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ie Kaufman. 2007. 〈Synecdoche, New York〉

나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한여름에, 불개미가 나오던 옥탑방에서 나는 할머니와 수박을 먹고 드러누웠다. 죽은 모기들이 듬성듬성 피를 풀 삼아 천장에 무늬를 새겨 넣었다. 작고 낮게 깔리는 TV의 전파 소리와 함께 나른해진 나는 할머니에게 나를 사랑하는지 물었다. 당신은 이내 그렇다고 했다.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지 물었다.

“왜 사랑하긴, 내 손자니까 사랑하지.”

너무 무서운 말이었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아이가 할머니의 손자였다면 할머니는 그 아이를 사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가정이 실제 사랑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것은 ‘대체가능성’에 대한 나의 최초의 불안이었다.

20살 때 처음으로 들었던 대학 강의에서 한 철학과 교수는 첫날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를 시켰다. 으레 그렇듯 학생들은 어느 과의 몇 학번 누구였다. 교수는 다른 것들을 통한 정의가 아닌, 그러니까 순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표현으로 자기 소개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질문했다. 아무도 이렇다 할 답을 내지 못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위치와 호칭들을 부여받는다. 대학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느 학과의 신입생 누구이며, 사회에서는 어떤 부서의 어떤 직책, 혹은 몇억 명이 믿고 있는 종교의 신자, 수백만 명이 가지고 있는 취미를 가진 이, 혹은 어떤 이의 자식이거나 부모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들, 이미 있는 것들을 통해 정의된다. 데리다가 단어는 또 다른 무수한 단어들로 정의되며 또 그 단어들은 다른 단어들로 정의되는 것이 연속되는 무한한 지연이라는 것을 파악했듯, 한 개인에 대한 정의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주변의 다른 개인들로 정의된다(혹은 다른 개인들, 그 개인들이 모인 집단과의 관계로 정의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획득하는 지위와 칭호들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대체될 가능성에 두려워한다.

나는 또 한 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음 앞에서 근원적인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죽음은 절대적으로 무지의 영역이다. 그것은 마치 종교와 같아서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경험해볼 수 없다(경험하는 순간 모든 경험이 종결된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겪어야만 한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귀신이 출몰하는) 귀신의 집보다 폐가를 무서워하는 것은 어쩌면 (귀신보다는) 칠흑 같은 어둠 때문이 아닐까? 또한 우리는 죽은 뒤에 남겨질 사람들을 걱정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죽은 뒤에 남겨지지 않을 우리의 자리에 대해 두려워한다.

스케넥터디, 뉴욕[영화 제목인 시네도키(제유법), 뉴욕과의 형태적 유사성을 통해 하나의 상징이 되는 도시]에서 회색으로부터의 Fade In과 함께 케이든이 일어난다. 그는 갑작스레 죽음의 그림자를 밟아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죽어가고 있고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현재의 삶을 살기 위해 마치 그것을 잊어버린듯이 살아간다. 그러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질병을 통해, 문득 죽음의 그림자가 삶에 드리워질 때면 잠깐 두려워지기를 반복한다. 죽음에의 염려가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 힘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차마 살아갈 수가 없어진다.

신문에서 타인의 부고를 접한다. 우편함 속에 요양 프로그램 홍보물이 있다(그리고 그 뒤에서 차후 그의 분신이 될 새미가 죽음의 사신처럼 서 있다). TV에서는 죽음을 말하고, 가벼운 외상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생각지 못한 병을 발견한다. 주인공에게로 (생물학적) 죽음이 급격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설령 그가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죽음에의 강박에 사로잡혔다. 드리워진 그림자로 인해 어두워져, 무엇이 자신에게 그늘을 만드는지 확인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죽음에의 불안이 그를 덮쳐온다. 그것은 사회적(관계적) 죽음이다. 아내인 아델과 케이든은 이혼 조정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아델과 케이든이 어떤 여자와 상담을 한다. 아델이 말한다. 차라리 케이든이 죽어버리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고. 그리고 아델이 갑작스레 딸 올리브와 단 둘이서 베를린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곧바로 그의 남편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지위는 아델의 친구 ‘마리아’에 의해 대체되어 버린다.

성애性愛와 부성애. 사랑은 하는 순간에는 대체불가능해 보이다가도 헤어짐 후에는 너무도 쉽게 대체되어 버린다. 케이든은 클레어와 새롭게 결혼을 하고 딸 애리얼을 낳는다. 그러나 새롭게 대체시킨 가정에서 케이든은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자신이 대체시켰다기 보다는 근본적으로는 대체되었기 때문에), 아델과 올리브의 비행非行 소식을 들으며 좌절하고 그들을 찾아 떠난다.

