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론

실재성 논제

우리는 단일한 실재를 공유한다고 주장하길 원한다. 정확히는, 실재에 관한 기술을 공유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만일 나와 내 옆의 다른 합리적 존재자가 서로 다른, 다를 뿐 아니라 통약될 수 없는 그러한 기술들만을 실재에 관해 갖는다고 간주하는 것은 무척 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간주는 나와 내 옆의 사람 사이에 있는 불일치를 중재할 수 없게 만들며, 이는 실질적인 대화 자체가 불가능함을 함축하고 만다. 이러한 계기에서 우리는 모종의 실재론적 입장을 취한다. 분분한 분석들을 제쳐두고 나는 실재론의 중심 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자 한다:

(R) 어떤 단일한 계열의 객관적 사실이 세계에 관한 모든 판단들의 기준이 된다.

지면이 지면이니, 한가지 점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 논제는 단현이 지난 글들에서 보였던 존재론적 그림에서도 성립한다. 가장 최근의 글에서 그는 다음 둘을 주장한다: (1)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사건이며, 이것만이 인과관계의 항이 될 수 있다; (2) 세계가 인식되는 단위는 사실이다. 이 두 논제로부터 구성되는 세계상에서도 위의 논제가 성립한다. 세계에 관한 모든 기술들의 기준이 되는 것은 사건들로 이루어진, 인과적 사실들이다. 다만 비인과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사실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 곧 인과적 사실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여하간, 세계의 관한 기술들의 기준은 근본적으로는 인과적 사실이 된다.

그런데 위의 논제는 사실 애매하다. 그것이 인식적 원리인지, 형이상학적 원리인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다시 다음 둘로 나누어져야겠다:

(RM) 세계에 관한 모든 기술들에 있어 그것을 참이게 하는 것은 어떤 단일한 계열의 객관적 사실들뿐이다.
(RE) 세계에 관한 모든 믿음들에 있어,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떤 단일한 계열의 객관적 사실들뿐이다.

일반적으로 RM과 RE는 함께 가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수학적 진술들에 대해, 누군가는 그것이 플라톤주의적인 이유에서 필연적 참이면서도 그것의 정당화는 우리의 증명 절차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증명 절차는 단일한 객관적 사실의 계열을 가질 필요가 없어 보이며, 이 경우는 RM만이 취해진 실재론자의 태도에 해당한다. RE만이 취해지는 경우는 가능할까? 실용주의적 실재론자는 그 경우 중 하나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세계의 실재성에 관한 믿음은 그것의 유용성이라는 객관적 이유로부터 참이면서도, 세계가 객관적인 단일체라는 주장을 참으로 만드는 어떤 객관적 사실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조금 더 복잡한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투명성 가정

그런데 R이 곧장 세계에 관한 기술을 단일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점이 다소 의심스럽다고 생각한다. 단일한 계열의 객관적 사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서로 통약 불가능한 복수의 틀로 표현될 수 있다면, 실재에 관한 판단은 단일해지지 않고, 이는 여전히 실재에 관한 불일치의 간극을 남겨두고 만다. 이러한 간극을 없애는 것이 실재론의 목표였으므로 우리는 R에 더해 그 간극을 없앨 가정을 추가해야만 한다. 나는 이 때 추가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이를테면 ‘투명성 가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T) 세계에 관한 모든 판단들의 형식은 그것의 기준이 되는 사실과 동형적이다.

이 역시도 위의 RM, RE와 쌍을 갖는 형태로 나뉘어 이해될 수 있다:

(TM) 세계에 관한 모든 기술들의 형식은 그것의 기준이 되는 사실과 동형적이다.
(TE) 세계에 관한 모든 믿음들의 형식은 그것의 기준이 되는 사실과 동형적이다.

