Éric Rohmer. 1992. 〈CONTE D’HIVER〉

운명적인 사랑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으로 치환되나요?
다르게 묻겠습니다. 인생에서의 단 하나의 사랑을 믿습니까?

나는 〈콜드워〉(파벨 포리코브스키, 2019) 비평에서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여기에 단 하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 있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는 단조롭다. 작가가 아닌 감독으로서는 독특하게 누보로망(Nouveau Roman) 계열로도 소개되는 로메르의 영화는 단순한 카메라워킹, 대화 중심의 전개 방식 등을 가지고 있어서 그 자체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필자가 서사만을 위한 비평은 지양하기에 더욱 그렇다). 로메르의 영화가 여타 누벨바그(Nouvelle Vague) 감독들과의 차이로 인해 세간에 회자되었으면서도 작품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들이 나오지 않는 건 그러한 단조로움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메르의 영화들은 분명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오히려 단조로움으로부터 비롯된다. 일상으로부터 새어나오는 것이다. 감독은 그러한 힘을 ‘만들어내기’보다는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종종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묻는다. 혹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에 대해서도. 대학, 혹은 회사에 붙은 순간들. 누군가에게 고백을 했던 순간들. 혹은 여행지에서. 대부분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난 거대한 이벤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CONTE D’HIVER〉. 타이틀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주인공 펠리시의 행복했던 이벤트인 샤를르와의 휴가가 요약적으로 제시된다. 행복했던 순간이다. 밝은 풍의 배경 음악과 함께 단편적으로 구성된 이미지들은 필름 카메라로 찍은, 움직이는 사진들 같다(이 이미지들은 이후 펠리시의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샤를르의 독사진과 조응한다).

디제시스를 단절시키는 자막 ‘Cinq ans après(5년 후)’이 등장한다. 자막은 이전의 이벤트를 추억으로 만든다. 첫 시퀀스가 우리로부터 달아난다. 이제 영화는 단조로워지기 시작한다. 아침이 되고, 펠리시가 루이의 집에서 깨어난다. 맥상스가 있는 미용실에 일하러 간다. 펠리시의 삶은 지난하기까지 하다. 로메르의 영화가 고전 할리우드 영화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점은 이러한 지난함과의 싸움(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소위 말해 ‘느린 영화’가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알렉산더 소쿠로프, 벨라 타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의 감독들이 이 장르의 대가로 일컬어지며, 에릭 로메르 또한 그렇다. 그들의 영화는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을 이집트의 ‘미라’라는 기원으로부터 주창했다. 이는 현실에 방부제를 치고 붕대로 감싸 부패하지 않게 하려는 ‘보존 욕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현실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나 탐정 소설 류에 나오는 것처럼 사건들의 끊임 없는 연쇄로 이뤄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 사건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계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삶은, 특히 현대의 삶은 일상이라고 하는 것들의 반복이다. 그러다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거대한 사건이 우리에게 ‘순간적으로’ 다가올 테다. 그리고 또 다시 우리는 일상을 살아간다. 물론 펠리시의 삶도 요약적으로 봤을 때 커다란 사건과 그 속에서의 선택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포털사이트에서 소개’당하기’ 위하여 요약적 줄거리로 제시될 때면 많은 영화들이 으레 그럴 듯해 보인다). 맥상스를 따라 느베르라는 교외로 나가 살기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은 분명 일상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감독은 그 과정 일련을 의도적으로 일상화시킨다. 변하지 않는 촬영 방식(삼각대 고정 팔로우와 느린 줌 인)이 분명 그러한 일상화에 일조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감독은 이러한 일상의 느림, 지난함, 헐거움을 보여주기 위해 이동 시간을 압축, 생략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생략하지 않는 것을 넘어 부각시킨다. 〈겨울 이야기〉는 로메르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대화-이동-대화-이동…’이 영화의 전체적인 틀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그 사이 시간을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동 시간은 말 그대로 ‘비非사건적’이다.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지난함을 역설적으로 그 사회가 잉여로 인식하는 시간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영화에서 펠리시가 어딘가로 가는 이동 시간들만 합해도 10분이 넘는다. 펠리시가 루이의 집에서 깨어나 맥상스의 미용실로 가는 첫 이동 신은 1분이 넘으며 6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펠리시가 맥상스를 떠나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생클레어 샵으로 이동하는 신이다. 4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18초의 이동을 통해 펠리시가 생클레어 샵에 다다른다. 관객들은 어서 생클레어 샵 내부로 카메라가 들어가서 그녀가 일자리를 구하는지 구하지 못하는지, 혹은 새로운 볼거리가 나타났는지 보여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어서 등장하는 것은 또 다시 지하철에 앉아 있는 그녀이다. 그리고 6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30초 이상의 이동 쇼트가 이어붙는다.