연극 연출가 케이든은 이러한 두 가지 죽음 앞에서 이를 이겨내고 ‘불멸’하고자 시도한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불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불멸이 있다. 하나는 생을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작은 불멸이며, 다른 하나는 생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남는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불멸하기 위해 작업한다. 그리고 이는 영원히 대체할 수 없는 ‘작품의 작가’로 남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케이든은 단순히 타인의 기억 속에서 불멸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그 안에 살기 위해 하나의 예술적 세계를 만든다. 니체가 말하는 ‘도피처’이다. 그는 죽음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시간을 멈추고 공간만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케이든이 만드는 세계는 하나의 ‘스케넥터디, 뉴욕’ 그 자체이다. 한 창고에 ‘리얼리즘’이라는 도발적인 개념 아래 모방 도시 ‘시네도키, 뉴욕’을 건설한다. 자신의 세계를 통째로 ‘대체’해버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케이든은 연출가로서, 그 세계의 신으로서 군림한다. 실제 세계를 표방하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연극이며, 배우들은 연기를 하며, 케이든은 연기할 배우를 고르고, 그들에게 매일 역할이 담긴 수행지를 전달한다. 이 속에서 진정으로 대체불가능한 타인을 위한 공간은 없다. 아내 클레어가 화가 나서 연극을 떠날 때, 조수는 곧바로 전화해 새로운 클레어 대역을 찾는다. 심지어 케이든을 동경하며 수십 년간 쫓아다닌 새미가 케이든의 역할을 부여받았을 때, 케이든은 상처받는 자기 자신마저 대체해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관찰자로 남는다.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케이든 자신과 헤이즐, 새미, 그리고 헤이즐의 대역인 태미 사이의 관계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대체되어 버린 자의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케이든에게 줄곧 사랑을 주었던 것은 이전 연극의 매표소 직원이었던 헤이즐이었다. 케이든은 헤이즐과의 관계가 틀어져 헤이즐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때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그녀가 다시 그의 조수가 되어 함께한다. 케이든의 대역인 새미가 생동감을 위해 헤이즐의 대역(태미)을 필요로 한다. 케이든과 헤이즐, 새미와 태미라는 이름에서부터 짝은 맞춰져 있다. 새미가 헤이즐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새미와 헤이즐이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고, 케이든은 어머니의 급격한 부고에 헤이즐의 대역인 태미와 함께 장례에 간다. 전도되어 버린 상황 속에서 케이든은 자신의 대역에게 질투를 느낀다. 태미는 그의 외로움에 대해 사랑 아닌 섹스만을 준다. 다음 날 그녀는 ‘어제 그렇게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며 찡그린다.

헤이즐과 케이든이 대화한다. 헤이즐이 다시 케이든에게로 돌아간다. 새미는 케이든을 질투하며 자살한다. 옥상에 올라간 새미가 케이든에게 외친다. (그 옥상은 케이든이 헤이즐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던 바로 그 장소를 ‘재현’한 공간이다.)

“케이든, 나를 봐! 넌 결코 주변 사람들을 보지 않아. 잘 봐.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케이든은 죽어버린 새미를 보며 말한다.

“일어나. 난 뛰어내리지 않았어.”

나의 대체물, 대역이 나의 통제를 벗어난다. 내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나의 대역이 선취한다.

새미의 죽음 이후 장례 신scene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다. 케이든은 “이제 깨달았어. 세상에 엑스트라는 없어. 모두가 각자 주인공이야.”라고 말한다. 곧바로 케이든의 대역이었던 새미를 대체해버리는 또 다른 대역이 케이든이 방금 말한 대사를 읊고 있다. 새미의 장례식은 이미 세트장이 되어 있고, 인공비가 뿌려진다. 사람들이 우산을 쓴다. 뒤에 놓인 스크린 속의 사람들과 그들을 분간할 길이 없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가상의, 죽은 자들이다. 엑스트라, 그 이하의 존재들.

이 세계는 전적으로 케이든이 만든, 케이든에게 종속되어 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이미 죽어버린 자의 꿈과 같은, 혹은 단테의 연옥과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어딘가이다. 한 배우가 케이든의 대역을 하기 위해 말한다. “나는 케이든을 잘 알고 있어요.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고 자신이 만들어낸 현실 속에 살고 있어요.” 흑색과 백색, 그 사이의 회색으로부터 Fade In한 영화는 다시 회색으로 Fade Out한다. 통상적으로 하나의 Fade In-Out의 고리는 하나의 시퀀스를 상징한다. 이 영화는 케이든이라는 죽은 자의 꿈이라는 하나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는 개연적 서사를 놓아버린 지 오래이다. 스케넥터디와 시네도키는 현실과 허구로 대응하지 않고 뒤얽히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영화 전체가 케이든이 만들어 낸 상상일지도 모른다. 헤이즐은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집에 살고, 케이든은 올리브의 어릴 적 일기장을 통해 올리브의 성인으로서의 생활을 모두 읽어낸다. 맥아더 기금을 받은 것도, 한 연극을 공연 없이 20년 이상 준비한 것도 그렇다. 영화 중반부에 아델과 올리브를 찾아 베를린으로 떠날 때 읽는 책의 저자가 그 책의 내부 서사와 일치한 행동을 한 것도 현실과 허구 세계의 경계가 비틀어진 결과이며, 현실의 집에서 일어나야 할 디제시스가 연극적 무대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몇 년이 지나도 케이든은 불과 직전의 일처럼 생각한다. 시한부이길 ‘선택한’ 사람에게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흐르면서 동시에 아예 멈춰 버린다. 매 순간이 죽음의 직전이기 때문이다. 그는 점차 먹는 약의 개수를 늘려가고, 청소하기, 연극의 제목 짓기와 같은 시덥잖은 일에 강박적으로매달린다. 연극에서 가장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 제4의 벽을 쌓아버릴 정도로 리얼리즘에 몰두해서 사실상 공연 올리기를 포기하는 것도 이러한 강박의 하나이다.