일단 이 지면에서 M 유형의 논제와 E 유형의 논제가 갖는 차이를 명료히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는, R이 그럴듯하다고 할지라도 T가 문제되는 가정인 탓에 R과 T를 모두 지지하는 실재론자들, 즉 RT의 지지자들이 그들의 목표를 이루는 데에 실패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판단

양적 판단

양적 판단에서 발생하는 반례를 이야기하기 앞서 RT에 관한 사소한 반론을 생각해 보자. 서로 다른 언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일대일 대응이 불가능한 표현들이 있다. “에스키모 원주민의 언어에는 눈을 일컫는 말이 엄청나게 많다” 등을 말하며 언급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인류학적, 사회학적 사례가 이른바 사피어-워프 가설이라는 상대주의적 가설을 야기하긴 했지만, 이러한 사례에서 촉발된 입장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표현들이 정말로 번역될 수 없다고 하자. 그런데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고하지 않는가? 어떻게 우리의 원어로 이해될 수 없음에도 그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러한 계기에서 나왔던 상대주의에 대한 재반론은 데이빗슨의 1974년 논문 “개념적 도식이라는 바로 그 생각에 대하여”(Davidson 2008/1974)를 통해 일찍이 제기되었던 바 있다. 그는 개념적 도식에 따른 상대적인 세계 이해라는 상대주의자 또는 다원주의자들의 그림이 비정합적임을 지적한다. 그것이 정말로 상대적 내지 다원적이라면, 그것들을 비교할 공통 좌표계가 필요한데, 그러한 공통 좌표계의 존재는 이미 개념적 도식들이 “상대적인” 것이 아님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이는 RT에 관한 반론의 근거가 되는 그러한 사실 자체가 실존할 수 없기에 RT는 이에 관한 해명을 할 필요도 없다는, 아주 강한 반론이다.

그런데 퍼트남은 그의 1987년 논문 “진리와 규약: 개념적 상대주의에 대한 데이빗슨의 논박에 관하여”(Putnam 1987)에서, 데이빗슨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거부될 수 없는 상대주의 사례가 고안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무제약적 합성 원리”를 지지하는 부분전체론자들은 임의의 두 사물의 합이 또한 대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에 a, b, c라는 사물이 있을 때, 집합론자들은 “실존하는 것은 셋이다”라고 할 것이지만 부분전체론자들은 “실존하는 것은 일곱이다”라고 할 것이다. a, b, c, a+b, a+c, b+c, a+b+c가 그 목록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에 Hirsch(2002) 등에서 불리기로) “양화사 변이”라고 불릴 만한 현상을 이끈다. 양화사 변이란, 우리가 맥락에 따라 대상의 존재를 주장하는 방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예컨대 집합론자들과 부분전체론자들은 단순히 어떤 술어적 표현 따위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술어적 표현을 구속하는 존재 양화사의 적용 기준 자체에 관해 불일치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다시 데이빗슨은 말할 수 있겠다. 그 경우에도 사물들은 같지 않은가? 여기 어디에 불일치가 있는가? 사물들의 목록이 같다는 데에서 동의할 것이기에, 그들은 번역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이것은 상대주의라고 불릴 수 없지 않은가?

퍼트남과 허쉬가 지적하는 것은, 사물들이 같더라도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근본적 불일치가 있으며, 그 불일치는 집합론과 부분전체론에 모두 중립적인 그러한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부터 해소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둘 중 하나의 언어에, 다른 언어를 번역하는 규칙을 넣으면 되는 것 아닌가? 제러드 워렌(Warren 2015)은 그것 역시 통약을 옹호하는 데에 실패함을 지적한다. 그러한 규칙이 도입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단일한 존재 양화사(집합론적인 또는 부분전체론적인)만을 갖고 있던 언어에 또 다른 양화사 또는 그러한 양화사에 관한 번역 규칙을 도입한 언어를 재구성하는 행위가 된다. 이는 원초적인 의미에서 집합론적 언어와 부분전체론적 언어가 번역된다는 주장을 옹호할 수 없다.

양화사 변이에 관한 철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이 맞다면, 적어도 양적 판단에 관해 우리는 단일한 사실을 둘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하게 된다. 설령 불일치하는 두 사실 판단이 동일한 비구조적 사실, 또는 동일한 명제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 이 때 상정되는 그러한 사실이나 명제 따위는 단지 두 표현이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동치임을 말해줄 뿐, 그 사실과 명제가 어떻게 중립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질적 판단

이어서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른다. “양적 판단에 있어서 존재하는 상대성은 실로 사소한 것이기도 하고, 일상인들은 저러한 문제에서 불일치를 겪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되는 불일치는 질적 판단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질적 판단에서만큼은 중립적 토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질적 판단’이라는 표현은 늘 애매하게 쓰이고 있다. 그것은 가치에 관한 평가를 말하기도 하고, 사실에 관한 양적이지 않은 판단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 둘을 평가적 판단과 기술적 판단으로 나누어 불러 보도록 하자.

