기에서 치유가 완성될 것이다.

한편 하느님은 교회 공동체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므로 신학이 답할 질문 또한 교회 내부의 문제로 고착되지 않는다. 신학은 교회 공동체가 고백하는 이에 대해 답하며, 그 고백되는 이는 본래 세계 모든 곳에 있는 보편적 존재자였다. 신학이 질문에 답한 뒤 이루어지는 치유는 그 보편의 방향으로 정치적 영향을 끼친다. 즉 신학의 치유는 교회 공동체가 만든 질문에서 출발하여 세계의 치유로 나아간다.

하지만 정말로 신학이 치유할 수 있냐는 물음이 남는다. 신학적 개념들에 대해 우리는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것을 진지하게 믿거나, 진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거나. 신학 전통에서 전자는 이른바 ‘긍정의 길’ 또는 ‘긍정신학’이라고 불렸고, 후자는 ‘부정의 길’ 또는 ‘부정신학’이라고 불렸다.

앞의 것은 신학적 을 추구하며, 뒤의 것은 신앙적 신비를 추구한다. 긍정의 길에서 하느님은 우리의 고백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며, 우리는 그 고백으로부터 참된 하느님을 정말로 마주한다. 반면 신비를 추구하는 이들은 우리의 언어가 하느님을 포착할 수 없고, 따라서 고백에서 하느님이 정말로 등장한다는 것은 공허한 주장이라고 말한다. 분명한 답을 주려는 신학자에게 신비의 신학자들은 번번이 장애물을 던진다. 어쩌면 내가 방금 언급한, 신성의 해방이라는 것도 일종의 장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애물 앞에서 어떤 이들은 우왕좌왕한다. 명료한 신학적 지식에의 의지가 좌절되기 때문이다.

즉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인들은 제대로된 답을 원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열망에 답하려는 신학자의 의지가 좌절된 것이 현재의 사정이다. 물론 “답”이란 사실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원진리를 소유한 적이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앎은 언제나 유한하다는 것을 철학의 역사는 분명히 드러냈다. 모든 합의, 모든 학설, 모든 지식은 한 시대 후에 사그라들었다. 이 역사는 우리가 어떤 개념에 과도하게 진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진지하지 않아도 되는 고백만으로 일상인들에게 충분한 답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상인은 현학적 진리보다는 지금 자신에게 문제되는 것에 분명한 답이 제시되기를 원한다. 일상인의 시각에서는, 근본주의자가 소피스트보다 훨씬 유용하다. 현학적인 말보다 공학적 진리의 유용성이 훨씬 큰 법이다.

철학 역시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다. 진리의 철학자들은 실재가 이렇고, 정의가 이렇다고 말한다. 반면 그 앞에 선 생성의 철학자들은 그것은 참된 진리일 수 없다는 훈수를 둔다. 결국 정의가 무엇이냐는 일상적 질문은 해소되지 않은 채 가라앉고 만다. 과학에서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적이 된,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이 역할을 했다.

문제는 이것이다. 제대로 된 답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명료하고 참인 듯 보이지만, 그것의 부작용 또한 분명한 것이다. 실재가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도 의연하게 할 수 없다. 마냥 신비을 좇을 때 치유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치유되어야 하는 형이상학적 질문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데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지껏 그랬듯, 이번에도 남아있는 질문을 파헤치며 글을 닫자. 우리는 제3의 길을 택해야 할 것 같다. 개념을 우상화해서도 안되지만, 그 개념에 관한 믿을 만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열망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 그래서 두 길을 경유하든, 모두를 포기하든, 오도되지 않고 참된 지식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로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 경로는 전통 철학에도, 포스트모던 철학에도 분명히 제시되진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어떻게 그 새로운 경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상적 진보라고 또한 부를 수 있을까?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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