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자 (1)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을 여는 남곽자기南郭子綦와 안성자유顔成子游의 대화편은 장자의 존재론을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힌다. 이 대화편의 마지막 문장부터 보도록 하자. 남곽자기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불어대는 소리가 일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그 소리는 그 자신의 구멍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인데 모두가 다 그 소리를 취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힘찬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그 누구인가(夫天籟者, 吹萬不同, 而使其自己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이 대목을 ‘뭇 구멍들이 소리를 내게 하는 것,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있는 근원적 존재(자)는 없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자기子綦의 이 말은 자유子游가 천뢰天籟(하늘의 피리 소리)에 관해 묻자 그에 대해 답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장자가 인뢰人籟(사람의 피리 소리), 지뢰地籟(땅의 피리 소리), 천뢰天籟의 비유로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인 천뢰天籟는 그 자체로는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될 수도 없지만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가능케 하는 그 어떤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뒤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도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통해서 하나가 된다(道通爲一).” (또한 다음과 같이 다시 한 번 말하고 있다: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장자는 일원론적 존재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을 수 있다. 서양철학에서의 이론들과 비교해 보건대, 장자의 이 일원론은 스피노자적 일원론과도 나란히 두고 볼 수 있겠다. 결코 인식이 도달할 수 없되 모든 사물을 가능케 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 인격(적 주체성)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만물이 되는 근원적 존재를 상정하는 일원론의 입장을 피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신 즉 자연이기도 한, 스피노자의 유일 실체와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스피노자에게 역시 이러한 유일 실체인 신은 신인동형론적 신이 아닌, 그 자체로서 생성하여 여러 속성과 수많은 양태들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를 스피노자는 《윤리학Ethica》에서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는 경구로 요약했다. 이것을 단순한 집합적 포함관계나 인과적 종속관계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물이 사물로서 분별되고 나누어지기 이전에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는 참된 것, 즉 실체는 바로 하나이며 그것이 전체로서의 자연이라는 주장으로 독해할 수 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 역시 장자의 일원론적인 존재론과 같은 결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앞서서는 장자의 존재론에 관해서 논했다면, 이제는 장자의 인식론을 짚어야 할 차례라 하겠다. 확실히 〈제물론〉의 어떤 구절들은 장자의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여기에 어떤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진리와 유사한지 진리와 유사하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今且有言於此, 不知其與是類乎, 其與是不類乎).” 일일이 예시를 들 것도 없이, 수많은 대목에서 장자는 사물에 대한 견해나 옳고 그름(是非)에서 어떤 절대적인 우위를 확정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상대주의를 넘어, 그 어떤 존재에 관한 참된 앎도 가능하지 않다는 회의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 예컨대 설결齧缺과 왕예王倪의 대화편이 그렇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장자는, 세속의 시비是非와 외물外物에 관한 그릇되고 헛된 집착을 넘어 궁극에는 도道에 도달하는 경지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이는 말하자면, 앎을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는 역설이며, 이런 점에서 회의주의의 궁극적인 지점에 유아론이 있는 서양 맥락에서의 회의주의와는 달라 보인다.

장자에게 작은 앎이 아닌 큰 앎, 참된 앎은 개별 사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사물을 각각의 사물들로 분절하는 언어(개념)의 작용 이전에 하나(一者)로서 존재하는 자연에 대한 직관인 듯하다. 만물이 이미 각자 서로 다른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매순간 변화하는 각개의 사건으로서 있을 뿐이며, 따라서 있음이 있고 없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있는 것으로서 있지 아니한 그 하나의 없음으로부터(여기에는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쌍 자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있음과 없음이라는 대립적 개념과 더불어 만물이 있는 것으로서 있게 된다. 이러한 일원론적 존재론의 입장과의 연속성 속에서, 장자에게 사물에 대한 앎이란 참된 앎을 가로막고 하나인 자연 그 자체를 알 수 없게 방해하는 것인 셈이다. 인식은 역설적으로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식론적 장애물인 것이다. 장자는 시是와 비非, 자기와 타자의 분별과도 같은 뭇 사물들에 대한 지식, 판단, 이론 등을 ‘괄호 안에 묶어’버림으로써, 의식적인 앎의 욕망을 중지함으로써 오히려 ‘초월적’이라 할 만한 앎으로 나아가려는 듯하다.

