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작가의 『꾿빠이, 이상』(문학동네. 2001)은 적잖은 매력이 있는 텍스트다. 그의 상징적 스타일인 주석 달기로서의 글쓰기와 천재 작가 이상이라는 소재가 만난 시점에서 이미 반칙이다. 이상에 얽힌 비밀을 탐구한다는 스토리 자체도 재밌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스토리를 추동하는 질문 자체에 이런저런 가지를 칠 만한 풍부함이 있어서도 좋아한다.

오늘 이야기는 이 질문에 관한 것이다. 가지를 두 개 치려 한다. 합쳐지지 않고 갈라질 테지만, 한 줄기에서 나온 두 개의 가지다. 그리고 이 글은 단현의 글과 많은 부분에서 관련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선 관련 있을 수도 있겠다고, 미심쩍은 여지를 붙들고 싶다.


1.1.

소설의 1부는 기자 김연화에게 이상의 데드마스크에 관한 제보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이 데드마스크로 말할 것 같으면(참 김연수스러운 문장이다, 깔깔) 데드마스크를 뜬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러 증언들이 엇갈리고 있는 논란의 물건이다. 혹시나 이 글에서 관심이 돋아 직접 읽어볼 이들을 위해 괜히 자세하게 얘기할 생각은 없고, 요는 이 정도다:

이상의 임종 날, 그러니까 데드마스크를 뜬 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이 적잖이 엇갈린다. 누군가는 길진섭이 데드마스크를 떴다고 하고 누군가는 조우식이 데드마스크를 떴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정확한 증언을 해 줄 사람들은 모두 북한에 있거나 죽었다. 게다가 누구의 증언이 맞다고 볼 것인지에 따라 어떤 쪽도 진실이 될 수 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제보자는 데드마스크를 뜬 사람으로 길진섭도 조우식도 아닌 제3자를 거론한다.

김연화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거 맞냐. 기사 써야 하냐. 문제는, 미지수가 식보다 적은 부정방정식처럼, 어떤 증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 데드마스크가 진짜일 수도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연화는 고민 끝에 데드마스크가 진짜라고 결론 짓고 기사를 쓴다. 그리고 소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제보는 사기였다! 김연화는 회사를 그만두고 경찰 조사를 받는다. 그런데 1부의 끝에서 김연화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다.

“문제는 거기에 있어요. 진짜라고 생각하면 가짜인 듯하고 가짜라고 생각하면 진짜인 듯하단 말이죠. 요컨대[…] 문제는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는 것이죠. 보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 이상과 관련해서는 열정이나 논리를 뛰어넘어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진짜라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진짜인 것이고 믿기 때문에 가짜인 것이죠.”

83p

보는 바에 따라서,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진짜일 수도 가짜일 수도 있는 무엇. 나는 여기서 우리가 마주치는 수많은 질문들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데드마스크에 관한 완전정보가 주어졌다면 이런 고민은 필요없다. 그러나 완전정보라는 게 그리 쉬운가. 이래뵈도 경제학도라, 완전정보라는 건 가정에나 들어가는 거지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님을 오랫동안 배웠다. 우리가 마주치는 질문들은 대부분 구멍을 포함한 부정방정식과 비슷하다. 이상의 비밀과 비슷하다.

1.2.

단편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문학동네. 2005)도 재밌는 김연수 소설 중 하나다. 6·25 서울 수복 이후, 인민군의 서울 점령 기간동안 그들에 동조했다는 죄로 처형되기 직전의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소설 전체가 형장에 묶인 그 여인의 최후 변론이다. 아니 아니, 변론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까운 넋두리라고 해야겠다.

언뜻 이 여인의 변론은 ‘너는 적치에 부역했느냐 아니냐’에 대한 답으로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정황만 놓고 봤을 때는 일이 명확하기도 하다. 여인과 그의 전 남편(A라고 하자)이 인민군의 형장에 묶여 자아비판을 요구받았을 때, A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었고 여인은 A의 시체에 침을 뱉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고 살아났다. 거 의심의 여지 없는 부역자다.

