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것이 말을 한다. 그러고 나면 말이 말을 한다. 그러다 보면 말이 모여 말을 이룬다 — ‘말이 된다’. ‘말이 되는’ 것들과 ‘말이 안 되는’ 것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산다.
나는 우리가 이미 많이 말해진 대로 살아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대부분, 이 우리 대신 살아준다는 생각을(혹은 이야기, 가 우리 대신 살아준다는 생각을).
 

2.

삶에 무관심한 나머지 삶이 제 알아서 살아지는 것도, 삶에 묵묵하고 성실하게 종사하는 것도 싫어서, 나는 글을 씁니다.
 

3.

예술art은 유물artifact이 아니다. 그것은 보존되어야 할 ‘귀중한 것’이 아니며, 전시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같은 이름(museum)을 쓰고 있지만, 어쨌건 예술은 유물이 아니며 역사적·고고학적인 기념비도 증거물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인 것 같다. 이 개념은 예술적인 것을 (매체에 따라서 조금씩 상이한) 실체 속에서, 즉 액자에 둘러싸이거나 흰 박스 위에 올려진 채 전시될 것, 일련의 문자들로 인쇄되어 제본될 것, 연주될 것 혹은 녹음되고 편집·가공되어 저장될 것…… 들 속에서 찾게 만든다.
예술 ‘작품’은 어떤 이의 활동, 일련의 행위 끝에 남은 흔적, 증거물, 잔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가 대면하고 목도하는 것이 ‘작품’이라면 감상, 독해, 비평이라는 행위는 추적과 해석에 불과하며 우리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 고고학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는 셈이다. 처음과 같은 말이지만, 예술에 참여하는 것은 고고학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4.

예술 또한 어떠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예술이 행위라면, 엄밀하게 말해 ‘예술함’만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은 대체 무엇인가? 예술할 때 발생하기 마련인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예술하기 중에서 적어도 글쓰기에 관해서는 그 대답을 내놓고 있다.「저자의 죽음」(1968)과 「작품에서 텍스트로」(1971)에서 바르트는 저자라는 공고한 관념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독자를 세움과 동시에 작품에서 텍스트로 옮겨간다. “저자는 책을 부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책 이전에 존재하고, 책을 위해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그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자신의 작품과 선행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와 반대로 현대적인 필사자scripteur는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저자의 죽음」, p.31,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강조는 원문.) 저자-작품에 대한 거부는 글쓰기가 더 이상 “기록·확인·재현·묘사의 조작”이 아닌 “수행동사verbe performatif”(같은 글, p.31.)와 같은 것이 되게 한다. 텍스트는 “그 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며,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같은 글, p.32.)이며 즉 그것은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같은 글, p.34.) 작품은 “보여지는 것”, “손 안에 쥐어지”는 것인 반면 텍스트는 “증명되는 것”, “언어 안에서 유지”되는 것이다.(같은 책 중「작품에서 텍스트로」, p.39.) 작품은 “하나의 기의로 닫혀지”며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일반적인 기호처럼 작용”하는 것이나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후퇴를 실천한다. 텍스트는 지연시킨다.”(같은 글, p.41.) 그러나 작품은 전근대적인 글쓰기(의 결과)이며, 텍스트는 오늘날의 전복적인 글쓰기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오래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텍스트가 있을 수 있으며, 오늘날의 문학적 산물 안에서도 전혀 텍스트가 아닌 것이 있다.”(같은 글, p.39. 강조는 원문.)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트가 일종의 “인식론적인 이동”(같은 글, p.38.)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것(“소비의 대상”인 것)에서 “유희하기·연주하기jouer”(같은 글, p.45.)의 대상이자 그 수행 자체가 될 것을 알아보고 그것으로 옮겨가서는 작품이라는 것을 버린다.
같은 것을 글쓰기가 아닌 다른 예술하기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텍스트가 현실(실재)reality에서 떼어 온 “인용들의 짜임”이라면, 이제 텍스트를 문자가 아닌 다른 매체medium로 예술하기에까지 확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순수한 창조라는 것은 없으며, 현실의 어떤 부분을 떼어다 붙이는 것만이 가능하고, 매체의 선택 또한 현실/실재의 어떤 면을 추출할 것인지에 관한 전반적 선택에 다름 아니라면 말이다. 텍스트란 현실의 파편을 떼어와 짜고 얽는 콜라주collage이다(텍스트는 어원적으로 직물 또는 짜임이다). 그것은 현실/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실재)에 접속하며, 그 자체로서 현실/실재에 접속하는, 꼬여있는 복수의 통로이다.
(문자 언어와 사진들이 얽혀서 하나의 텍스트를 이루는 일은 이제 흔하다(제발트 W. G. Sebald의 책에서 사진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문자 언어, 문학적 서사구조와 그림이 결합한 만화라는 양식은 예술적인 것을 솟아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탁월한 매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 또한 여러 매체가 결합한 것이고, 한 영화 텍스트는 영상, 음악, 언어 등이 짜여짐으로써 만들어진다. 회화나 조소 또한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낼 수 있으며, 설치 예술은 단일한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텍스트로서 읽어낼 수 밖에 없다. 예술하기를 기존의 범주로 묶어낸다는 것은 갈수록 불필요해지고 있다. 오늘날 예술하기는 텍스트-하기이다.)
 