평가적 판단

평가적 판단을 할 때 실제로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 예컨대 주의주의emotivism라고 불렸던 운동을 선도한 일군의 영미철학자들은, 평가적 판단은 오로지 발화자의 평가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이 그렇게 강력한지는 의문스럽다. 미적 평가이든 윤리적 평가이든, 그것은 모종의 규정성을 지니는 탓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하거나 아름답다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윤리적/미적 상태가 적절하다는 것이며, 어떤 것이 악하거나 추하다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상태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 부적절성 주장은, 그것이 적절한 방향으로 재정돈되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규정성에서 끝난다면 그것은 별 문제가 안 된다. 단지 평가적 진술은 “너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라는 주관적인 명령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평가적 진술이 화행적 역할만을 한다는 응답이다. 그러나 이 응답은 평가적 진술의 진리적합성truth-aptness을 고려할 때 난감한 것이 된다. 우리는 평가적 진술을 단지 어떤 독단적 명령과 동등한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정말로 어떤 참인 것을 주장하는 것인 양 사용한다. 가치 평가에 관한 의견 대립이 존재하고, 쟁론이 존재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러한 논쟁상에서 우리는 각자의 의견이 참이거나 거짓이며, 특히 자신이 옹호하는 주장이 어떤 참된 평가적 사실을 대변하는 것인 양 행동한다.

평가에 관한 대립은 우리가 평가어를 사용할 때, 그 사용이 진리라는 객관적 요소를 소유하는 것으로 상정되면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이는 가치 판단 역시 R이 적용되는 논의 영역 안으로 포섭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일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고자 한다면, 물리적 사실과 달리 평가적 사실은 별도의 허구적 사실이며, 여러 허구들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공동체, 특히 정치적 공동체의 몫이라고 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응답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대체 그 공동체가 바로 그 허구를 고르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이유를 논하기 위해 공동체에서는 다시금 규정성을 갖는 주장들을 하게 될 것이며, 그 규정성의 근거가 될 허구가 또다시 정해져야 할 것이며 …. 그렇게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이 무한퇴행을 피하기 위해 채택될 전략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상황에 근거해서 실용적으로 어떤 허구를 고른다는 응답이다. 그런데 이 실용주의적 응답은 “오히려” 가치의 문제를 사실의 문제로 붕괴시킨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때 어떤 규정적 발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어떤 배경 상황일지 몰라도, 이미 그러한 배경 상황을 필요조건으로 갖는 규정적 사실에 관한 어떤 명제가 이미 “놓여진” 참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특히나 억압받을 때 페미니즘적 규정이 정당해진다”라는 주장을 실용주의자가 한다면, 그가 실제로 하는 주장은 “여성이 억압받을 때, 페미니즘적 규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라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평가적 판단으로부터 기술적 판단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최소한 평가적 판단 전체가 의미 없다거나, 그것에 관한 논쟁이 의미 없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는, 윤리적 판단과 미적 판단 등 규정성을 갖는 판단 일반이 모종의 사실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해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러한 판단들 중 의견 대립이 유의미해 보이는 유형의 판단들만큼은 사실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해야 한다(이 단락에서의 논의가 어떤 쓸모를 갖는지는 글의 말미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술적 판단

가장 먼저 문제시되는 것은, 우리가 기술적이라고 부르는 판단 중 애매한 경계사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네로는 잔인한 왕이었다”라든지, “원재는 무례하다”와 같은 표현은 오로지 기술적이지도, 오로지 평가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아무리 가치어를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저러한 문장들이 참이거나 거짓이 되는 조건이 있음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러한 문장들이 진술될 때 동시에 어떤 평가적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이 문장에서 사용되는 ‘잔인하다’, ‘무례하다’와 같은 표현을 오늘날 윤리학자들은 “두터운 어구”thick terms라고 부른다.