하지만 그렇게 뻔하다면 소설일 리 없지. 여기엔 기구한 사연이 있다. 이전 A가(와) 사랑에 빠졌던 여자 김혜실이 인민군 간부로 떡하니 나타났던 것이다. A는 여인의 집에 숨어 지내다가 김혜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백주대낮에 광장으로 나선다. 그래서 체포된 거고, 여인도 A 때문에 같이 잡힌 셈이고. A의 억장이 무너질 만하지 않나.

A와 함께 살아남겠다는 생각에다 김혜실에 대한 질투까지 더해져, 여인은 자아비판 대신 김혜실과 A와의 관계를 폭로하려 한다. 그런데 A가 여인의 말을 끊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버린 거다. 김혜실을 덮으려고. 그러니까 여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세 번 모두 외치고 살아난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일이다.

그러면 이건 참, 이 여인은 적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게 맞나. 이 여인의 죄목을 뭐라고 해야 하나. 이 사건은 어떤 문장으로, 어떤 진실로 정리돼야 하나. 생각하다 보면 소설의 이런 결말만 아무래도 기억에 남게 된다.

부역자 척결에 바쁘신 여러분들이야 진실이야 어찌됐건 겉으로 드러난 악질들은 모두 잡아죽이겠다고 생각하겠지만서두 이 야수와 같은 시대에는 제아무리 벌건 대낮이라고 해도 아무런 진실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진실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 또 저는 이 마당에 어떤 말을 남기고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까페 여급과 무모한 사랑에 빠졌던, 그리하여 저를 버린 얼빠진 지아비 덕분에 적극부역자 아닌 적극부역자가 돼 이렇게 죽게 됐다고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죽게 됐다고 해야겠습니까? (“거총!”) 저는 뭐라고 외치며 죽어야만 하겠습니까? 제발 알려주십시오. 제발. (“발사!”)

249-250p

소설의 제목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이런 일본어 문장에서 왔다: “백주의 작열하는 햇살 속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 편린의 진실도 건질 수 없다”(245p). 이 대목에서 나는 뜬금없게도 밀란 쿤데라의 『커튼』(민음사. 2012)에 나오는 문장을 떠올렸다.

돈키호테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질녀가 먹지 못하거나 가정부가 마시지 못하거나 산초의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짧은 순간 동안 이 문장은 삶의 산문성을 가리는 커튼을 살짝 걷어 올린다.

25p

나는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가 삶의 산문성에 관한 하나의 예시인 것만 같다. 부역자냐 아니냐로 정리되지 않는 사건을 가만 생각한다. 혹은 죽음 직전에 살려주십시오,가 아니라 알려주십시오,라고 외치게 되는 사연을 생각한다. 삶의 산문성, 어쩌면 산문의 삶됨을.

삶은 영웅에 관한 서사시가 아니어서, 주인공이 죽는대도 아무렇지 않을 질녀와 가정부와 종이 있다. 또 삶은 이데올로기로만 정의되지 않는 거여서, 사랑 때문에 적에 부역하는 이도 있다. 삶에는 예/아니오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정확한 인과로, 일목요연한 항목으로 나타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백주대낮의 밝은 빛 아래에서도 진실 하나 없이 고개를 떨궈야 할 때가 있다.

무엇이 진실이냐,를 물을 때 우리는 가끔 세계에 난 커다란 구멍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진실이 하나의 잣대로 정리되지 않고 어쩌면 진실이라는 게 있긴 한 건지조차도 알 수 없는 경우다. 이 데드마스크는 진짜냐. 내가 그렇게 믿는다면 진짜다. 나는 무슨 죄목으로 죽어야 하는 것인가. 이유 같은 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소설은, 아니 정확히 하자면 좋은 산문성을 담아낸 소설은, 힘이 세다. 산문으로서의 소설은 이따금 삶의 구구절절한 잉여를 평평하게 복원한다. 그럴 때 어떤 위대함을 보인다. 위대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미심쩍음을 똑바로 느끼게 해 준다.

이거 참 미심쩍은 문장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기까지. 내가 준비한 첫 번째 가지는 여기서 끝난다.

2.1.

『꾿빠이, 이상』에는 이런 에피소드도 나온다. 1936년 3월경, 종로에서 열린 김기림의 출판기념회에서 최재서와 김문집이 이상을 만난다. 이 날 최재서는 이상의 기괴한 스타일이 인위나 헛것이 아닌, 이상의 진지한 문학적 포즈로서 설득력을 가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문집은 반대로, 이상의 스타일이 흔한 반동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게 됐다. 그러니까 한 날 한 시에 이상을 만난 두 비평가가 이상에 관해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이다.