5. (1)

텍스트-하기는 실재(의 일부)에 빠짐없이 대응하는 사전 편찬하기가 아니다. 텍스트를 짓는 일은 애초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거나 묘사하는 것을 겨냥하지 않는다. (예술이 현실/실재의 재현이라는 생각은 현실이 빈틈 없는 전체로, 원본과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적인 감각, 판단, 인식과는 달리, 현실 혹은 실재-사실들은 결코 전체화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실재-사실들에 대한 어떤 효과를 겨냥한다. 텍스트는 그 어떤 것과도 동일하기를 거부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실재에 이질적이다. 텍스트는 “복수적인 환원 불가능함”이며, “차이로서만 반복될 수 있을 뿐인 차이”이다.(위의 책,「작품에서 텍스트로」, p.42.) 그러므로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치 낙타의 얼굴, 사슴의 뿔, 토끼의 눈, 뱀의 몸통, 사자의 머리털, 물고기의 비늘, 매의 발, 소의 귀를 가지고 용을 상상하는 것처럼) 현실/실재의 파편들의 배열에서 허구적인fictional이 솟아난다.
텍스트가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갖지 않고 자립을 꾀할 때, 텍스트 속에서 허구적인 것이 솟아난다. 텍스트에 서사narrative가 스며들 때, 혹은 텍스트의 어떤 부분이 서사화될 때, 그것은 허구적이 된다. 혹은, 허구적임으로써 서사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사-텍스트(화자가 생겨나는 텍스트)는 또한 허구fiction-텍스트이다.
허구-텍스트는 진지한 능청스러움이다. 그것은 실재의 파편들로 허구적인 사건들의 체계(허구적인 인물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들의 체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를 구성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건들은 일어난 적이 없으나 이 상상된 혹은 가정된 사건들에 대한 사실들의 표현들(문장들, 혹은 그에 상응할 만한 텍스트의 요소들)이 실재의  파편들에 기대고 있다. 이 표현들 각각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표현들이 거짓인지에 대한 판단은 미뤄지며, 의미는 유예된다. 그리고 다음 표현들(사실들, 사건들)로 넘어간다. 인용의 출처를 묻지 않는 인용, 혹은 지속되고 반복되는 가정법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화자narrator라고 부르며, 이것이 씨실과 날실 사이의 마찰력을 제공한다. 사실들은 내적으로 얽히고 상호보완하는 정합의 체계, 즉 서사를 만들고 그리하여 텍스트를 지탱한다. 허구-텍스트는 실재-사실들을 이용(변형)하여, 그것으로부터 양분을 빨아들여 그것과 독립된 별개의 구조물을 발생시킨다.
그리하여 허구-텍스트는 현실/실재 속에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텍스트를 이루는 표현들이 말하는 사실들은 꾸며낸 것이다. 그것들은 실재-사실들과 충돌하여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 공간은 남는다. 이 공간은 화자와 서사라는 두 면 사이의 긴장과 진동으로 발생하는 공간이다. 서사가 충분히 정교할 때,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의 이질성을 현실에서 작동하는 이야기story — 인물화된 관념들이 인과관계로 짜인, 관념들과 관계하여 관념들을 재생산하는 인식의 틀 — 와의 대결 속에서 증명해낼 때, 이 공간은 하나의 문제제기로서, 붕괴되지 않고 남는다. 텍스트가 그 모든 가정법을 철회한다고 할지라도 이 공간은 주인 없는 목소리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이 목소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런 순간이 있다는 것, 이런 삶도 있다는 것, 이런 행위 혹은 선택도 있다는 것. 이것은 우리의(당신의) 삶이 될 수도 있었던 모습이라는 것. 이것은 주장이라기보다 차라리 물음에 가깝다. 혹은 정식화된 물음 이전의 것, 이를테면 의문, 의심, 불안, 불확실성 — 현기증이다.
텍스트가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던 이질적인 것을, 그 격렬한 면역반응에도 불구하고 실재-사실들이라는 다양체의 접혀있는 한 구석에 박아 넣을 때, 화자-서사가 현실 속의 이야기story와 관념들의 작동을 잠시 멈추게 할 때,  예술성과 동시에 정치성이 발생한다.
 