케이든은 클레어, 헤이즐과 사랑을 나눴지만 여전히 아델과 올리브의 그늘을 벗어날 수가 없다. 최초의 ‘가장 소중한 관계로부터의 대체 당함’의 경험은 그에게 트라우마를 만들었고, 그 이후의 모든 노력들은 페티시즘​​*​​처럼 결코 이 최초의 결핍을 채워줄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연극은 자신의 주변 세계 전체를 담지만, 아델과 올리브의 대역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아델과는 ‘엘렌’이라는 가정부 역할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된다.

케이든이 마침내 선언한다. “I’m out of ideas. I’m dead.” 그에게 새로운 죽음이 찾아온다. 생물학적, 사회적 죽음을 이겨내고자, 예술로써 불멸을 시도했던 케이든은 예술적 영감의 소멸과 함께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한다. 나를 사랑했던, 어떻게든 나와 대체불가능해 보이는 관계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 (부모, 헤이즐, 아델, 올리브, 새미 …) 그가 만들어낸 (그마저도 모방으로 구성된) 세계는 언제든지 그가 고갈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잡아먹는다. 엘렌 역할로 캐스팅되었던 여성이 그의 대역으로 자리한다. (새미의 빈 자리를 차지한 대역의 또 다른 대역이며, 앞서 언급한 케이든을 죽은 자로 진단한 인물이다.) 그녀가 아이디어가 사라진 케이든에게 그가 쉴 동안 디렉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맡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엘렌의 자리를 부여한다. 서로가 완벽하게 뒤바뀐다. 엘렌이 된 케이든은 곧바로 이어폰을 전달받는다. 그는 이제 똥을 쌀 때도, 옆집 아주머니와 대화를 할 때에도 귀로 전달되는 지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역할을 수행한다. 엘렌(그마저도 엘렌의 대역인 여성)과 케이든의 얼굴, 엘렌의 기억과 올리브의 얼굴이 교차편집된다. 그가 그녀의 기억을 갖는다. 세계가 그를 잡아먹었다. 그는 완벽한 엑스트라가 된다.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거나 떠났다. 이미 엘렌으로 엘렌의 기억을 지닌 케이든이 정처없이 떠돌다가 엘렌의 어머니를 만난다(엘렌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머니와의 산책 장면은 사실 영화 초반부에 미디어에 떠돌던 광고의 이미지라는 것이 적잖은 충격을 준다). 그가 어머니에게 기댄다. 마침내 그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다고 말하면서 의지를 다진다. 새롭게 영감이 떠오른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이 회색으로 옅어진다. 마지막 지령이 떨어진다.

“죽는다.”

영화가 끝이 났다.

그는 엘렌으로 죽어버렸다. 하이데거, 데리다, 레비나스 등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죽음’만은 온전히 나의 것이며, ‘죽음’만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 1학년 때 교수님이 원했던 대답은 이와 관련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나의 죽음은 나의 것일까? 나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다른 사람의 죽음이 나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 필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것이다.

물론 위의 명제는 감각에 대한 것이다. 단순히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을 것 같다는 식으로 소유권이 넘어갈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이에 대해 실험을 해 본 것 같다(결코 해답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엘렌으로 죽었다. 누군가(죽음?)에게 죽임 당했다. 그렇다면 나의 죽음 또한 타인의 것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엘렌으로 길을 방황할 때 이미 Director’s Table에 케이든의 대역이 죽어 있는 것을 지나쳐온다. 그는 케이든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결국 이것은 영화이기에 현실 – 영화 – 연극의 3중 구조가 생긴다. 만약 스케넥터디의 시민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리고 그들의 세계와 닮은 영화(그리고 그 속의 연극) 속 세계를 어렴풋하게라도 인지한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본다.


  1. ​*​
    수잔 헤이워드가 분석한 프로이트, 라캉 이론에 따르면 페티시즘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페티시즘은 차이를 부인하는 전략이다. 남성은 여성에게서 숨겨진 남근을 찾아내려 한다. 이런 페티시화는 육체를 파편화하고 조각 난 육체의 일부, 의상 한 벌에 의미를 과잉 부여함으로써 생겨난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그 자체로 완벽한 것으로 봄으로써 없어진 남근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때 차이를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형태는 가두어진다. 여성은 남근적이므로 남성에 대해 그녀는 거세 불안을 없애주는 안전한 존재가 된다.
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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