오늘의 두 번째 가지는 여기서 시작한다. 이상은 그렇다면 천재인가, 사기꾼인가? 에피소드의 화자 김연화는 이번에도 알쏭달쏭한 코멘트를 남긴다.

바로 이 부분에 이상 문학의 본질이, 더 나아가 이상의 모든 유품의 본질이 숨어 있다. 똑같이 김기림의 『기상도』 출판기념회에서 이상과 만났으면서 한 사람은 이상을 믿게 됐고 한 사람은 믿지 않게 됐다는 점. 요컨대 이상과 관련해서 모든 진위 판정은 실증과 논리와 이성을 넘어 단지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 / 이상을 믿는다면 그의 작품은 필연성을 띠게 되고 이상을 믿지 않는다면 단순한 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16p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이상을 천재 예술가로 알고 있다. 김연화의 말대로라면, 이상의 위대함은 논리나 이성(굳은 문학·비평적 토대)이 아니라 이상에 대한 믿음 위에 쌓여온 건가. 생각해 보면 이런 애매함은 새로운 예술적 조류가 기존의 것들과 반목할 때마다 생겨왔다. 다다이즘을 사기라고 불렀던 이들도 있고 플로베르를 미천하다고 폄하했던 이들도 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그들은 사기꾼이 아니라 예술사의 족적을 남긴 자로 기록됐다.

여기서 신경 쓰이는 질문은 이런 거겠다.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텍스트가 아닌가? 하나의 텍스트를 놓고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의 텍스트에 하나의 결론,을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텍스트,를 포기해야 하나?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의 여인이 부역자였느냐 아니냐를 묻는 일과 이상이 사기꾼인지 아닌지를 묻는 일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2.2.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은 한국 전문독자(평론가들) 사이에서 적잖은 논란을 일으켰다. 한 편에는 지금-여기의 요구에 힘입어 이 작품의 성과를 드높이는 이들이 있었다. 다른 한 편에는 소설로서의 미학적 미진함을 들어 제동을 거는 이들이 있었다.

감히 그 중심에 있는 질문을 정리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은 좋은 소설인가 아닌가’가 될 거다. 당연한 정리인 듯싶지만 무용하지는 않다. ‘좋은’ 소설이냐 아니냐가 문제고 좋은 ‘소설’이냐 아니냐도 문제다. 소설이라는 한 장르의 경계를 묻는 일이기도 하고 소설 안에서 ‘좋음’의 기준이 무엇이냐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한 평자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통계 자료까지 동원하는 디테일을 통해 지금 절실한 전언을 전달하는 ‘사실의 힘’을 발휘한다. 이건 부정할 수 없이 중요한 미덕이다. 그러나 이 디테일을 포함한 작품의 몇몇 요소들은 자연스럽게 정합하거나 플롯상의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는 등 ‘소설의 미덕’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고, 이는 오히려 ‘실효성’을 침해한다.

이 글에 대한 반론 하나는 이렇다.​†​ 이 작품이 소설의 미덕에서 벗어나 있을 순 있다. 하지만 지금-여기의 삶이 문학과 관계하는 방식은 여태까지와 다르다. 그간의 미학적 틀로 이 작품을 판단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미학적 성취를 달성하면서도 좋은 전언을 담는 일은 이상적이지만 요원하다. 그걸 기다리기에는 현실이 비참하고 우리의 분노가 크다.

근데 이런 식이라면 공회전인 것만 같다. 최소한 내게는 미심쩍다. 두 입장은 소설의 ‘좋음’의 기준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통약불가능한 두 갈래다. 지금 중요한 소설이지만 좋은 소설은 아니다, 혹은 소설로서의 좋음은 아니다,라는 게 한 쪽이다. 좋은 소설은 아닐 수 있지만 지금 중요하니까 좋다고 하고 싶다,라는 게 다른 쪽이다. 이 두 ‘좋음’은 양립가능하다. 다른 기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입장은 통약(비교)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다른 기준을 가졌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논쟁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하겠다. 무슨 기준을 적용하느냐가 문제다. 그런데 어느 기준을 적용해도 함정에 빠진다. 텍스트의 내재성에 함몰되거나 소설이라는 장르의 미학을 양보하거나. 양쪽 다 미심쩍다. 이래서야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온당한 비평이 가능한가. 하나의 비평이란 건 환상인가.