5. (2)

텍스트-하기는 텍스트를 짓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작품’이라는 말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텍스트는 완성된 것, 그 자체로 닫혀있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텍스트는 행위함이면서 또한 경험함이다. 텍스트를 읽는 것은 텍스트를 짓는 것과 바짝 붙어있다. 어떤 텍스트는 특정한 텍스트들에 대한 독해로 짜여진다. 대상을 갖는 텍스트를 비평-텍스트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비평-텍스트는 허구-텍스트에서 솟아난 의문, 의심, 불안, 비동의, 불확실한 것……을 물음으로 구체화하고 나아가 문제들을 정립하고 문제들 속에 물음을 위치시킨다. 또는 (다른) 비평-텍스트에서 제기된 물음에 변형을 가하거나 그 물음을 폐기하고 새로운 물음을 세운다. 동시에 텍스트들을 소환했듯이 현실을 찾아간다. 혹은, 텍스트와 현실을 초대하여 아주 가깝게 앉히고 대면시킨다. 비평-텍스트는 관념을 좀 더 자유롭게 사용하며, 실재-사실들 속의 관념들 간의 관계를 좀 더 직접적으로 겨냥할 수 있다. 비평-텍스트는 형실/실재의 어떤 것이 — 가능한 사실들이 — 현실/실재의 다른 부분 — 만연한, 전형적인 사실(관념)들 — 을 공격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비평-텍스트의 예술정과 정치성의 쌍이 발생한다.
이제 우리는 예술이 먼저 있어서 비로소 비평이 가능해진다는 관점으로부터 벗어난다. 비평-텍스트-하기(짧게, ‘비평하기’ 혹은 ‘비평’)의 대상은 비평이 수행되는 뿌리인 현재성으로 급격히 소환되고, 그 대상은 이제 혼자 떨어져서 고고하게 존재할 수 없다. 현재성은 복수의 텍스트의 상호 충돌·연합·배척……에 대한 비평의 가능성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비평은 그 대상을 다른 대상들 속에 자리매김하는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현재성에 대한 검토이다. 비평은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비평-텍스트는 ‘오늘, 여기’에 가장 밀착된 텍스트-하기이다. 그러므로 비평-텍스트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불릴 수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단명의 텍스트이다. 감상과 독해라는 ‘반응’이 실재-사실들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행위가 비평이라면, 그것은 이제 자신 또한 감상과 독해, 나아가 비평의 대상으로 던져지기를 기꺼이 기대한다. 이제 우리는 비평과 비평의 대상이라는, 편의상 섣부르게 도입한 구분을 폐기한다. 오직 어떤 순환 혹은 순환들의 장이 기능한다.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들 속에, 그리하여 현재성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곧 (새로운) 텍스트(즉 비평-텍스트)의 지어짐이기도 하다. 이때 예술성과 정치성이 동시에 발생한다. 텍스트의 예술성은 ‘작품’ 속에 있으며 발견되어야 할 것이 아니며, 텍스트가 현재성 속에, 텍스트들 속에 자리매김함이라는 텍스트의 지어짐과 함께 발생하는 것이고, 정치성과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예술성(여기에서 예술성은 그저 심미적 효과의 발생이 아니다)과 정치성(여기서 정치성은 어느 한 이념을 옹호하거나 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은 하나의 쌍을 이룬다. 이 쌍은 한쪽 면 없이는 다른 쪽 면도 힘을 얻지 못한다 — 일어나지 않고 작동하지 않는다.
 