대부분의 이동은 목적지를 가지고 있다. 어딘가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은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부정되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된다. 관객은 어서 빨리 새로운 자극, 사건의 전개를 보길 원한다. 이동-생클레어샵으로 걸어 들어감 이후에 놓인 지하철. 그것은 사건을 비非사건으로 대체함으로써 비非사건을 사건의 지위로 올려놓는다. 그렇게 찾아간 루이의 도서관에서 그들은 어김없이 ‘대화’를 나눈다.

대화. 그것은 감독이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 택한 또 다른 방법이다. 이 또한 진부한 말이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가장 큰 부분이다.

첫 시퀀스와 ‘5년 후’ 자막 이후의 시퀀스들 사이의 단절 속에서 우리는 샤를르의 부재를 대신하는 루이와 맥상스를 보며 혼란을 느끼게 된다. 특히 펠리시와 샤를르의 추억은 요약적으로 제시되었기에 관객들은 부족한 정보량 속에서 많은 것들이 궁금해진다. 펠리시와 샤를르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고, 어떠한 상황에 놓인 것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펠리시-맥상스, 펠리시-어머니, 펠리시-루이, 펠리시-언니 간의 대화를 통해 이에 대해 알게 된다. 그들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끝끝내 그녀는 그들이 아닌 샤를르를 선택하고 기다리기로 한다. 생클레어 샵에 갔던 펠리시가 끝내 어떻게 되었는지 또한 루이와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우리의 삶은 일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연속이다. 매일의 반복과 작은 변화들이다. 그리고 반복은 필연적으로 지난하다. 그것은 대개 비非사건이다. 심지어 잠을 줄여가며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돌이켜 남는 것은 뭉뚱그려져 수행 완료된 체크리스트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힘이다. 로메르는 결코 도시화되고 반복적이게 된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좋든 싫든 대부분 도시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영화는 가치 판단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삶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힘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힘은 ‘믿음’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형태를 띤다. 물론 이것은 현대적 운명론과도 연결된다.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로메르 감독의 〈녹색 광선〉을 함께 비교해보고자 한다. 〈녹색 광선〉의 주인공 델핀느는 같이 휴가를 보내기로 했던 남자와 어긋나게 되면서 새로운 파트너, 사랑을 갈망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해보려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번번이 소극적이게 되고 누구도 공감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우울감에 눈물이 난다.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단연코 주변 사람들과의 일상적 대화들이다. 대부분의 서사 전개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나누는 집단적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카메라는 마치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하나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레벨 쇼트들은 그녀가 채식주의자라서, 혹은 운명적 사랑에 대한 낭만을 가져서 이해받지 못하는 그녀를 더욱 소외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일상은 점점 그녀의 낭만성에 대답하는 표지들로 인해 어떠한 예감, 믿음으로 채워져간다. 영화 초반부, 그녀는 언니의 집에서 본 심령술을 통해 올해의 색이 녹색이라는 (시덥잖은) 표지를 얻었다고 말한다(우리는 물론 이 정보를 대화를 통해 전달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중간중간 녹색의 다른 상징물들을 발견한다(카드, 전단물, 노인들의 ‘녹색광선’에 대한 대화). 특히 일몰 때 아주 가끔,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녹색광선’을 다른 사람과 같이 보게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예감’에 사로잡힌다. 여러 번의 소외와 사랑에의 실패감으로 휴양지를 떠나 집으로 귀환하려는 델핀느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와 함께 떠난 휴양지에서 그녀는 ‘녹색광선’이라는 가게를 보고 ‘확신’에 찬다. 그리고 그와 마침내 녹색광선을 본다.