그런데 질문을 살짝 비틀어 보면 이럴 수도 있겠다. 독자들이 다른 소설(의 좋음)을 요구할 때 소설은 그걸 따라가야 하나. 그간과는 다른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 그래서 소설의 미학도 달라지는 것인가. 오늘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려 한다.

내가 참조하는 건 이런 입장이다(내 생각으로는 앞서 얘기한 두 입장을 성공적으로 절충하는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은 다수가 자기를 기입할 수 있는, 발화의 오리지널리티를 해체한 문체의 출현이다. 새로운 소설적 형식이라는 거다. 하나의 관점으로 플롯을 구성하는 화자가 이 작품에는 없다. 소설의 발화는 확실한 타자가 아니라 독자들이 자기투사할 수 있는 주체-공간의 것이다. 이 소설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거기에 있다. 작품의 미학적 미진함,이라고 여겨지는 빽빽한 디테일과 평평한 플롯 등도 이 형식에 결합하고 이를 보완한다.​‡​

생각건대 예술의 형식은 인간의 존재 조건·양상과 맞닿아 있다. 지금-여기에서 읽고 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무엇을 욕망하는지에 따라 형식은 변화(발전이 아니라)한다. 시공간의 한 점에서는 한 형식이 우세할 수 있다.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어떤 본원적인 근간이 요구하는 형식도 있을 수 있다. 길이 남는 건 후자겠지만 전자를 폄하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미학은 인간과 함께 변화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텍스트는 단수가 아니다. 텍스트의 판단은 텍스트 앞에 선 우리가 누구냐는 질문 뒤에 온다. 이 질문에 관련된 텍스트는 셀 수 없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혹은 이 작품이 상정하는 독자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어떤 존재인지를 관건으로 한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가능하다면 작품에 대한 하나의 대답도 가능하다. 중요한 건 이 욕망에 관한 문장일 거다.


『꾿빠이, 이상』의 재밌는 점 하나를 아껴뒀는데 이쯤에서 풀려 한다(이쯤 되면 이 글도 플롯을 가진 소설이다). 이 데드마스크는 진짜인가,라는 질문에, 김연화도 사실 자기의 욕망을 기입했다. ‘데드마스크가 진짜라고 믿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다: 그가 사랑하고 있던 연인 정희의 현 남편이 그를 찾아와 물었다. 그 사랑 ‘진짜’입니까? 정희는 나도 사랑하고 당신도 사랑한답니다. 김연화는 함정에 빠진다. 진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정희는 다른 사람도 사랑하고 있다(아 물론 어떤 사람들에겐 안 통하는 함정이지만 오늘만큼은 이 20년 된 소설의 감성에 공감해 보기로 하자).

그러니까 김연화에게 자기 사랑의 진실됨을 증명하는 일과 데드마스크의 진위를 증명하는 일은 비슷해보였을 법하다. 그래서 데드마스크가 진짜라는 정황에만 집중한 거다. 데드마스크가 ‘진짜 진짜냐’,라는 문제랑은 완전히 다른 층위다. 믿고 싶어서 믿기 때문에 진짜다. 다시 말하건대 내게는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이 비슷해보인다.


  • 김연수. 『꾿빠이, 이상』. 문학동네. 2001;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비. 2005.
  • 밀란 쿤데라. 박성창. 『커튼』. 민음사. 2012.
  • 조강석. 2017. “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39778 (20.5.13. 확인)
  • 조연정. 2017. “문학의 미래보다 현실의 우리를”,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0590 (20.5.13. 확인)
  • 김미정. (2017.)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2017년 한국소설의 안팎」, 『문학들』50, 17`가을.

  1. ​*​
    조강석, 2017.
  2. ​†​
    조연정, 2017.
  3. ​‡​
    혹시나 해서 덧붙이건대, 내 글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좋은 소설이다,를 주장한 것은 아직 아니다. 그건 역량과 지면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 글은 문학 작품에 관한 판단가능성을 요지로 한다. 형식이라는 통약가능한 분모를 가지고도 이 책에 관해 협소하지 않은 온당한 비평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파상
studien61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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