그런데 장자는 이 궁극적인 목표만을 긍정함으로써, 일상적인 혹은 과학적인 지식 내에 그 어떤 우열도 부여하지 않는다. 만일 세상에 존재하는 만인이 모두 다 도가적 성인의 경지에 다다라 작은 시비를 논하지 않고 사회 규범이나 제도를 통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모두 자연과 합치되어 유유자적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모든 폭력과 고통은 일시에 없어져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생이 부처 되기가 어렵듯 세속의 범인이 성인 되기가 난망하다면, 모두가 부처요 성인인 이상적인 세계에 이르기 전까지 여전히 계속해서 존재할 억압과 폭력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장자의 인식론적 상대주의, 즉 어떠한 사물에 대한 이러한 해석도 절대적으로 옳다 할 수 없고 저러한 해석도 절대적으로 옳다 할 수 없다는 입장은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억압과 폭력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2. 근대

오늘날 통치성은 삶을 생존조차 위태로운 처지에 방치하거나 혹은 생존은 가능하도록 하되 삶을 단지 그러한 연명의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작동한다. 다시 말해 오늘-여기의 정치적 문제의 핵심은, 삶이 억압과 폭력에 노출된 채 방치되든가 혹은 지독한 진부성과 동일성에 포섭되든가 하는 이중의 위협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자면, 억압적인 것은 진부한 것과 구별되지 않고 섞이며 공모한다.

그런 만큼 통치하는 주체(국가 장치, 이데올로기, 제도 또는 문화 등)와 통치되는 대상(개인 또는 ‘순수한’ 삶 자체)의 이분법은 더 이상 오늘날의 정치를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다. 권력의 담론이 한 편에 있으며, 그것이 조작의 대상으로 삼는 순수하고 본래적인 삶 자체가 다른 한 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사회문화적 구성물이고, 삶의 양식을 생산해 내는 권력의 공간에 바깥은 없다. 혹은, 그 바깥으로의 탈출은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국가 및 자본의 체제 밖으로 추방함으로써만 가능한데, 이것은 스스로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자본이 연계된 체제가 발휘하는 배제의 작용 자체이다. 정당화된 폭력에 맞서는 일, 삶의 동일성에 맞서는 일은 지금 오늘-여기의 이 삶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에서 출발하며, 무엇보다도 타자에 대한 섬세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각은 억압과 차별의 구조에 의해 통치되는 자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구조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기도 한 주체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적은 하나가 아니고 적은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벌써 여러 번에 걸쳐, 이러한 지적을 해온 바 있다. 오늘날의 시대는 탈근대와 같은 것이 아니며 여전히 근대일 뿐 아니라 첨예화된 근대이다. 그리고 위에서 요약한 것이 바로 첨예화된 근대의 조건 내지는 상황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3. 장자 (2)

『장자』라는 텍스트는 일체의 언어적인 것 혹은 인위적인 것을 ‘해체’한다. 이 때문에 『장자』는 이른바 ‘포스트’ 담론 — 그 발원지인 프랑스의 철학 및 사상적 입장이라기보다는 ‘포스트post’라는 접미사를 붙여 명명하고 재편한 미국에서의 사상적 흐름 — 에 기대어 다시 읽히고 있는 듯하다. 장자는 일체의 규범이나 제도를 거부하며, 나아가 (늘 이분법적 틀을 통해 작동하는) 관념들을 해체하여 ‘나’라는 것을 버리는 경지에까지 이를 것을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장자』는 언뜻 굉장히 급진적인 텍스트로 보인다. 이를테면 무용無用의 용用(쓸모)을 이야기하는 대목의 경우, 근대적 합리성에 기반한 (소비)자본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말로 읽히기도 한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차원에서라면 『장자』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정치적 역량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장자』는 첨예화된 근대로서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정치적 문제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는 못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장자』는 그 어떤 인위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삶에 바치는 찬가로 읽히는데, 이는 근대에서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어떤 장(章)들에서는 이분법적 관념들을 해체하고 있지만, 텍스트의 다른 부분에서는 여전히 완전한 자유 혹은 순수한 삶과, 그것을 조작하는 인위, 권력의 담론이라는 구도를 반복하고 있다.