두터운 어구에 있어 그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가 일단의 문제가 된다. 누군가가 “네로는 잔인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과의 의견 대립은 가치에서의 대립인가, 사실에서의 대립인가? 또 다른 문제는, 두터운 어구에서 평가적 요소를 제외한 채 사실적 요소만을 뽑아내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다. 네로가 잔인한 왕이었다는 기술을 가장 무해하게 사실적인 것으로 바꾼다면, 무엇이 그것이 될 수 있는가? 실제로 그것의 대치는 “네로는 이러저러한 행동을 했다” 정도로 그칠 것인데, “네로는 이러저러한 행동을 했지만 잔인하지는 않았다”, “네로가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잔인했을 것이다”와 같은 주장이 부조리하지 않음을 생각하자면 그것이 정말로 허용 가능한 대치인지가 의문스럽다.

물론 쉬운 방법이 존재한다. 두터운 어구를 포함해, 평가에 관여하는 모든 어구를 기술적 판단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평가어와 온전한 기술어의 이분법을 포기하더라도, 온전한 기술어와 기술어로서 온전하지 않은 어구의 이분법을 유지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대해서도 일군의 형이상학자들은, 이 전략이 T를 옹호하는 데에 실패한다고 본다는 점이 문제이다.

허쉬(Hirsch 1997)가 제안하는 “이상한 언어”의 문제를 짧게 소개해 보자. 어떤 이상한 언어에서는 ‘초그랗다’와 ‘초안그랗다’라는 표현이 있고, 전자는 어떤 것이 초록색이고 둥글 때, 후자는 어떤 것이 초록색이고 안 둥글 때 참이 된다. 이 때 그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에게 우리의 말 ‘초록색이다’는 ‘초그랗거나 초안그랗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술어로 이해된다. 이상한 언어의 사용자는 우리의 개념 “초록색임”이 실제로는 근본적인 술어가 되지 못한다고 볼는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초그랗다”에 대해 생각하듯 말이다.

T가 옹호될 수 있다면 세계는 초록색 대상을 갖거나 초그란 대상을 갖거나 둘 중 하나이겠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둘 중 하나가 정말로 근본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위에서의 집합론자와 부분론자가 대립하는 지점처럼, 이상한 언어와 정상 언어의 사용자 사이의 대립을 봉합할 아르키메데스적인 점은 없어 보인다. 어떤 대상을 초록색이고 동그랗다고 하는 사람과, 어떤 대상을 초그랗다고 하는 사람 사이의 “진정한” 대립은 물론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사례는 R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사실이 단일한 방식으로 기술된다는 T는 부정되고 있다.

데이빗슨은 아마도 이런 경우에도 서로 다른 두 술어가 모종의 방법─요컨대 진리를 교량 삼아─으로 통약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만일 당신이 항해 중인 쌍돛범선을 보고 있는데 당신 친구가 “저 멋진 욜 범선을 좀 봐라”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해석의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자연스러운 가능성은 당신 친구가 쌍돛범선을 욜 범선으로 잘못 생각해서 거짓된 믿음을 가졌을 가능성이다. … 우리는 항상, 온당한 신념론을 유지하기 위하여 말을 유리하게 재해석하기로 하면서, 이런 식의 즉흥적 해석을 하고 있다. … 우리는 일치를 최대화하는 식으로 해석할 때 …, 다른 사람의 말과 사고를 최대한으로 이해한다.

Davidson 2009/1974, 313-315.

요는 이것이다. 애초에 타인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가 나와 동일한 실재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실재에 관해 우리가 해석 가능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따라서 실재에 관해 서로 이해 불가능한 그러한 방식의 대립이 있다는 생각은 아주 그릇된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만다면, 우리는 의사소통 자체를 회의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회의는 아주 잘못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응답이 논제 T의 옹호에 관해 어떤 적절한 변호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데이빗슨의 이러한 주장은 서로 다른 체계 사이의 번역이 가능하다고, 또는 서로 다른 체계가 동일한 사실들을 기술한다고 믿을 이유를 제공할 뿐, 그것들이 단일하고 더 근원적인 어떤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고 믿을 이유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친구가 언제나 쌍돛범선을 욜 범선이라고 부름으로부터, 그가 욜 범선을 쌍돛범선으로 부르기 시작해야만 한다는, 또는 그의 모든 기술 방식을 나의 기술 방식으로 바꿀 만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실재론의 공허함