6.

텍스트는 작동한다. 그리고 텍스트들은 서로 관계맺는다 — 비평한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작동하는 것이면서 또한 수행함이다. 그러므로 허구-텍스트와 비평-텍스트는 범주적 구분이 아니다. 예술하기의 방식 혹은 텍스트가 기능하는 방식이 이 두 경우로만 양분되는 것도 아니다. 두 계열은 서로 얽혀있다. 얽혀서 작동한다.
텍스트는 우리의 삶과 현실/실재가 원만하게 작동하도록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잠시 멈춰서게 만든다. 예컨대 도덕과 도덕 사이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사이에, 정의와 정의 사이에 끼이게 만든다. 혹은 이 선택과 저 선택 사이, 이 삶과 저 삶 사이에. 그 모순이 너무나도 집요할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형식 자체가 증발해버린다. 텍스트의 정치성이란 이와 같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로부터의) 끊임없이 미끄러지기이다. 이때 텍스트의 정치성은 어떤 것에 반하여 다른 어떤 것을 옹호하는 정치성을 훌쩍 뛰어넘는다.
예술하기, 즉 텍스트-하기는 기존의 이야기, 담론, 관념 들로 포섭되지 않는 최초의 것, (같은 말이지만) 유일하게 독특한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며, 돌연변이의 발명(출몰이 아니라 발명)이다. 그런데 ‘발명’이라는 말은 흔히 오해되듯 기발한 영감으로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고 정교한 짜깁기이다. 텍스트-하기는 곧 전에 없던 감각, 전에 없던 감정, 전에 없던 정서, 전에 없던 어법, 전에 없던 선택, 전에 없던 행위……를 발명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의 모방이나 재현, 현실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불온을 삽입하는 것이며, 불온이 작동게끔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재-사실들이라는 다양체multiplicité의 접힌 면에, 꾸며진 사실들로 보호된 어떤 사실, 말해진 적이 없어서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던 어떤 사실의 면을 삽입하는 것이다. 텍스트가 작동한다. 불온이 작동하며 자기의 작은 정치들을 일으킨다.
(현실에 비-차이적인in-different 것은 현실의 이야기, 담론, 관념, 판단……의 면과 ‘동일하게’ 놓이게 되며, 그러므로 자기의 작은 정치들를 일으키지 않는다.)
 

7.