물론 장자의 사상이 제시하는 방향의 궁극적인 지점에서는 억압의 담론, 제도, 문화 역시 해체될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사상은 그러한 억압 혹은 차별의 담론에 당장 맞설 수 있는 비판의 논리 역시 해체한다. 요컨대 장자적 사유가 배격하고자 하는 인위적인 담론들, 이념들, 제도들에는 억압적인 것과 그러한 억압에 맞설 수 있는 도구인 것의 구분이 없으며, 따라서 오직 꿈으로, 궁극적 이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제시할 뿐 당장의 억압과 폭력에 관해서는 어떠한 답도 주지 못한다.

나는 장자의 사유가 사회 전체를 변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기보다 혼란한 세상 속에 떨어진 한 개인을 욕망과 미망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설령 장자의 존재론 및 인식론을 확대하여 여기에서 정치적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르나, ‘선을 행하지도 악을 행하지도 말라’는 요지의 대목(‘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양생주養生主」 제1장)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장자의 사유에서 (진정한, 혹은 근원적인) 정치적 실천이란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4. 동시대

오늘날 정치는 서로 다른 가치나 정의 간 충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진실 간 충돌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웹상에서, 댓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쟁들을 살펴보면,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현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다고 여기며, 상대편은 선동되고 세뇌되어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옹호와 지지의 근거는 (그 세력이 제시하는 이념이 타당하거나 정책이 바람직하다는 점이 아니라) 자신이 진실을 아는 축에, 진정으로 ‘깨어 있는’ 축에 속한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그야말로 진실의 정치이며, 진실에 모든 무게가 다 쏠려 있다. 사상이나 해석, 이념, 가치 판단마저 삼켜버릴 정도로 말이다. 사실 판단의 문제가 전혀 아닌 상황에서도 빈번하게 쓰이는 (이제는 한국어에 완전히 흡수가 된) ‘팩트’, ‘팩폭(‘팩트 폭행’의 준말)’과 같은 말을 보라. 진실은 개별적인 명제나 진술, 주장에 대한 진실을 넘어 총체화된 체계가 되고, 그렇게 총체화된 진실‘들’은 양립 불가능한 복수의 진실들이며, 진영화된 진실들이다.

이러한 극단적 대립의 양상들을 보면 그야말로 머리가 아찔해진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진영이 현실을 참되게 인식하고 있으며 상대 진영은 그야말로 선동당하고 세뇌당한 우매한 자들이라고 얼마나 굳게 믿고 있는지, 내가 지금껏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공상마저 잠시 스쳐갈 정도다.

중요한 것은 상대주의를 통해 이러한 대립 자체를 해소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1980년 5월 광주에서, 국가가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가능한 하나의 사실 인식이 아니라 폭력을 옹호하고 재생산하는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건에 대해 객관적으로 완벽한 앎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실재가 아닌 하나의 동일한 실재에 살고 있으며,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5.

일원론이라 할 만한 존재론으로부터 진리와 도덕 등 일체의 언어적 앎에 대한 거부, 곧바로 초월론적이며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직관으로 건너 뛰어가는 인식만을 긍정하는 인식론이 아닌 다른 인식론의 가능성을 찾을 수는 없을까?