지금까지 내가 지적한 점들로부터 우선 T가 부정된다. 즉 사실에 관한 단일한 기술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단적으로 거짓이다. 우리는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양화할 수 있고, 단일한 비언어적 사실을 하나의 언어로 통약 불가능한 여러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다. 또 그렇게 기술된 사실들에 대해, 평가적 차원에서 불일치를 가질 수 있다. 세 층위에서 일어나는 불일치는, 세계에 관한 단일한 기술 방식이라는 생각이 다소 공허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불일치 사례들이 R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R이 옹호될 때에나 불일치라는 생각이 지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유되는 실재가 없다면 다양한 양화나 여러 기술 방식, 평가의 대립 등은 단지 여러 세계를 우리가 갖는다는 점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례들이 R과 결합될 때에만 우리는 이 사례들을 진정한 불일치, 또는 진정한 기술의 다양성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논의는 T를 부정하고 R을 옹호한다.

그런데 R만이 옹호될 수 있다는 것은 문두에 언급했듯 “공유되는 실재”를 주장하는 이유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여러 기술들을 세계에 부과할 수 있는 탓이다. 동일한 상황을 어떤 사람은 세 대상에 관한 것으로, 어떤 사람은 여섯 대상에 관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동일한 상황을 어떤 사람은 초그랗거나 초안그란 대상에 관한 것으로, 다른 사람은 초록색 대상에 관한 것으로 기술한다. 동일한 기술을 듣고 어떤 사람은 네로를 잔인하다고, 다른 사람은 잔인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단지 R만으로는 이러한 다양성을 화해시킬 수 없다.

다행히도 이 다양성은 이제 화해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부분론자와 집합론자의 갈등은 단지 어떤 양화 체계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일 뿐이고, 초그람을 초록색임보다 근본적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말싸움을 벌일 뿐이다. 네로를 잔인하다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사실이 아닌 평가에 있어서만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들을 넘겨버리는 것은 전혀 다행이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정말 단단한 지반”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다양성의 문제로 넘겨 버린다면, 결국 “공유되는 실재”라는 표현 자체가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의문은 이렇게 끝난다. T는 옹호되기 어렵다. R만으로는 실재는 아주 공허한 개념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재를 공허하지 않게 만들면서도 T를 통해 그것을 이루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든 실재를 공허하지 않게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앞 문단에서 예를 들었던 방식들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합론적 양화를 선호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색이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잔인하다. 여러 방식의 주장 가능성은 열어두되, 그 중 하나의 방식만을 채택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 근거를 찾기로 한다면 결국 평가적 판단에 관해서도 객관성을 주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보았듯, 어떤 평가적 판단들은 가언적 형식을 가지며, 이는 그 판단들이 오로지 평가적 판단이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허하지 않은 실재 개념을 가지면서도 평가적 판단들을 상대화하려면, 글쎄, 그것은 오로지 평가적 판단들을 상대화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는, 임시변통적 전략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실재의 모습들이거나, 단일한 방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총체적 실재, 둘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 Davidson, Donald. 2008.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이윤일 역). 나남.
    • ______. 1974. 「개념적 도식이라는 바로 그 생각에 대하여」(pp. 295-317).
  • Hirsch, Eli. 1997. Dividing Reality. NY: Oxford University Press.
  • ______. 2002. “Quantifier Variance and Realism”, Philosophical Issues, 12: 51-73.
  • Putnam, Hilary. 1987. “Truth and Convention: on Davidson’s refutation of conceptual relativism”, Dialectica, 41.102: 69-77.
  • ______. 2006. 『존재론 없는 윤리학』(홍경남 역). 철학과현실사.
  • Warren, Jared. 2015. “Quantifier Variance and the Collapse Argument”, The Philosophical Quarterly, 65.259: 241-253.
여정
benedict74@yonsei.ac.kr
지평 기획 총괄. “일상적인 것의 재발견” 기획자. 형이상학, 언어철학, 미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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