〈녹색 광선〉(1986)은 〈겨울이야기〉(1992)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이 또한 로메르 감독의 영화들이 갖는 일상적 면모이다. 그것들은 반복과 변주의 형태로 만들어진다. 로메르의 영화들이 시리즈로 기획되는 것도 형식적 조화를 이룬다. 또한 〈녹색 광선〉은 쥘 베른의 동명의 소설을, 〈겨울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동명의 연극을 각색한 것으로 이 또한 반복과 변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겨울이야기〉의 펠리시도 대화를 통해 점점 샤를르에 대한 희망을 놓아간다. 그녀가 맥상스와 느베르로 떠났을 때, 그것은 아예 희망을 없애버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파리에 있으면 샤를르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들기 때문에 아예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딸 앨리스와 함께 간 성당에서 계시를 받은 듯 확신에 찬다. 이미 영화 초반에 ‘길’에서 우연히 본 것만 같은 샤를르의 잔상으로 모종의 예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영화 속 연극 〈겨울이야기〉에서는 죽은 왕비가 생명으로 귀환한다. 원작인 소설과 연극은 영화 속에 배치되면서 미자나빔의 역할을 하고, 이를 통해 예감을 강화한다. 그리고 펠리시는 마침내 샤를르를 만난다.

마침내 녹색광선을 본다. 마침내 샤를르를 만난다.

일상은 힘이 된다. 어떤 한 순간을 위해 나아가는 기다림의 과정은 그 순간의 숭고함으로 인해 더불어 숭고해진다. 펠리시는 샤를르와 만나게되는 그 순간의 감격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그들이 기다리고 그 결과 얻게 된 것은 너무나 낭만적이고 숭고해서 일상은 마치 그것을 준비하는 반복적 노력과도 같게 느껴진다.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숱한 기술적 반복들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녹색 광선〉보다 6년 뒤에 나온 〈겨울이야기〉에서 일상은 심지어 그 안에 숭고한 순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기다려 마지않는 순간은 우리의 생활 반경인 도시,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녹색 광선〉에서, 휴가라는 특별 기간에 교외의 휴양지로 떠났던 델핀느는 줄곧 자연 속에 있다. 그녀는 녹색을 가득 머금은 비-도시적 공간에서 기다리고, 결국 그녀가 원하는 한 순간도 아주 희귀한 일몰이라는 자연 광경이다(그 속에서 남자를 만난 것이 파리로 돌아가기 위한 기차-이동 수단-역에서인 것은 〈겨울이야기〉로의 이행을 예견한다). 반면, 펠리시는 도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가 파리를 떠나 이동한 교외의 느베르도 큰 도시이다.

델핀느는 줄곧 야외에서 집단적으로 대화한다. 펠리시는 건물 내부에서 개인과 개인으로 대화한다. 펠리시의 여가는 도시를 둘러보는 것이다. 펠리시가 맥상스와 느베르에 가서 한 것은 도시 산책이다. 그녀는 루이와 함께 앨리스와 놀아줄 때에도 도시를 산책한다. 로메르는 최소한의 현장 인원으로 빠르게 촬영했기에 그가 길거리에서 찍는 장면들 속 사람들과 배경은 실제 도시의 모습이다. 그것은 일상의 본모습이다. 마침내 펠리시가 샤를르를 만났을 때, 그것은 버스-이동 수단 속에서이다! 숭고함은 이중적으로 일상으로 번지게 되었다.

1월 1일. 펠리시가 샤를르를 만났다. 딸 앨리스가 단박에 그를 알아본다. 펠리시가 샤를르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어머니에게 샤를르를 소개한다. 펠리시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등장한다. 영상은 계속된다. 펠리시의 언니 내외와 아이들이 신년 파티를 위해 들어온다.

영화에 빠져들었던 관객들은 스크린이 어두워지며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비로소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겨울이야기〉는 엔딩 크레딧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자리를 뜰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녹색 광선〉에서 〈겨울 이야기〉로 넘어오면서 변한 것들의 집약일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왔던 것이 드디어 나에게 현현했을 때, 영화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다시 마주하고 이어진다. 기다림이 끝나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영화의 리얼리즘이다.

밤비
tpdyd83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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