텍스트는 현실/실재의 한 축이 작동하는 것을 중지시키도록 작동한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도 멈춘다. 멈추도록 작동하여 작동을 멈추는 것, 이것이 텍스트다. 그런데 텍스트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텍스트이다. 텍스트를 호출하는 텍스트들,  복수의 텍스트들이 서로를 읽는다-연주한다-비평한다-작동시킨다.
텍스트를 짓는 일은 전에 없던 예술성과 정치성의 쌍을 발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비평하기란 텍스트를 호출하여, 혹은 텍스트들의 연합, 배척, 충돌, 교접, 배치로 예술성과 정체성을 오늘, 여기에서 재발명하는 일이다. 아마도 이 두 작업은 서로 다른 것, 구분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시(재-)’란 ‘새롭게 한 번 더’와 같은 말인 셈이므로.
 

8.

삶의 헛됨, 삶을 구성하고 삶을 작동하게끔 하는 모든 것들의 헛됨을 지켜보면서,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세계 속에 엄연히 남아있는 폭력을 두고 자신과 무관하다고, 자신은 무죄라고 회피하지 않고 자신과 폭력의 친연성을 들춰내면서 그 폭력에 반대하고 반항하는 것…… 제게 글쓰기는 그곳을 향해있는 것 같습니다. 모순을 지탱하는, 삶을 살아내는 한 방법……
 

9.

예술하기란 예술적 사유의 실행/실천이다. 예술적 사유는 관념(혹은 서사, 담론, 이야기, 이미지, 판단 도식……)의 전복을 꾀하여 그것을 해체하거나 그에 맞선 관념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우리가 실제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들이 어떤 허위의 액자 속에서 보존되는지를, 우리는 현실 — 이 말의 본래적 의미와 세속적 의미 둘 다에서 — 에 어떻게 매여있고 또 그것을 꿈꾸거나 증오하는지를 드러내며, 나는 어떻게 현실과 결탁하여 나를 만들어내고 내가 나를 들여다볼 때 어떻게 나 자신(자기)를 상실하거나 연민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옹호하거나 파괴하는지를 드러낸다. 그것은 문제와 문제 사시에 물음을 끼워넣는 작업, 그리고 그 물음을 (다시) 묻는 물음이다. 즉 그것은 대치하는 관념들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중립을 지키는 것도 가치 판단의 항복을 선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적극적으로, 정교하게, 집요하게 불온으로 남기이다. 우리가 멈춰설 수밖에 없는 지점까지 나아가 그 광경(환원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이다. 이데올로기는 특정한 몇몇 관념들을 특권화한다. (‘국가’, ‘민족’, ‘가족’, ‘모성’, ‘순결’, ‘시장’, ‘노동’ ……) 그리하여 그것들이 개별적이고  실제적인 삶(혹은 삶들)을 넘어서게 만든다. 그때, 이데올로기는 그저 적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예술적인 것은 적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만일 세계의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권력의, 이데올로기 혹은 문화의, 일상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작품’이 있다면, 그 고발 자체에서는 예술성이 솟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치열한 균형잡기 혹은 모순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정직성에서 예술성과 정치성의 쌍이 솟아난다. 그렇게 할 때 그 자체로, 그 ‘안’에서 차이(들)인 삶이, 개별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어떤 면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적인 것은 치열한 실존에도 지난한 실천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개인의 깊은 고독에도 주체들의 감동적인 연대에도 자라잡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분열과 비약 사이에, 현기증의 순간에, 실제와 허구가 찢어진 틈으로 스며들어 섞이는 찰나에, 삶이 우리가 진짜라고 믿었던 이 삶의 바깥을 찾아 나서지만 삶의 너머란 없어서 고작 삶의 지평선이 되어 번쩍이는 순간에 있다.
 

10.

……돌 하나를 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비겁하지 않으면서 삶에 비겁하지 않으려고.

단현
danhyun0124@naver.com

One thought on “작동하는 불온들, 서로를 읽고 연주하는 낙서들

  1. 그러나(그런데) 정치성을 적극적으로 발생시키는 예술이 지금 여기에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지금이 아닐까. 사실은 ‘항상’이 아닐까.
    그러니까, 그 모든 ‘사이’와 ‘지연’이 아닌 방식의 정치성은, 그 쌍으로서의 예술성은, 확보될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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