우리가 설득력 있고 정합적인 관념론의 체계를 받아들일지라도, 여전히 그러한 관념론은 어떤 실재의 영역, 주관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영역을 남겨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영역은 말 그대로 ‘하나’인 어떤 것이다(그러므로 그러한 영역을 단지 물리적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아마도 이것이 칸트가 우리에게 보여준 바 있는 교훈이다. 다만 칸트에게 이른바 ‘물자체’의 영역이란 출발점이라기보다는 나머지다. 내가 의문이었던 것은, 주관에 독립된 실재로부터 사물들과 현상들의 생성이 도출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나는 여러 차례 ‘사건’이라는 개념을 사건과 사실로 분리해서 제시해왔다. 사건 자체는 그저 일어나는 것, 일어난 것에 뒤이어 일어나는 것, 일어남의 지속인 것이며, 그러한 일어남이란 내용 없는 것이라고 얘기해 온 바 있다. 사건은 다만 다른 사건을 일어날 수 있게 한다. 사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현실화actualize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이다. 일어난 것이 어떠한 일어남인지를 가리켜 사실이라고 부른다면, 사실이야말로 내용을 가진 것,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 일어남 자체, 즉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편의상 이 용어를 채택하자면) 인과관계의 사슬 중 하나인 어떤 것이 사건이다. 사건은 사실의 뒷면이다. 혹은, 사실은 사건의 표면이다. 사건의 사실됨이 곧 실재화realize다. 아마도 나는 사건-사실 개념을 통해 칸트적 물자체와 스피노자적 실체를 사유해왔던 것 같다. 그들의 영향에 관해 애써 부정해왔지만 말이다.

사건-사실은 늘 그 총체 속에서 사건-사실이다. 사실은 언제나 모든 사실들의 연언 속에서의 사실이다. 주체와 독립적으로 사건의 계열들이 펼쳐져 있으며, 사실들의 연언은 실재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이 실재하는 것 전체다.

우리는 같은 현실에 뿌리박고 살고 있다는 것.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 오로지 하나로, 바로 이 세계로 실재한다는 것. 사건은 일어났으며, 일어난 사건의 그 일어남은 결코 부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실 속에 기입된 수많은 사실들이다.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근원적 조건은 단일한 랑그가 아니라 단일한 실재에 대한 긍정이다.

진영화된 진실 체계는 사실들에 대한 해석에 더하여 사실 아닌 것을 사실로 둔갑하고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부정하는 일을 동원한다. 이러한 국면에서 방관 혹은 기계적인 중립은 사실상의 상대주의다. 그리고,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확정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는 단지 합당하지 않은 인식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리의 차원에서 관용이 아닌 폭력이라는 점을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일어났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그것이 일어난 그것으로서의 사건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는 우리의 세계에, 오직 하나인 실재에 새겨져 있으며 따라서 결코 부정될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또 완전히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사건의 사실 자체는 주관과 독립적으로 실재하며, 우리는 그것에 대한 기술 혹은 해석이 완벽하다고 얘기할 수 없고 따라서 계속해서 여러 각도에서의 기술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기술을 배격할 수는 있다. 서로 다른 존재론 간의 번역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인식의 체계를 반성함으로써 좀 더 나은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식의 불완전함이 인식 자체를 버려야 할 이유를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6.

물론 우리에게는 남은 과제가 있다. 사실의 언어라고 믿는 것들은 실상 규정이나 판단의 언어이며, 사실들을 엮어 인과적, 논리적 일관성이나 정합성을 부여하는 체계의 언어이지 그 자체로 사실과 동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건의 사실들의 연언으로서 보다 거시적인 사실들을 기술하는 것, 그럼으로써 사실과 사실에 대한 가치 판단인 것 혹은 사실을 이념적 담론을 통해 규정한 것을 분리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여러 번 윤리적, 정치적 실천의 출발선상에 있는 것이라 말한 바 있는 애도 작업 역시, 이러한 사실의 탐구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그 무엇은 ‘빨갱이들의 내란 선동’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민주화운동’도 아니다. (이 역시 채 애도되기도 전에 ‘민주화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이념적 의미를 부여받고 규정된 것이 아닌가). 사실인 것은 바로, 군인들이 납탄을 지급받고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로 내려오지 않는 한 애도는 시작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장자莊子』 역본은 대체로 다음을 참조하였다: 장자. 2002. 『역주 장자 1』. 안병주.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단현
danhyun01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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